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3화
하얀 대리석으로 세공된 거대한 사자 동상이 양옆에 세워진 청동 왕좌는 세이덴의 국왕만 앉을 수 있었다.
지금껏 세이덴의 역사에서 이 청동 왕좌에 앉은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왕국의 역사에서도 여왕은 존재하지 않았다.
턱-
그러나 지금 청동 왕좌에 앉은 건 고작 스물 정도로 보이는 여인.
스윽-
그녀는 잘 관리된 청색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며 여유로운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국왕의 자리에 앉는다는 건 참으로 귀찮은 일이군. 나한테는 역시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가 어울린단 말이지.”
전쟁터의 청사자.
세이덴의 ‘첫’ 여왕 레이오나.
그녀는 왕족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전쟁터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살인병기나 다름없었다.
충분히 실력을 쌓았다고 생각한 레이오나는 결국 편안에 찌든 국왕에서 형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피붙이를 제 손으로 숙청했고 이 청동 왕좌를 얻었다.
“어쩌면 옆에서 아부나 떠는 간신배들보다는 자네와 닮은 부분이 많을 수도 있겠어.”
그러니 레이오나가 기사 출신을 높게 사고 아끼는 건 당연한 일.
“……국왕으로서 명하기를. 지금부터 당신을 세이덴의 기사단장으로 임명하오니.”
레이오나는 빙긋 웃으며 국왕의 검으로 새롭게 부임한 기사단장의 어깨를 두드렸다.
“왕국의 안녕과 부흥을 위해 힘써주길 바라오.”
그렇게 지루한 의식이 모두 끝나자 새롭게 부임한 기사단장은 머리에 썼던 천을 벗었다.
스윽-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빛을 반사하는 은색의 머리카락. 붉은 눈과 왕국 전체를 통틀어 견줄 만한 사람이 없는 미모.
“……아델라 오르텐시아. 명을 받들겠습니다.”
세이덴에 새롭게 부임한 기사단장은 아델라였다.
[퀘스트를 클리어 하셨습니다.]
[당신은 세이덴 왕국의 기사단장이 되었습니다.]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 곧 벌어질 전쟁에서 세이덴 왕국을 승리로 이끄십시오.]
아델라는 이 짧은 몇 줄의 메시지를 보기 위해 레이오나가 만든 ‘승급식’이라는 대련에서 수없이 많은 상대를 쓰러트렸다.
그건 모두 강자를 좋아하는 레이오나가 가장 강한 기사에게 기사단장을 자리를 주겠다고 선포한 탓이었다.
‘덕분에 손쉽게 기사단장이 될 수 있었으니 잘된 일이겠죠.’
물론 아델라를 상대로 견줄 수 있는 세이덴의 기사는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척을 하며 얼음을 뿜어낼 뿐이었지만 아델라는 얼음의 마검사라 불리며 대련 내내 연승을 이어나갔다.
“그래. 너처럼 강한 사람은 언제든 환영이다. 혹여 다른 왕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누군가 텃세를 부린다면 네 검으로 목을 베어버리도록 해. 내가 책임지도록 하지.”
그 모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6급의 전투력을 가진 레이오나조차 호적수라며 흥미를 가질 정도였다.
‘국왕에게 신뢰를 샀으니 내부 활동은 문제가 없겠지만…….’
어찌해야 왕국 밖의 정보를 얻고 동료들과 만날 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진 그 순간.
아델라의 눈앞에는 긴급 퀘스트가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 제왕의 해역을 건너온 불굴의 항해자가 지금 세이덴 왕국의 해역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경비병이 발견하기 전에 먼저 접촉하세요.]
‘……불굴의 항해자?’
이름만 보아선 좀처럼 누구인지 예측이 가지 않았지만.
[상세- 불굴의 항해자가 감옥에 갇히면 히든 퀘스트는 실패로 돌아갑니다.]
지금 아델라에겐 시간이 없었다.
* * *
신유성은 생각했다.
만약 자신의 눈앞에서 빛을 내뿜고 있는 드래곤 하트가 없었다면 지금 들은 이야기를 믿을 수나 있었을까?
“……여인섬의 지하에 마공학 기계 로봇이?”
심지어 그 모습이 드래곤처럼 생긴데다 사이즈는 또 얼마나 큰지 성만큼 거대하다고?
“들어도 믿기 힘들지? 직접 본 나도 믿기 힘든 광경이었으니 오죽할까…….”
이게 얼마나 믿기 힘든 이야기인지는 설명을 하는 이시우조차 동감하는 부분이었다.
“나는 믿어. 그래…… 이런 물건을 가져오면 믿을 수밖에 없지.”
하지만 이시우가 쥔 엄청난 크기의 보석은 무려 드래곤의 체내에서 동력원의 역할을 맡는 드래곤 하트였다.
만약 마나가 혈액이라면 인간과 드래곤의 심장이 같을 수 있을까?
드래곤의 엄청난 마나를 온몸에 퍼트리기 위해선 그 힘이 얼마나 강대 할까?
그 덕에 드래곤의 체내에서 나오는 부산물인 드래곤 하트는 존재 자체가 아티팩트급 보물이었다.
‘마공학 기계 로봇이라…… 드래곤 하트를 사용하려면 그 정도 스케일은 되어야겠지.’
다행인 점은 전쟁이 시작하기 전에 발견해낸 덕에 드래곤 하트를 벨벳의 수제 마나석으로 대체 할 수 있었다는 것.
“그건 그렇지. 무려 드래곤 하트니까. 그럼 이건 유성이 너한테 줄 테니 네가 알아서 써줘.”
얼떨결에 드래곤 하트라는 엄청난 보물을 얻게 된 신유성은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드래곤 하트로 이번 공략에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여인섬에 헌터 대장간이 있을 리도 만무했으니 아티팩트를 만들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드래곤 하트가 영약처럼 섭취를 할 수 있는 부산물도 아니었다.
‘잠깐…….’
그때 문득 신유성의 머리에 떠오르는 절호의 아이디어.
‘마공학 기계의 형태가 드래곤을 닮았다고 했지?’
드래곤 형태를 취한 고도의 전투 병기는 산드라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 * *
만월의 달이 뜬 밤.
숙소를 빠져나온 스미레는 그림자의 비호를 받으며 나뭇잎 사이로 비친 어스름한 빛에 의지한 채 길을 걸었다.
‘적어도 몇 시간은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
대부분의 섬이 그러하듯 숙소와 성을 제외한 여인섬의 지역들은 개척되지 않은 자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덕분에 시선을 피할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기가 좋겠네요.’
스미레가 택한 곳은 가파른 절벽 밑 배가 정박하지 않는 해안가.
철썩-! 철썩!
스미레는 포켓에서 꺼낸 붉은색 보석을 양손 가득 붙잡았다.
‘……이게 드래곤 하트.’
아직 스킬을 사용하지도 않았건 만 드래곤 하트의 마나는 마치 살아있는 생선처럼 거칠게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윽…….’
스미레는 긴장했다.
가공되지 않은 마나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응축된 스프링 같아서 잘못 다룬다면 주변을 난자하며 파괴력을 과시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스미레는 온몸의 신경을 집중해서 마나를 발휘했다.
“애니메이트 데드.”
거대 술식에나 사용하는 주문 영창을 외우며 스미레는 쥐고 있던 드래곤 하트를 놓았다.
통-
물방울처럼 가볍게 튄 드래곤 하트는 잠식 되듯 바닥으로 스며들었고 스미레의 발밑에선 거대한 마법진이 땅에 그려졌다.
“영원히 잠든 사령이여.”
애니메이트 데드.
사멸한 혼백을 매개체 삼아 상급 언데드를 계약하고 소환시키는 흑마술의 고위 마법.
“다른 이의 뼈로 하여금 잃어버린 신체를 대신하고…… 내 마나를 피로 삼아 긴 잠에서 깨어나라.”
스미레의 주문 영창이 끝나자 바닥에 그려졌던 검은색 마법진은 피처럼 붉게 물들었다.
‘……벌써부터 현기증이 올 정도로 마나 소모가 엄청나요.’
드래곤의 머리뼈가 본드래곤에게 신체를 부여하고 계약을 성공시킨 매개체라면 이 드래곤 하트는 데스나이트를 듀라한으로 상격시킨 것처럼 본드래곤을 상격의 존재로 끌어올리는 업그레이드와 같았다.
단순히 계약만 했던 이전보다는 훨씬 고차원적 스킬.
[첫 번째 권능:애니메이트 데드]
[사역마: 본 드래곤]
[사역마가 드래곤 하트의 힘을 흡수 중입니다.]
[불완전했던 소환이 완전한 형태로 다시 이루어집니다.]
사아악-
스미레는 마치 누군가와 연결된 실을 따라 몸 안의 마나가 흘러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윽…….”
너무 많은 마나를 순식간에 소모한 탓에 현기증을 느낀 스미레.
[마나의 파동이 불안정합니다. 계약자의 상태는 사역마에게 악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참아내야 했다.
마녀의 권능으로 드래곤 하트를 해석하고 있는 지금. 스미레의 집중력은 소환 결과를 좌지우지 할 정도로 중요했다.
화아아-
눈을 감은 스미레가 마나의 물결에 집중하자. 파도처럼 거칠게 요동치던 마법진이 호수처럼 잠잠해지며 안정을 되찾았다.
[새롭게 계약이 맺어졌습니다.]
[사역마에게 이름이 부여됩니다.]
마법진에서 하늘을 향해 칠흑의 물결이 치솟았다. 언령의 힘을 다루는 드래곤에게 이름이 부여된다는 건 새로운 탄생을 의미했다.
단순히 소환한 본드래곤과 ‘진짜’ 이름이 부여된 본드래곤은 전혀 다른 존재였다.
그런 중요한 의식인 만큼 마녀의 권능은 심사숙고 끝에 드래곤 하트에 잠든 힘을 모두 해석해 본드래곤에게 가장 적합한 이름을 정해주었다.
[사역마 본드래곤에게 주어진 새로운 이름은 바하무트.]
그으윽-
약간의 진동을 동반한 끝에 마법진에서 뼈로 된 거대한 앞발이 튀어나왔다.
[악룡 바하무트입니다.]
까득-
뼈가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검은 수렁에서 본드래곤은 천천히 기어 나왔다.
- 바하무트라.
블랙 드래곤들의 로드이자, 악룡으로 불린 바하무트의 이름을 선사 받은 본드래곤은 이전보다 훨씬 몸체가 커져 있었다. 그리고 두 눈에는 언데드 특유의 영혼의 불길이 푸르게 감돌고 있었다.
- 좋은 울림이군.
이름 없던 본드래곤이 다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