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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31화 (330/434)

제331화

북쪽과 동쪽의 성문이 무너지고 용병단의 습격이 시작되자 세이덴 왕국은 순식간에 혼돈과 공포에 휩싸였다.

“성문이 무너졌다!”

“산드라의 용병단이 침략을-!”

북쪽을 맡게 된 베니안은 자신을 가로막는 자들을 순식간에 베어나갔다.

“어리석군. 투항한다면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말했거늘.”

기껏해야 왕국의 경비 역할이 전부였던 세이덴의 기사들과 여러 전쟁터를 겪어온 산드라의 용병단은 수준과 질이 너무나 달랐다.

중급 용병단원 혼자서 기사 3명은 거뜬히 상대할 정도.

“죽어라-!”

철퇴를 든 거한이 기합과 함께 덩치처럼 큰 대검을 휘두르자 베니안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얇은 레이피어로 가볍게 쳐냈다.

“실망이군. 힘에 의지해서 내려치는…… 이 투박한 공격이 전부인가?”

공격을 막아낸 베니안이 미소를 지으며 턱짓을 하자 거한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대체 어느새…….”

시선이 닿은 곳은 허벅지. 두꺼운 갑옷을 관통하고 양쪽 허벅지가 뚫려 있었다. 어떻게 저리도 얇은 레이피어로 이 철갑을 뚫어낸 걸까.

“검은 관리하지 않으면 날이 무뎌지듯 실력 또한 그렇다. 마나를 실은 공격은 처음인가 보군?”

거한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베니안은 그의 등을 짓밟고 섰다. 그리곤 혼란의 전쟁터를 고고한 눈으로 훑고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두지만 투항하는 자는 살 것이고, 죽을 것이다! 이미 정해진 승패에 목숨을 던질 멍청이는 없겠지? 지금 당장…….”

그러나 베니안의 연설을 가로막으며 민가의 지붕 위에서 누군가 외쳤다.

“어이! 폼 잡으며 식상한 연설을 하는 건 거기까다!”

베니안이 감히 누가? 라는 표정으로 바라본 곳에 당당하게 서있는 건 다름 아닌 에이미였다.

“넌 그때……. 하! 이제야 알겠군. 너와 그 여자는 세이덴이 보낸 첩자였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어떻게 된 게 세상은 나쁜 놈들 목소리가 더 크다니까. 못된 짓을 하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뭐, 뭐라?”

베니안이 에이미의 도발에 눈을 파르르 떨었다. 발길질 한 번이면 날아가게 생긴 조막만한 꼬맹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니.

하지만 에이미의 도발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시작이었다.

“생각해봐! 나쁜 짓을 해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강한 게 옳은 거라는 발상은 딱 침팬지 수준이라고.”

“뭐, 뭐라!? 감히! 너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보군!”

베니안을 필두로 성안의 시선이 한 데 모였다. 방송으로 다져진 에이미의 광역 어그로는 그야말로 수준급.

“당연히 아깝지! 그래도 나쁜 사람의 요구대로 전부 내놓을 순 없는 거야! 침팬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마음은 좀 더 복잡하다구.”

기껏해야 용병단에서 연설 몇 번을 해본 게 전부인 베니안이 수십만 시청자를 상대로 방송을 해온 에이미를 입씨름으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 녀석-! 말끝마다…….”

결국 열불이 터진 베니안이 에이미가 있는 지붕을 향해 지형지물을 밟으며 도약하자, 에이미는 미소를 지었다.

파앙-!

[변신]의 힘으로 쏟아지는 핑크빛 파동에 베니안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시야가 잠깐 가려진 찰나의 순간.

베니안은 자신의 팔목이 잡혔다는 걸 인지했다.

‘이, 이렇게 빠르다고?’

그러나 베니안의 공격을 막아낸 건 에이미가 아니었다. 베니안이 눈을 떴을 때 보이는 건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 김은아의 모습.

“정말 네 말대로 바보처럼 달려드네. 5급이라도 2대1은 간단한데 말이야.”

“그러게! 흥분해서 덤비는 악당은 무조건 패배하는 게 방송 연출의 기본인데 말이야.”

딱-!

김은아가 손가락을 마주쳐 소리를 내자. 마른하늘에 푸른 번개가 내려쳤다.

번쩍-!

처음은 빛.

우르르릉-

그 다음은 소리.

“흐으드드드극-!

말 그대로 짜릿하게 감전된 베니안이 몸 전체를 부르르 떨며 발작을 일으키자.

“아댜댜댜댜-! 왜 나꺄짓~!”

괜히 옆에 있던 에이미는 함께 감전 당해버렸다. 고의치 않게 1방에 2명을 보내버린 김은아는 어라? 하는 눈으로 에이미를 보았다.

그러나 이미 베니안과 함께 같이 뻗어버린 에이미.

“어, 야! 괜찮아?! 미안 실수로……. 힘 조절을…….”

김은아는 정신 차리라며 거칠게 에이미를 흔들었지만 몸을 축 늘어트린 에이미는 마나를 담아 바닥에 흔적을 남겼다.

[범인은 김은….]

“쥬금…….”

그러나 다잉 메시지를 끝까지 남기지도 못한 채 껙- 하고 정신을 잃은 에이미. 김은아는 동료를 잃은 슬픔에 하늘이 쩌렁할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에이미-!”

그러나 김은아의 간절한 부름에도 동료가 정신을 차리는 일은 없었다. 헌터란, 공략이란 이런 것이었다. 낯선 세계 차가운 땅에서 이렇게나 비참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동료가 필요하다.

그저 공략을 위한 도움을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공략을 위해 누구보다 용감했던 헌터의 마지막을 영원토록 기억하는 것도 동료 된 자의 의무였다.

“……에이미.”

호사유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그렇다면 자신의 소중한 동료는 무엇을 남겼는가?

김은아는 단연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에이미가 남긴 건 소중한 기억이라고.

“영원토록 잊지 않을게…….”

간절한 동료의 마음이 닿은 걸까 쓰러진 에이미는 마지막 힘을 짜낸 듯 한쪽 손을 떨며 말했다.

“그만 놀리고…… 빨리 치료나 해죠오…….”

*     *      *

청사자 레이오나.

그녀는 성안에서 지낸 시간보다 전쟁터에서 보낸 시간이 더 많았다. 하지만 북문을 파괴하고 있는 ‘무기’는 베테랑인 그녀조차 처음 보는 형태였다.

“이 괴물이…… 너희가 여인섬에서 틀어박혀 준비한 비밀병기라는 건가?”

“괴물이라니 드라고닉스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습니다. 나의 걸작이자 마공학의 진수죠.”

항마의 성질이 있는 날개를 펄럭이자 마법사들의 원거리 마법은 순식간에 힘을 잃었고, 기사들의 투박한 무기들은 강도 높은 철갑에 전혀 타격을 주지도 못했다.

쿠웅-!

드라고닉스를 조종해 건물 하나를 가볍게 으스러뜨린 페리아는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신은 왜 산드라 님이 다른 수많은 왕국 중 세이덴을 택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펜을 잡고 책상에 앉는 것보다 검을 잡고 전쟁터에서 먼저 나가본 사람이다. 전쟁의 본질은 욕망 때문이지. 그 이상의 이유라는 게 필요하나?”

페리아는 무엇이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로 레이오나가 패배하는 건 너무 자비롭다 생각했다.

“모르시나보군요. 산드라 님이 세이덴의 귀족 출신이라는 걸. 거기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가문 전체가 왕족에게 숙청당했죠.”

적어도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 복수를 위해서라? 멋지군. 하지만 왕족 대부분이 나에게 숙청당했다는 건 이미 산드라도 알고 있을 텐데?”

풋- 하고 튀어나온 레이오나의 비웃음에 페리아는 한숨을 쥐었다.

“참…… 당신은 섬세하지 못하네요. 겨우 생각이 거기까지 밖에 닿지 않습니까?”

그녀의 충신으로서 살아온 페리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산드라가 왜 세이덴을 택했는지.

“잘 들으세요. 세이덴은 산드라 님에게 지우고 싶은 과거에요. 점거한다면 왕족인 당신들은 물론 그 사건과 연루된 귀족들을 전부 지워버리겠죠.”

산드라는 패권을 뻗어나갈 첫 시작으로 세이덴을, 아니 자신의 과거를 택했다. 그건 일종의 의식과 같다는 걸.

“그러니 빈말이라도 목숨은 살려주겠다고 거짓말하진 않겠습니다. 당신들은 제가 전부 찾아낼 겁니다. 그리곤 드라고닉스의 뱃속에서 연료가 되도록…… 해드리죠!”

페리아가 레이오나를 향해 검지를 치켜들자 드라고닉스는 레이오나를 몸체를 들며 달려들었다.

쿵-! 쿵!

그 엄청난 크기에 발이 땅에 닿을 때마다 대지가 울릴 정도.

하지만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거대한 비밀병기를 준비한 건 페리아만이 아니었다.

세이덴을 지키기 위한 뼈로 이루어진 비밀병기는 몸체와 어울리지 않는 빠른 속도로 날아와 드라고닉스를 내려쳤다.

콰앙-!

드라고닉스가 본드래곤의 거대한 앞발에 맞아 몸이 뒤집히고 뒤로 밀려나자 페리아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을 했다.

“드래곤 하트를 사용하고 있는 드라고닉스를 상대로 어떻게 이런 힘을…….”

일격으로 상대를 뒤집어버린 본드래곤은 뼈로 된 이빨로 드라고닉스의 목을 물어뜯었다.

“바보 같은-! 드라고닉스의 몸은 다이아몬드보다…….”

그러나 페리아의 믿음과 달리.

아드득-!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드라고닉스의 목에는 이빨 자국이 남겨졌다.

드라고닉스는 그 와중에도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둘의 힘의 차이는 좀처럼 따라잡히지 않았다.

저벅저벅.

쓰러진 페리아를 향해 본드래곤의 주인인 스미레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다가갔다.

“그럴 리 없다. 드래곤 하트를 재료로 하고 있는데 왜 힘에서 밀리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가요?”

“내 설계는…… 완벽했는데 어째서……. 대체 왜!”

페리아가 분한 듯 울분이 섞인 목소리로 외치자. 스미레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감돌았다.

지금 스미레는 헌터로서 탑을 공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에게 보여줄 자비는 없었다.

“……그야 제 본드래곤이 드라고닉스의 드래곤 하트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죠.”

“거짓말! 드래곤 하트도 없이 드라고닉스가 움직일 수 있을 거 같아?!”

이 모든 건 이시우의 번뜩이는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네. 움직일 수 있어요. 대체품을 넣어놨거든요. 지금쯤은 효능이 줄어 평범한 마나석이랑 비슷하겠지만…….”

단순히 드래곤 하트를 훔쳤다면 분명 들켰을 것이다. 하지만 대체품을 넣어놨기에 페리아에게 들키지 않고 드래곤 하트를 훔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게 큰 힘의 차이를 나았다.

스미레의 본드래곤은 바하무트라는 이름을 얻어 격상했고, 드라고닉스는 그저 커다란 고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네가 몰래 여인섬에 잠입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냐?”

“기억나지 않으신가요? 요리를 해드린 적도 있었는데.”

구면이라는 스미레의 말에 페리아는 그제야 얼굴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아직은 어렴풋하지만 분명 저 보랏빛 머리카락은 만찬회에서 본 듯한 기억이 있었다.

“이럴 수가…….”

페리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인생을 갈아 만든 걸작이 좀도둑의 도둑질 한 번에 이리도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걸.

지이잉-

마침 벨벳표 마나석도 힘이 다했는지 드라고닉스의 눈에서 불빛이 꺼지자. 스미레는 화창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렇게 또…… 벨벳의 도움을 받고 말았네요.’

그 때문일까. 스미레는 문득 구름 위에서 엄지를 치켜든 벨벳의 모습이 보이는 착각이 들었다. 에이타를 간 벨벳이 탑에 있는 드라고닉스를 쓰러트린 것이다.

[캬항! 벨벳은 천재야!]

오늘따라 더욱 벨벳의 목소리가 그리운 스미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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