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8화
밝은 달이 떠오르고.
모두가 잠든 시각.
스미레는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 모두…… 잠들어 계신 게 맞겠죠?’
슥슥-
스미레는 옆에 누운 시녀가 정말 잠에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바닥을 얼굴 위로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지금은 나가는 걸 들켜도 화장실에 가던거라고 말하면 되니까. 최대한 자연스럽게…….’
스미레는 신유성의 방에 들어가는 장면만 들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장면을 들킨다면 좀처럼 변명이 쉽지 않았다.
살금살금-
마치 닌자의 암행처럼 최대한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스미레.
그러나 발밑을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퍼석!
스미레가 부서진 나무 바닥을 건드리고 말자 큰소리가 났다.
‘흐, 흐익…….’
설마 방금 전 소리로 누군가 깨어난 게 아닐까? 스미레가 식은땀을 흘리며 눈치를 보는 그 순간.
“……내가 모를 줄 알았어? 이미 알고 있어……. 네가 뭘 하려는지.”
어둠속에서 시녀 중 한 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미레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서, 설마 이미 들킨 건가요?! 대체 어느새!’
몸짓언어를 나누던 그 순간을 훔쳐본 게 아니라면 스미레가 신유성과 접촉하려던 정황을 파악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그렇다는 건 만찬회에서 스미레를 훔쳐본 사람이 있다는 뜻.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한 모양이네……. 우리를 바보 취급하지 말라고…….”
계속 중얼거리는 시녀의 목소리에 스미레는 생각했다.
신유성의 처소로 달려가야 할까?
아니면 조용히 자신의 침대에 다시 누워야 할까?
어느 쪽이든 상대가 신유성과 스미레의 접점을 알고 있다면 쉽지 않았다.
하지만.
“소금을 넣을 생각이잖아……. 우리도 이 정도 레시피는 알아…….”
시녀가 하던 말은 그저 잠꼬대를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휴…… 착각했네요.’
한시름 놓은 스미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에서 걸어 나왔다.
“근데 하필 왜 식당 근처에 3명이나 경비를 배치한 거 에요?”
“식자재 창고에서 자꾸 뭐가 사라진다나요?”
“딱 봐도 쥐나 밤 짐승 같은 거 아니겠어요?”
식당과 성의 입구 사이에는 경비원들이 3명이나 보였지만 상관없었다.
사아아-
[패밀리어 소환]
스미레는 흑마술을 사용해 덩치 큰 쥐를 3마리나 소환했다.
“찍, 찍찍?”
“쉿…… 저분들 시선을 따돌려주세요.”
“찍!”
쥐들은 스미레의 명령에 따라 달려 나가 순식간에 경비병들의 주의를 끌었다.
“찍찍찍-!”
“뭐야! 엄청 큰 쥐다!”
“저 녀석들이 범인 아니에요?”
“덩치 좀 봐, 먹기도 엄청 먹게 생겼네!”
경비병들이 쥐를 쫒으며 주의가 팔린 사이 당당하게 정문으로 입성하는 스미레.
‘유성 씨가 계신 귀빈실은 2층에 있다고 했으니까…….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데…….’
왜 하필 이 성에는 계단이 중앙계단밖에 없는 걸까. 거기다 유리 사이로 쏟아진 달빛이 중앙계단을 비추는 탓에 스미레는 쫓기듯 바삐 계단을 올라갔다.
탓- 다다다-
계단을 넘어 2층에 도착한 스미레는 얼른 귀빈실을 찾기 위해 문을 확인했다.
‘이 문이 분명해!’
여러 개의 문 중 단 하나만 황금 칠까지 되어 번쩍이는 걸보면 스미레가 그토록 찾던 귀빈실이 분명했다.
하지만.
끼이익-
스미레가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다른 문 중 하나가 열렸다.
‘이, 이 시간에 일어난 사람이!’
결국 들키기 전에 문을 열고 귀빈실로 뛰어드는 스미레.
타닷-!
문을 연 스미레가 다급하게 들어오자 침대에 앉아 있던 신유성은 지금의 상황을 눈치 챈 듯 이불을 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건…….’
누가 봐도 자신의 이불 안에 숨으라는 뜻.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인 스미레는 신발을 침대 밑에 숨기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 * *
‘……왜 이렇게 시끄러운거지?’
경비원들의 소란 덕분에 침대에서 일어난 페리아는 잠옷을 입은 채로 복도로 걸어 나왔다.
아직 잠이 덜 깨 시야가 흐릿한 상태였지만 복도를 서성이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저건 대체 누구지?’
자신의 시선을 느낀 탓일까 순식간에 귀빈의 방으로 들어가는 누군가의 모습에 페리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 여자라기엔 키가 좀 작았던 거 같은데.’
똑똑-
노크를 한 후, 신유성의 대답조차 듣지 않고 문을 여는 페리아.
“무슨 일이죠?”
침대에 앉은 신유성이 시선을 보내자 페리아는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물었다.
“당신. 방금 밖에 나오셨습니까?”
신유성은 오히려 곧바로 인정하며 그게 무엇이 문제냐는 듯 담담하게 답했다.
“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아 잠시 복도를 걸었습니다.”
페리아는 신유성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둘러보아도 다른 사람의 모습도 신발도 보이지 않는 상황.
‘……내 착각인가?’
페리아는 결국 한숨을 쉬며 신유성을 보았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의심이 가는 행동만 하는 걸까.
산드라 님은 왜 이깟 여자를 그토록 신뢰 하는 걸까?
결국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 페리아는 이마를 짚으며 날카롭게 신유성을 노려보았다.
“……무언가 여인섬에서 알아내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고요?”
페리아는 자신이 신유성을 의심한다는 걸 숨길 생각이 없었다.
“네. 없습니다. 궁금한 건 산드라 님께 전부 말해 주셨거든요.”
신유성의 말은 사실이었다. 신유성은 욕탕에서 산드라가 준 정보 덕분에 이번 공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을 도발로 느낀 페리아는 굳은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내가 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습니까? 평범한 일반인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단번에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침대에 앉은 신유성은 페리아의 말에 재미있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군요.”
마나를 숨긴 사실을 단번에 알아챈 산드라와 달리 페리아는 신유성의 마나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건 기본기에서 드러나는 6급과 5급의 실력 차이를 증명했으며 신유성이 페리아보다 한참 우위라는 뜻이었다.
‘다행이군. 산드라만큼이나 위협적인 실력은 아닌 모양이야.’
베니안도 페리아와 같은 실력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번 공략은 20층에 걸맞게 6급 1명과 5급 2명의 난이도였다.
‘베니안과 페리아가 산드라처럼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면 나 혼자서도 둘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다.’
각종 공략으로 수련과 성장을 거듭한 신유성에게 5급은 이미 상대가 아니었다. 설령 몸이 바뀌었어도 그건 마찬가지.
꼼지락꼼지락-
이불 속이 숨쉬기 답답한 건지 아니면 자세가 불편한 건지 스미레가 한계인 듯 움직임을 보이자 신유성은 부드럽게 이불 위를 쓰다듬었다.
‘조금만 참아 스미레. 곧 끝이야.’
신유성은 스미레를 위해서라도 얼른 페리아를 내쫓아야 하기에 이야기의 종지부를 찍었다.
“잘 들었습니다. 그럼 시간도 깊었으니 나가주시겠습니까?”
페리아는 그런 신유성의 태도에 싱긋 웃었다.
“귀족 출신들이 그렇지. 난 당신 같은 사람을 많이 봤어. 출생이나 신분을 믿고 강자 앞에서도 꼿꼿하게 고개를 세우지…….”
페리아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언제나 산드라의 옆자리를 채우고 있던 건 페리아 자신이었다. 가장 신뢰받는 것도 페리아 자신이었다.
그런데 어디서 굴러 들어온 지도 모를 녀석이 자신을 빼내고 자리를 꿰차려 한다니?
탁-
지팡이를 꺼낸 페리아는 바닥을 치며 신유성에게 말했다.
“그 알량한 것들이 자신을 지켜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단 말이야. 하지만 전쟁에선 달라. 말보다 빠른 게 주먹이다.”
신유성은 산드라가 아끼는 만큼 신체에 위협을 가하거나,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 녀석에게 힘의 차이를 알려주는 건 정말 재미있단 말이야. 바닥에 쓰러진 채로 그제야 잘못 됐다는 걸 깨닫고…… 이렇게나 눈이 커져선…….”
다만 페리아는 자신의 힘을 통해 건방진 신입에게 위계질서를 정확히 새겨줄 생각이었다.
“그제야! 주제를 알게 되거든!”
마나를 발휘하자 페리아의 지팡이에서 쏟아지는 푸른빛.
쫘아악-!
동시에 지팡이에서 투명한 동아줄이 쏟아지자 신유성은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로 그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꺄하하- 멍청이이이~! 반응조차 못하는 거냐!”
페리아는 발랄하게 웃으며 승리를 장담했지만 상황은 반대였다.
‘오히려 너무 느려.’
가속 능력을 다루는 류진의 공격조차 반응해낸 신유성에게 페리아의 동아줄은 멈춰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게 실력의 전부라면 실망스러울 정도인 걸.’
그토록 페리아와 베니안을 견제하며 치밀한 작전을 세운 게 우스울 지경이었다.
스으윽-
신유성은 동아줄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마나를 머금은 검지로 순식간에 가로줄을 그었다.
─
마법에 사용된 마나의 맥이자, 혈류가 통하는 숨통. 그 근간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페리아가 발휘한 마법과 똑같은 파장에 동일한 양의 마나를 주입했다.
[마나 공명]
쨍그랑-!
마치 유리잔이 깨어지듯 페리아의 마법 동아줄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이건…….”
마나공명은 마탑에서 공부한 페리아조차 이론으로만 알고 있던 전설에나 나올 법한 마법.
풀썩!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자리에 주저앉은 페리아는 하얗게 변한 혈색으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너…… 정체가 뭐야?”
그러나 신유성은 여전히 침대에 앉은 채 이불을 쓰다듬으며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요. 기억을 잃어서요.”
그리곤 겁에 질린 채 눈이 커진 페리아를 보며 신유성은 싱긋- 웃으며 조소했다.
“다만……. 당신이 말한 표정이 뭔지는 알 것도 같네요.”
손짓 하나로.
페리아를 제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