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19화 (318/434)

제319화

3명의 사람이 있지만 너무나 조용한 귀빈실.

스윽- 슥-

산드라는 자신의 검에 꼼꼼히 기름을 바른 후 닦아주었다. 이건 그녀가 전쟁에 앞서기 전 미리 행하는 의식. 이제 세이덴으로의 침공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준비는 잘 되어 가고 있나?”

그런 거대한 사건을 앞에 두고도 산드라는 평소처럼 담담한 목소리였다. 생각해보면 매 전쟁에 목숨을 걸었던 것이 그 이유일지도 모른다.

목숨을 건 이상 산드라에게 작은 전투란 없었다. 언제나 낭떠러지를 등 뒤에 둔 듯 물러섬 없이 싸워왔다.

“소문으론 물자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러니 치밀하게 준비해야 한다.

단 한 번의 패배라도 공든 탑을 파도 앞에 모래성처럼 만들어버릴 테니까.

“그건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저흰 2년에 걸쳐 세이덴 근처의 물자창고에 자원들을 쌓아두었습니다. 이제 와서 그 수를 늘리면 위험이 큽니다.”

“그럼 예상 시간은?”

“짧으면 2일. 길어도 3일입니다.”

“충분하군 돌아가 보도록.”

척!

충성스레 경례를 한 부하가 돌아가자 산드라는 환한 빛을 뿜는 검날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세이덴.’

산드라는 당당하게 세이덴을 침공하는 이유가 복수심 때문이 아니라고 했지만 생각해보면 전혀 관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산드라에게 세이덴은 지우고 싶은 과거가 있는 곳이었다.

산드라는 귀족 영애로서 평안한 삶을 살던 자신의 과거도 지우고 싶었으며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죄인의 낙인이 찍힌 과거는 더더욱 지우고 싶었다.

이제 자신은 제왕의 군도에 수장 중 하나이자 돈만 받는다면 무슨 일이든 처리하는 전쟁귀.

산드라에게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없었다. 나아갈 곳밖에는 없었다.

그 정착지가 어디일지는 몰라도 이제는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은 이제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물론 그건 산드라가 원한 변화였으나. 기억의 저편 속 산드라마저 인지하지 못하는 장소에선 이따금 생각의 새싹이 돋아났다.

만약 아버지의 동료가 배신하지 않았다면. 만약 자신의 가족이 죽지 않았다면. 만약 그렇게 평범한 삶을 영위했다면.

지금의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이들을 곁에 두고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참으로 우스운 건, 그런 미래가 예상조차 가지 않음에도 과거는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아가씨의 재능은 검술에 대해서 이 못난 스승보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산드라가 과거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검을 가르쳐주던 한 늙은 기사였다.

기사단장에서 퇴역한 그는 황실에서 받은 돈으로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도 있었으나 제자를 기르며 후임을 양성하고 있었다.

[이 노인은 검로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가씨가 마음에 지닌 것은 참으로 깨끗하고 올곧은 정신입니다.]

칭찬을 받아 기쁜 마음에 더욱 열심히 휘둘렀던 검은 이제 전장에서 적들의 피를 마시며 악귀의 검이 되어 있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휘둘렀던 검격은 이제 마나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신이 지금의 나를 보면 무엇이라 말할까?’

악귀가 된 산드라를 보며 검술을 가르친 것을 후회할까? 아니면 대단한 경지를 이뤘다며 기뻐할까?

[당장! 돌아가라! 나는 은의 기사 루이디온! 설령 황실의 명령이라도! 내 제자의 목숨을 내놓을 순 없다-!]

그는 노인의 몸으로 100명의 기사를 상대로 산드라를 지키려 했다. 훌륭하게도 절반 이상을 쓰러트렸지만, 결국 그 끝은 비참한 죽음.

[산드라! 살아남아라! 비참하더라도 괴롭더라도 제발 끝까지 살아남아 줘!]

국민들의 야유 속에서 사형대에 오른 오빠의 목이 떨어지고.

[나는 단 한 번도 배신을…….]

댕강!

아버지는 최후의 말조차 미처 잇지 못한 채 목이 떨어졌다. 그 외의 사람이라고 다를까?

배신자의 입김에 누명을 쓰고 연루된 사람은 모두 그렇게 사형대에 올라 비슷한 최후를 맞이했다. 산드라는 그렇게 소중한 이의 죽음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나는 치열한 전쟁 속에서 과거 따윈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이젠 아무렇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했건만…….’

강자는 약자를 마음대로 할 수 있고,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며 누군가를 믿었기에 배신당한 것이다.

어린 산드라가 그렇게 수도 없이 합리화를 한 건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당한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왜 이리도……. 불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뜨거운 것이냐?’

전쟁을 앞둔 지금.

다시 산드라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는 내면의 불꽃.

결국 풋- 하고 미소를 지은 산드라는 결국 신유성을 보며 인정하고 말았다.

“……네 말이 맞았군.”

산드라는 자신의 능력과 관련된 기억은 신유성에게서 지우려 했지만 욕탕에서 한 모든 대화를 깨끗이 지워버리려 한 건 아니었다.

“무엇이 말입니까?”

덕분에 신유성은 그 날을 주제로도 산드라의 질문에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내가 유치한 인간이라는 걸 인정 할 수밖에 없겠어.”

시이익- 챙!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산드라의 검은 칼집에 들어갔다.

“네 말대로 세이덴을 멸망시키려는 건 복수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복수는 산드라 자신을 위해서 꼭 필요했다.

“나는 세이덴을 완전히 멸망시킬 생각이다.”

그래. 검을 깨끗이 닦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이건 산드라가 과거를 지워버리고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의식.

“생각이 바뀌었어. 국민들은 노예로 삼고 그 외에는 전부 죽여 버리는 게 좋겠군.”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 산드라는 오히려 손속이 잔인해졌다.

“국가의 이름도 새로이 바꾸는 게 좋겠군. 지금껏 유례없는 규모의 전쟁이 되겠지.”

띠링!

[퀘스트: 전쟁을 막으십시오.]

[상세: 제왕의 군도. 여인섬의 지배자인 산드라가 세이덴을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의 전쟁을 치르려 합니다. 그녀를 막으십시오.]

산드라가 결단을 내리자 신유성의 눈앞에는 드디어 최종 퀘스트가 떠올랐다.

‘……이번 퀘스트의 마지막 목표는 이 전쟁을 막아내는 것.’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었다.

산드라가 제약의 룰을 바꾸어 능력의 대상을 여자에서 남자로 바꾸는 그 순간이 바로 기회였다.

‘그 기회만 포착한다면 페널티는 오히려 기회다. 지금은 나와 시우를 포함한 모든 파티원이 여성의 신체!’

섣불리 산드라에게 덤볐다면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렀을 테지만 정보를 가진 지금은 달랐다. 이건 산드라 최강의 능력 중 하나를 봉인하고 싸우는 셈이었다.

‘물론 그 전에 산드라가 전쟁을 포기한다면 좋겠지만…….’

산드라의 과거를 들은 신유성은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쟁을 그만둘 순 없습니까?”

산드라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후훗- 하고 웃더니 신유성의 턱을 쥐며 눈을 번뜩였다.

“나는 그 지하 감옥과 사형대에서 이미 죽어버린 거야. 지금 이렇게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그놈들을 향한 복수심 덕분 아니겠어?”

신유성은 산드라가 얼굴을 들이밀며 다가오려 하자 슬쩍- 어깨를 밀며 말했다.

“그 끝에는 무엇이 남습니까? 복수가 모두 끝나면 공허하지 않겠습니까?”

과연 복수의 끝에 무엇이 남을까? 피로 물든 손과 멸망한 국가. 그 끝에는 공허한 마음과 피폐한 정신밖에는 없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모두 없애 버리려는 거야. 그때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여기가 지끈거리거든.”

그러나 산드라의 발상은 달랐다.

그녀는 무언가를 남기기 위한 게 아닌, 그 공허를 얻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다.

“……이젠 그 녀석들이 돌려받을 차례야.”

산드라는 진중한 목소리와 함께 눈을 감고 다시 얼굴을 신유성에게 들이밀었다.

“그들을 죽이고 복수한다고 당신에게 벌어진 일이 없었던 걸로 되진 않아요.”

그러나 이번에도 대답과 함께 다시 어깨를 밀어버리는 신유성. 산드라는 멋쩍은 듯 자신의 금발을 빗어 넘겼다.

“어차피 넌 이해하지 못해.”

차악-!

그렇게 말을 하며 신유성의 양손을 붙잡는 산드라.

“……떠올릴 기억조차 없으니까.”

그리곤 눈을 감으며 또 다시 산드라가 얼굴과 함께 입술을 들이밀자.

터억!

신유성은 자신의 이마로 산드라의 이마를 누르며 방어했다.

“아뇨. 당신이 하려는 짓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해 해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필요한 건 내 복수를 이해해줄 사람이 아니야.”

“그럼 대체 누가 필요해?”

신유성은 산드라의 일방적인 태도에 이젠 도저히 존댓말을 사용하기조차 힘들었다.

“이젠 내게 존칭조차 사용하지 않는 군. 좋아. 말해주지. 난 누구도 필요하지 않아. 어차피 누구도 믿지 않거든.”

이마를 뗀 신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유성은 이제야 산드라를 알 수 있었다. 산드라는 겉으로 보기엔 강해 보이지만 내면은 그렇지 못했다.

“넌 여전히 지하 감옥에 머물러있군. 전혀 성장하지 못했어.”

신유성은 확신했다.

그저 잊고 회피하기만 하는 걸로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불행을 죄 없는 사람에게까지 풀어버리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누군가를 믿지 못하는 것도 네가 대단한 걸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야. 그건 그저 배신당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야.”

가족에게 배신당했기에.

권왕이 뻗은 손길마저 거절했다면 그렇게 다른 이들과 단절된 채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 자신이 이곳에 서 있을 수 있을까?

지금의 신뢰하는 동료들과 만날 수 있었을까?

“……최악을 상정해서 계속 도망치기 급급하지.”

만약 전쟁을 치르지 않고 그전에 산드라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방식으론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아.”

“재미있군. 그럼 너의 방식이라면 다르다는 이야기인가?”

산드라의 말에 신유성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그만두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난 널 배신하진 않아.”

어쩌면 더욱 교감을 쌓는다면 산드라를 교화 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

하지만.

“20년 전. 널 만났다면 그 손을 잡았을지도 모르겠군.”

산드라는 신유성이 뻗은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젠 너무 늦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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