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1화
“……시, 식사가. 준비…… 되었습니다.”
메이드 복을 입고 존댓말을 하며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 이시우는 과연 살아생전 단 한 번이라도 이런 현실이 찾아올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반면 신유성의 앞에서 고개를 숙인 사쿠라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저흰 귀빈님을 모시기 위해 새롭게 배정받은 시종입니다. 어떤 사소한 일이든~ 저희에게 편한 마음으로 명령을 내려주세요.”
이시우는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치욕적이었지만 그래도 신유성의 모습을 보니 묘한 위안이 들었다.
‘그래 힘내자. 나만 투정 부릴 때가 아니지. 유성이도…… 엄청 고생하고 있으니까…….’
사실 이시우의 생각과 달리 여인섬에 온 이후 신유성은 고생을 한 적이 없었다. 처음부터 산드라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몸이 변한 건 타고난 성격 탓인지 그리 신경도 쓰지 않았다.
‘……시우와 사쿠라는 전속 시종이 되었으니 이제 마음대로 접촉할 수 있겠군.’
너무나 순조롭게 흘러가는 상황에 신유성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시우를 보았다
“고마워. 수고했어.”
신유성 평소에도 잘 웃어주었지만 변해버린 지금의 모습은 확실히 타격이 달랐다.
‘유성이 넌 대체 왜 그렇게 잘 어울리는 거야…….’
말 그대로 차원이 다른 미모.
만약 자신이 남자의 몸이었다면 그 감동이 지금보다 분명 배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시우의 수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요리를 잔뜩 실은 트레이를 몰고 스미레까지 방에 들어오자 이시우는 극한의 창피함을 느꼈다.
“어…….”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스미레와 눈이 맞은 이시우.
“아…….”
“큭, 흐큭…….”
그런 둘을 웃음을 억누르며 지켜보는 사쿠라. 신유성은 그런 3인방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나머지 시녀를 콕 짚어 불러 세웠다.
“거기 둘. 미안하지만 미리 욕탕의 물을 덥혀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너희! 우리가 없어도 귀빈님을 제대로 모셔야 한다. 신입이라도 실수는 용서하지 않아.”
신유성의 명령에 시녀들은 곧장 자리를 비워주었다. 결국 방에 남아 있는 건 신유성을 포함한 파티원 4인방.
척-!
테이블에 부채를 내려둔 신유성은 평소의 말투로 돌아와 동료들을 불렀다.
“다들 시간이 없으니. 아까 전에 정리한 정보를 본론부터 말할게.”
끄덕!
마치 한 마음이 된 듯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유성은 검지를 세웠다.
“첫째로 내가 알아낸 산드라의 능력은 제약이라는 맹세를 통해 특정한 힘을 가지게 되는 거야. 지금 산드라가 가진 힘은 ‘여자’의 몸을 가진 상대의 능력을 대부분 봉인 할 수 있어.”
특정한 성별의 힘을 봉인한다니.
이렇게나 괴악한 능력이 있을까?
하지만 능력을 듣고 나니 스미레는 산드라가 여인섬이라는 장소를 만들어 주변인을 여성으로만 포섭한 것이 이해가 갔다.
“그럼 산드라 님이 여인섬이라는 장소를 만든 건……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서였네요.
“그렇지. 여인섬에선 산드라의 힘에 대적 할 사람은 없을 거야. 산드라와 마나가 비슷한 수준이라면 그 효과는 절대적이야. 아마도 저항하기 위해선 산드라보다 아주 뛰어난 수준……. 그래 7급 정도는 되어야겠지.”
“어쩌지 유성아? 그럼 우리 완전 망한 거 아냐?”
어째 평소보다 자신감이 없는 듯 축 처진 목소리로 이시우가 묻자 신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시우야. 곧 기회가 생길거야. 산드라는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해 여자가 아닌 남자로 제약의 대상을 바꿀 예정이거든.”
“뭐야, 그렇다는 건! 그때가 되면 몸이 바뀐 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거네? 헉- 정말~ 잘 됐다 시우야!”
놀리는 게 분명한 사쿠라의 연기톤에 이시우는 찌릿- 사쿠라를 노려보았다.
몸이 변해도 이렇게나 치고 박는 걸 보면 여전히 사이가 좋은 둘.
“이번 공략을 성공하기 위해선 우린 그 전쟁에서 산드라를 패배시켜야해. 그러려면 여인섬에서 최대한 용병단을 약화시킬 방법을 찾아내야겠지.”
반면 신유성의 설명을 들은 스미레는 무언가 떠오른 듯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었다.
“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페리아 님이 베니안님과 식사 중에 비밀무기에 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비밀…… 무기?”
이건 신유성조차 모르는 이야기.
하지만 왕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려는 산드라의 입장에선 그런 무기를 준비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했다.
“네. 자세하겐 못 들었지만 드래곤 하트도 심었으니 곧 동작할 거라고…….”
아직 단편적인 정보밖엔 없었지만 무려 드래곤 하트를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이상 절대로 무시할 만한 카드가 아니었다.
“그럼 비교적 움직임이 자유로운 시우와 사쿠라가 비밀무기에 관한 정보를 캐내줘. 스미레는 식당에 찾아오는 파티원들에게 정보를 듣고 내 이야기를 전파해줘.”
“아, 알겠어 유성아…….”
“좋아! 안 그래도 우린 여기서 막내라 이곳저곳 많이 청소하거든.”
“네! 유성 씨!”
하나 둘 흩어졌던 파티원이 모일수록 점점 공략의 성공률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일. 점점 공략의 윤곽이 잡혀가는 와중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2명을 떠올리며 신유성은 궁금증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델라와 에이미는 어디에 있기에 아직도 만날 수 없는 걸까?’
* * *
슥슥슥-
아침부터 생선구이로 식사를 마친 에이미는 먹다 남은 생선 뼈를 이쑤시개 삼아 이를 쑤신 후 채집용 유리병에 받아둔 빗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으- 시원하다아-!”
그리곤 에이미는 곱게 갈아둔 사탕가루를 손끝으로 찍어 혀끝으로 맛을 보더니 기쁨에 몸을 떨었다.
“식사가 끝나면 역시 이렇게 당분을 먹어줘야 한다니까. 몸에 힘이 돌아오는 기분이랄까?”
이젠 표류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에이미가 훗- 하고 웃어 보이는 여유까지 선보였다.
심지어 그런 에이미의 어깨에는 갈매기인지 앵무새인지 정체 모를 새까지 앉아 있었다.
“끼룩- 끼룩- 힘이 돌아와~! 힘이 돌아와~!”
“어이~ 제피스톰 라룸. 아침부터 너무 힘 빼지 마. 말을 많이 하면 일찍 배고파지는 거야.”
제피스톰 라룸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새는 에이미가 표류를 시작하고 사귄 새 친구인 모양이었다.
“끼룩! 말 많이 하면~ 배고파~!”
“고럼~ 고럼~”
나룻배에 발을 걸친 채 이젠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낚시에 집중하던 에이미는 갑자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그건 시야의 끝.
수평선 너머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섬의 모습 때문.
“유, 육지다! 육지!”
육지를 찾기 위해, 사람이 사는 장소를 찾기 위해 이 나룻배에 의재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망대해의 바다에서 표류했을까?
“내가 성공한 거야!”
승리의 쾌거에 취한 에이미는 나룻배의 바닥에 무릎 꿇은 채 계속 중얼거렸다.
“내가 살아남은 거라고…….”
나룻배를 정박한 에이미는 기쁜 마음에 힘껏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경비를 서고 있던 용병의 입장에서 에이미는 그저 초대받지 못한 밀입국자에 불과했다.
“뭐지 이 녀석은?”
“손들어! 침입자!”
결국 나룻배를 정박하자마자 목에 창이 겨눠지자.
“어, 어라…….”
에이미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 * *
경비병의 보고를 들은 산드라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추궁해도 신원이 불분명한데다. 나룻배를 타고 밀입국을 했다고?”
일단 나룻배라니?
여긴 거대한 군함조차도 난파할 위험이 있는 제왕의 해역. 그런데 대체 나룻배를 타고 제왕의 해역을 항해하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네. 대체 어떻게 제왕의 해역을 항해한 건지……. 사실 실었던 물건을 보면 그냥 운 좋은 부랑자인 같기도 합니다.”
“그래? 참으로 별종이로군.”
“거기다 나룻배에는 일용할 식량조차 없어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버틴 흔적이 남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무언가 계획을 가지고 밀항을 한 건 아닌 거 같습니다.”
부랑자의 믿기 힘든 무용담은 산드라조차 흥미가 동할 지경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 얼굴부터 보지. 데려와 보거라.”
“예!”
문이 열리고 경비원들에 의해 끌려 온 건 다름 아닌 에이미.
“설마 감옥에 가두는 건 아니지!? 혹시 가둘 생각이면 밥은 줘! 나 3일 동안 물고기 2마리 먹었어! 더 이상 굶으면 정말 죽을 거야!”
경비원에게 붙잡힌 채 엉엉 울며 서러움을 성토해내는 에이미와 신유성은 그만 눈이 맞고 말았다.
‘……에이미다!’
경비원들이 말한 부랑자의 정체가 에이미였다니.
‘……파티장님이다!’
여인섬에서 처음 대면한 사람이 그토록 찾던 신유성이었다니. 신유성은 무려 성별이 바뀌었는데도 용케 알아본 에이미는 간절한 눈빛으로 구조를 요청했다.
“아, 이 사람…… 어디에선가 마주친 적이 있는 기분입니다.”
결국 신유성이 예정에도 없던 애드리브를 섞어가며 연기를 펼치기 시작하자 산드라는 곧바로 반응을 보였다.
“그래? 하지만 넌 과거의 기억을 잃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넌 함선을 타고 온 걸로 보아. 높은 집안의 자제 같은데. 이런 나룻배를 탄 부랑자를 만날 일이…….”
그러나 의심이 가득한 산드라의 눈초리에.
파앗-!
생존본능이 발동한 에이미의 머리는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파티장님이 귀한 집 자제에다가 기억을 잃었다고? 거기다 산드라는 파티장님을 신뢰하고 있다는 거지?’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에이미는 신유성이 산드라에게 신분을 속이고 신뢰를 얻어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에이미가 해야할 일은 의심 받지 않고 그 관계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것.
“저, 저는! 맞아요! 아가씨를 모시던 시종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묻어갈 소재를 떠올린 에이미가 신유성을 보며 시종을 자처하자. 페리아는 여전히 의심이 간다는 눈초리로 에이미를 훑었다.
“……그래?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이름과 가문 정도는 알고 있겠군?”
갑자기 이름과 가문을 대라니.
저흰 가온 아카데미에서 왔고 이분은 파티장님이신 신유성입니다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
“어어, 그, 그러니까…… 이분은 가온느 아르카데미 가문의…… 신유르시온 영애이십니다!”
결국 에이미는 페리아의 추궁에 식은땀까지 흘리며 순간적으로 이름을 지어냈다.
“……가온느 아르카데미?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군.”
페리아가 턱을 괸 채 흐음- 소리를 내며 미간을 좁히자 에이미는 이젠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엄한 곳을 손가락질 했다.
“저, 저 쪽 방향으로 배를 타고 쭉- 가면 나와요…….”
“설마 북부에서 왔다는 이야기인가? 제왕의 군도에선 꽤 거리가 먼 곳일 텐데…….”
아무래도 페리아의 반응을 보니 에이미의 거짓말이 조금은 먹혀든 모양. 에이미는 그 빈틈을 파고들어 종지부를 찍기 위해 서러운 듯 눈물까지 흘리며 외쳤다.
“그러니까! 제가 아가씨를 찾는 데 이렇게 오래 걸린 게 아니겠습니까아아아-! 해적들한테 돈도 빼앗고, 먹을 것도 빼앗기고…….”
퍼포먼스가 극에 달한 에이미는 신유성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성토했다.
“하지만 아가씨를 찾으려는 그 마음까지는 빼앗기지 않았어요!”
신유성은 그런 에이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 정말이지…… 고생이 많았겠구나.”
방송으로 단련된 애드리브와 타고난 연기력으로 에이미는 승부했다. 그리고 그 작전은 너무나 완벽하게 먹혀버렸다.
“후훗, 말에는 거짓이 있을지언정. 눈물에는 거짓이 없지. 더 이상 의심할 순 없겠군.”
산드라는 시종으로서 충절을 지킨 에이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고.
의심이 많은 페리아도 눈물까지 흘리는 에이미의 모습을 보자 결국 속아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뭐…… 서로 관계가 있는 것 같긴 하네요.”
기나긴 시련과 모진 패배를 반복한 끝에 드디어 에이미가 승리를 쟁취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