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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5화 (324/434)

제325화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 했던가?

유난히 달이 푸르던 밤, 높은 파도에 나룻배가 위험하게 넘실거리는 와중에도 에이미는 유유자적하게 다리를 꼰 채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거센 파도소리가 마치 자장가 같군. 하지만 날 알고 있어. 바다는 공포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그런 이야기가 있다.

너무 많은 고생을 하면 사람의 뇌는 자신의 정신을 지키기 위해 머리를 조금 고장 내어 정신을 지킨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까지나 공포를 만드는 건 인간의 상상력이지……. 자연도 바다도 그저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 것을…….”

에이미는 머리가 고장난 건지.

아니면 정말 깨달음을 얻은 건지.

자연과 인생사에 통달한 도인처럼 멋진 대사를 뱉고 마른 건어물을 질겅였다.

“우믈- 우움, 너는 어떻게 생각해? 설마 아직 자고 있는 거야?”

거적을 뒤집어쓴 누군가를 흔들고 있는 걸 보면 에이미에겐 아무래도 항해를 같이할 새 친구가 생긴 모양. 그러나 새 친구는 바다에 완벽하게 적응한 에이미와 달리 멀미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자고 있긴. 조금도 못 잤어.”

스윽-

거적을 뒤집어쓴 누군가는 피곤한 얼굴로 거적을 걷어냈다.

“비린내에 멀미에 죽겠는데……. 어떻게 자냐?”

에이미의 새로운 파트너는 김은아였다. 산드라는 에이미가 신유성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하러 가겠다고 말하자 기꺼이 호위병을 붙여주었다.

[항해 중 해적을 만날 수도 있고 아녀자가 혼자 다니기엔 세상에는 악한이 너무 많으니 말이야.]

그렇게 김은아와 에이미는 한 팀이 되어 항해를 시작했다.

물론 그게 가온느 아르카데미 가문에게 찾아가 신유르시온 영애가 살아 있다 전하기 위한 항해는 아니었다.

이번 항해의 목적은 세이덴의 기사단장에게 산드라의 야망을 전하고 그 사실에 앞서 전쟁을 대비시키기 위함이었다. 어찌 보면 공략의 성패가 걸린 중요한 일인 것이다.

“참 불편한 세상이지만 어쩌겠어. 우리가 참아야지. 우리가 살던 곳에선 포켓으로 메시지만 보내면 끝이었는데!”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 김은아는 말린 건어물을 한입 물었다.

이런 중요한 공략에서 반찬 투정할 생각은 없었지만 입에 닿자마자 김은아는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질겅-

좋게 말하면 바다의 향.

나쁘게 말하면 비린내.

질겅-

김은아는 잘 씹히지도 않는 건어물을 억지로 꼭꼭 씹고 있자 얼른 탑을 공략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야. 뭔가. 부드러운 거 먹고 싶지 않아? 삶은 계란 같은 거…….”

잠 못 이루는 밤.

갑자기 ‘음식’을 주제로 운을 띄운 김은아.

“헤헤, 응. 좋지. 삶은 계란. 근데 의외다. 은아 너한테는 좀 소박한 음식이네.”

에이미는 김은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지만 온갖 산해진미를 먹어본 김은아가 꼽은 게 겨우 ‘삶은 계란’이라는 소박한 음식이라는 건 의외기도 했다.

“소금을 뿌려먹으면 맛있긴 하지만 삶은 계란은 좀 평범하잖아.”

에이미의 말에 김은아는 풋- 하고 웃었다. 그리곤 차가운 바닷바람에 몸을 오므린 채 벌벌 떨며 받아쳤다.

“온천물로 익힌 계란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식감은 또 얼마나 크리미한데?”

“엥, 온천? 그런 곳도 갔어? 아 너라면 통째로 빌렸으려나.”

온천이 있는 숙소를 통째로 빌린다니 일반인에게는 너무 스케일이 큰 이야기였지만 신성그룹의 후계자인 김은아라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니 하나 샀지. 우리 엄마가 담당하는 곳이 일본 지부니까.”

그러나 김은아는 거기서 한 술 더 떠버렸다.

“아, 샀구나…….”

잠깐이나 김은아를 과소평가한 자신을 반성하는 에이미. 김은아는 점점 심해지는 추위에 거적을 이불처럼 뒤집어쓰며 그리운 과거를 회상했다.

“물은 뜨겁고. 하늘은 탁 트인 노천탕에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얼마나 좋은데…….”

“헤…… 그러게, 좋겠다…….”

에이미는 바보처럼 히죽 웃으며 따뜻한 온천을 떠올렸다. 비록 지금은 추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고생하고 있지만 에이미는 온천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뜨거운 물과 차가운 밤공기. 그게 온천의 묘미지.”

김은아도 노곤해진 얼굴로 그리운 듯 그때를 회상했다. 해산물의 비린내와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이 가득한 이 나룻배 위에서 지내다보니 김은아는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헤헤…….”

그리고 그 마음은 자신도 마찬가지인지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에이미.

“그렇게 몸을 담그고 10분 즘 기다리면 비서가 물 위에 접시를 딱! 띄워주는 거지.”

김은아는 그런 에이미의 리액션에 힘입어 뿌듯한 표정으로 묘사를 이어갔다.

“상상해 봐.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가운 사이다랑 접시에 담겨 흐물거리는 온천 계란을…….”

에이미는 김은아의 말처럼 눈을 감고 상상했다.

밤공기가 시린 날.

뜨거운 온천에 몸을 잠그고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 만족한 얼굴로 깊은 숨을 내쉬고 있는 자신을.

[그러엄~ 이제 사이다랑 계란을 먹어볼까?]

방긋 웃으며 접시에 담긴 뜨거운 온천 계란을 숟가락으로 퍼먹은 뒤 차가운 사이다로 입을 헹구는 자신을.

[캬~!]

톡 쏘는 청량한 탄산을 떠올리며 감탄한 에이미가 기쁜 얼굴로 눈을 뜬 순간.

철썩- 철썩-

에이미는 여전한 망망대해를 보며 다시 잔인한 현실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건 단꿈에 빠져 있던 김은아도 마찬가지.

“……세이덴은 언제쯤 도착할까?”

무릎을 끌어안은 김은아가 온천을 떠올리며 힘이 빠진 목소리로 묻자 에이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아마…… 2일? 물론~ 가다가 태풍을 만나거나 바다 괴수를 만나지 않는다면 말이야.”

에이미의 입장에선 나름 웃으라고 한 유머였지만 김은아는 힘없이 끄덕였다.

“그렇구나…….”

점점 분위기가 암울하게 흘러가자 에이미는 애써 웃으며 분위기 전환을 시작했다.

“아 맞다! 이제 슬슬 걷어 올리면 되겠다! 은아 넌 처음 보지?”

마치 그물을 걷는 어부처럼 나룻배에 걸친 줄을 잡아당기자 미끼를 문 물고기들이 줄줄이 걸려 나왔다.

“이것 봐~ 이번에는 줄무늬가 있는 녀석이 많네? 이 녀석 냄새가 심하니까! 내장을 발라서 말리고 은비늘 이 녀석은 구워 먹어야지!”

그러나 에이미가 열심히 생선들을 나열하며 떠드는 와중에도 김은아는 어느 한 곳만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잿빛의 해역.

김은아의 눈이 닿은 곳은 나룻배의 밑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는 정체불명의 그림자.

김은아는 너무나 진지해진 목소리로 에이미를 불렀다.

“야, 에이미. 여기가 왜 제왕의 해역이라고 알고 있어?”

그럼에도 집중한 얼굴로 미끼를 문 물고기를 떼어내던 에이미는 그럼그럼-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할 뿐이었다.

“당연히 알지. 내가 말했던 정보잖아. 제왕의 해역에는 산드라 같은 보스들이 여럿 있다고.”

그러나 에이미가 알고 있는 건 반 푼짜리 진실. 김은아는 여전히 바다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 녀석들이 해역을 골랐다고 생각해?”

“음, 그건 모르지? 흐음 위치가 좋았나?”

“베니안의 용병단에서 들은 거지만 이 해역에는 전설이 있어.”

에이미는 절대로 모를 이야기.

오직 제왕의 해역에서 살아온 자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제왕의 해역에는 진정한 제왕이 있다.”

굳은 표정을 한 김은아가 조곤한 목소리로 운을 뗐다.

“천 개의 이빨을 가진 제왕은 배를 한입에 집어 삼키고.”

김은아는 용병단원이 해준 말을 그대로 읊었다.

“분노한 제왕이 꼬리를 내려치면 어떤 섬도 침몰한다.”

하지만 산드라를 필두로 한 해역의 주인들에게 패배한 이후, ‘제왕’은 이름을 헌납하고 사라졌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뱃사람과 해역의 용병들을 통해 전설로만 내려올 뿐이었다.

[잘 들어. 그 녀석은 평범한 생선이 아니라고. 우리가 괜히 제왕이라고 치켜세워 준 지 알아?]

김은아는 용병이 말해준 징조를 떠올렸다.

[그 녀석은 날씨를 조종해. 눈에 박힌 구슬이 그 힘이지. 제 맘대로 폭풍우를 몰아칠 수도 있고 암운을 드리울 수도 있어.]

하늘은 용병의 말처럼 어두웠다.

밤이 되어서 자연스레 찾아온 어둠이 아닌 너무나도 짙은 먹구름이었다.

[섬보다 큰 그 덩치가 배에 다가올 때면 바다가 어떻게 되겠어? 바다는 파도 하나 없이 잠잠해지지…….]

바다는 아까와 달리 너무나 잠잠했다. 호수처럼 고요했고 적막마저 흘렀다. 지금까지 수없이 들었던 파도 소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정적만이 가득했다.

[제왕을 직접 보면 잊을 수 없을 거야. 바다 밑에서 번뜩이는…….]

김은아는 지금까지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다의 한 점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길 봐.”

잿빛의 바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 속에서 너무나 아름답게 빛나는 거대한 붉은 보석.

[……그 녀석의 붉은 눈을 본다면 말이야.]

나룻배 위에서 일어선 김은아는 거적을 벗어던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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