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9화
등산에는 어울리지 않는 야밤.
밤하늘은 빛의 무리가 아름답게 수놓아져 있었다. 신유성이 생각한 탑의 세계란 어찌 보면 저 빛의 무리와 같았다.
다른 차원에 놓여 서로를 인지할 일은 없었으나 명백히 존재한다는 점이 그러했고 이미 끝나버린 역사처럼 보이지만 잔상으로 남은 빛이 아른거린다는 점이 그러했다.
헌터는 탑을 오르며 여러 차원의 지식을 배웠고, 경험을 쌓아 자신의 세계를 풍요롭게 만들며 구해나갔다.
그렇다면 탑을 등반하는 사람은 그 빛 무리를 지켜보는 천문학자이자 관찰자라는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나와도 괜찮습니다.”
빙긋 웃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신유성이 읊조리자.
서걱- 삭-
소동물의 움직임조차 느껴지지 않던 적막한 숲속에서 마른 나뭇잎을 밟으며 산드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름 기척을 지웠건만……. 역시 넌 귀한 가문에서 태어나 곱게 자란 영애는 아닌 모양이야.”
산드라의 눈은 여유롭게 웃고 있었지만 입가는 웃고 있지 않았다.
둘 사이에서 감도는 건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긴장된 분위기.
척-
신유성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하늘을 흘기며 입을 열었다.
“당신은 알고 있습니까? 하늘에 뜬 별 중 일부는 우리가 보기엔 아름답게 빛나지만 이미 죽어 있다는 사실을.”
“서정적인 이야기군.”
신유성이 다른 차원에서 온 탑의 등반자라는 진실까지 도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나 산드라는 신유성의 말에 다른 속뜻이 담겨있다는 정돈 알고 있었다.
‘설마 기억을 잃은 게 아니었나?’
하지만 산드라는 신유성에게 분명히 능력을 발휘했다. 만약 신유성이 타국에서 보낸 첩자라 하여도 자신에게 알아낼 수 있는 건 없다고 생각했다.
“뭐, 아무래도 좋은 이야기 아닌가? 별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같은 건 평생 확인 할 일이 없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신유성이 여인섬에 잠입한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산드라가 신유성에 의도를 떠보기 위해 운을 떼자. 신유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죠.”
다른 차원에서 벌어지는.
그리고 다른 차원에서 벌어진 그 어떤 일들도 대부분은 탑의 기록에 새겨진 그저 한 줄짜리 정보에 불과하다. 그 사실을 읽는다고 해도 어떤 기분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탑을 높이 등반한 헌터들은 그 별들을 직면한다.
멀리서 관측한 사람은 변화를 알아채기 쉬웠다. 어떤 미래가 찾아올지 너무도 명확히 보였다.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저는 모두에게 최선의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최선의 방법이라……. 그게 무엇이지?”
그렇기에 안타까운 것이다.
인간은 모두 제각기 목표가 다르다한들 왜 명백한 파멸을 향해 달려갈까? 타인을 짓밟고 목숨을 빼앗는 잔인한 복수 끝에 남는 건 무엇일까.
“전쟁을 포기하세요. 당신은 반드시 패배할 테니까.”
움찔-
패배란 단어에 미처 분노를 숨기지 못한 산드라는 그만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세이덴에게 말인가?”
지금 산드라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경고하고 있었다. 더 이상의 무례를 범한다면 상대가 누구라도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아뇨 나에게 패배하겠죠. 난 이 전쟁을. 그리고 당신을 막으러 왔으니까.”
스릉-
산드라가 검을 들었다.
“난 불타는 낙인이 내 몸을 태울 때도…… 피비린내 나는 전장 속에서도……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비참한 현실을 참고 참아왔다.”
그리고 그 검을 신유성에게 겨누었다. 산드라는 자신을 막는다면 상대가 누구라 하여도 정말 베어버릴 생각이었다.
“이 전쟁은 내가 목숨을 이어온 이유다. 지난 20년을 모두 바쳐 준비했지.”
이 전쟁은 지금의 산드라를 만들어낸 이유였으며 그녀가 제왕의 군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모든 원동력이었다.
이제 와서 누군가의 알량한 몇 마디로 어찌 놓을 수 있을까?
“복수를 위해?”
“그래 복수를 위해. 그리고 그 복수는 내 모든 것이지.”
산드라가 말한 복수라는 단어는 신유성을 생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누군가를 향한 원망은 확실히 원동력이 된다. 부정적인 감정은 때론 사람을 강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신오가문에 버림받지 않았다면 어찌 무신산의 수련을 전부 견딜 수 있었을까?
지금 신유성의 실력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던 신유성이 가지고 있던 버림 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 거기에 자신을 버린 이들에게 당신들이 틀렸다고 되돌려주고 싶다는 마음이 합쳐진 산물이었다.
부정적인 감정이 가진 힘은 자신의 경우만 하여도 이렇게나 강렬한 영향력을 내뿜건만. 산드라는 어떠할까?
자신은 절대 산드라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산드라는 절대 복수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건 운명이 정해진 별과 같았다.
이미 죽은 불빛을 향해 소리쳐도 바뀌는 건 없었다. 별의 죽음을 뒤늦게 발견하여도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관측자가 무슨 행동을 하여도 별은 정해진 미래를 향해 올곧게 달려간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이쪽에선 결판을 지을 뿐. 절벽을 향해 천천히 나아간 신유성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졌다.
“너-!”
놀란 산드라가 눈을 부릅떴지만 이내 시원한 바람과 함께 거친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펄럭! 펄럭-!
절벽 아래에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건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드래곤의 형체.
“드, 드래곤?”
당황한 산드라가 뒤로 물러서자 스미레는 바하무트에게 명령을 내려 더욱 높이 날아올랐다. 메이드 복을 입은 채 본드래곤을 조종하는 하녀라니 자신의 여인섬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 * *
지금 떠올리기엔 꽤 어린 시절.
스미레도 멋진 백마나 마차를 타고 좋아하는 사람과 여행을 하는 상상 정도는 해본 적 있었다.
그렇다면 괴수가 득실득실한 잿빛의 바다 위에서 본드래곤의 등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건 낭만적인 일일까?
누구나 고개를 저어버릴 상황이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함께라면 스미레는 이야기가 달랐다.
“이제 곧 공략의 막바지네요.”
공략을 위해 사쿠라와 이시우는 최종 병기의 부품인 드래곤 하트도 훔쳐냈으며, 신유성은 능력의 비밀도 밝혀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공략에 스미레는 분명 신유성이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예상한 결과지만…… 설득은 실패했네. 결국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됐어.”
그러나 어딘가 실망감이 담긴 신유성의 목소리에 스미레는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신유성은 이런 사람이고, 이런 사람이기에 자신은 신유성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걸.
“……마음이 무거우신 거죠? 역시 저지해야 할 보스이기 전에 같은 인간이니까요.”
부드럽고 자상한 스미레의 목소리에 신유성은 안도감이 들었다. 분명 이런 감정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인간형 보스를 저지해야하는 첫 공략이기에 더욱 그랬다.
“그래. 조금은. 하지만 흔들리진 않을 거야. 복수를 우선시 한 산드라처럼…… 나에게도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
언제나 이야기가 좋은 결과로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신유성의 권유로 산드라는 전쟁을 포기하며 그로 인해 절로 퀘스트가 공략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막을 수 있는 일이 있으며 막을 수 없는 일이 있다. 운명으로써 만들어낸 필연은 절대로 막을 수 없다.
“후훗, 네! 맞아요! 벨벳과 못 본 지도 며칠이 되었으니……. 모두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일 거예요.”
여인섬에선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신유성과 이시우가 여자로 변하는 해프닝도 있었으며 스미레가 엄격한 요리 심사에 참가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리고 에이타에 간 벨벳도 많은 친구를 만나며 겪은 경험 덕에 서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것이다.
그건 신유성과 스미레가 돌아가야 할 이유였고,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처음엔 권유조차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어. 공략의 변수는 그쪽이 적었으니까.”
조금의 안전성도 높이기 위해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 그렇기에 스미레는 너무나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그건 유성 씨가 아닌 걸요? 유성 씨는 너무 자상한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그런 신유성의 선택은 언제나 나은 결과를 만들어 왔다. 진작 버림받았어도 할 말이 없던 스미레는 어엿한 파티원이 되었고, 빌런을 상대로 김은아의 오빠를 구할 수 있었으며, 얼어붙었던 아델라의 마음을 녹였다.
“그러니 유성 씨…… 자책하지 말아주세요. 바꿀 수 없는 일도 있다는 걸 배웠을 뿐이에요.”
산드라의 꿈은 복수였다.
설령 전쟁을 치르게 되고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더라도, 아니 자신마저 목숨을 잃더라도 이뤄야 할 꿈.
산드라는 그 꿈을 선택했다.
신유성의 공략은 그 꿈을 저지하는 일이지만 이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러니 죄책감은 가지지 말아 주세요. 저희들이 공략을 통해 이 세상에서 막는다는 건……. 희생당할 누군가를 구하는 일인걸요?”
스미레는 그 말을 끝으로 그저 신유성을 안아주었다. 탑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던전에서 단순한 몬스터만을 상대하던 헌터들에겐 생소한 감정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반드시 경험이 되고 헌터를 성장시킨다.
현실에선 겪지 못할 일들을 하나의 배역이 되고, 이야기라는 형태로 완결을 시킨다.
“스미레…….”
거친 날갯짓과 함께 본드래곤이 잿빛의 바다 위를 날아갔다. 그에 따라 바람에 흩날리는 신유성의 기다란 머리카락.
배시시-
“헤헤…… 그리고 얼른 늠름한 유성 씨를 다시 보고 싶기도 하고요.”
굳은 분위기를 풀기 위한 건지 가벼운 조크와 함께 신유성을 껴안은 스미레가 볼을 붉히자.
“그래. 스미레……. 우린 돌아갈 곳이 있으니까.”
신유성은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