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17화 (316/434)

제317화

첨벙-

다시 욕탕에 앉아 몸을 담근 산드라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말한다기에는 너무나 차분한 목소리로 신유성에게 말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세이덴이라는 국가였고. 우리 가문은 왕족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산드라는 어린 시절부터 권력의 속성을 지켜보았다. 세이덴에서 목이 뻣뻣하기로 유명한 권력자들도 가주인 산드라의 아버지 앞에선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그건 무조건 가주가 옳다고 생각하거나, 진심으로 따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덕분에 태어난 순간부터 줄곧 그 부를 누려왔지. 나에게 주어진 건 항상 가장 귀한 것이었고,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의 관심과 축복이 뒤따랐다.”

[벌써 마나를 다루는 거야!? 산드라~ 정말 대단해!]

[산드라! 혹시 시간이 있다면 꼭 우리 파티에 와줬으면 좋겠어!]

[산드라 님은 제가 교사가 된 이래 발견한 최고의 천재입니다.]

산드라는 그들의 칭찬과 호의가 모두 자신을 향한 것이라 믿었다.

“그래. 마치 세상이 나를 위해 돌아가는 듯 착각마저 느꼈다.”

하지만 그건.

“어리석은 생각이지.”

그저 산드라의 착각일 뿐.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곳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이 입이 닳도록 아부를 떨고 있는 건 산드라의 가문이 가진 권력과 배경.

“내가 태어난 지 7년째 되던 날. 나의 아버지는 가장 믿었던 이에게 배신당했다.”

권력이란 한정된 자원이다.

강자가 있다면 약자가 생기는 법이며 더 많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선 상대의 몫을 뺏어야 했다.

“나의 가족들은 반역죄로 내가 보는 앞에서 사형대에 올랐다.”

마지막 양심이었을까.

아니면 자신의 가책을 덜기 위한 자비였을까?

“가문에서 살아남은 건 오직 나뿐이었지.”

산드라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정말 이걸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순간에 보금자리였던 저택에서 쫓겨났으며 두 번 다시 가족들을 볼 수 없었으며 하인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난 모든 걸 잃었다. 참으로 당연한 일이지.”

산드라에게 남은 건 생일날 아버지에게 선물 받았던 드레스 한 벌과 한 평 남짓한 지하 감옥의 공간이었다.

“알고 있나? 승자는 모든 것을 가지고 패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 이건 야생만이 아닌 인간에게도 통용되는 진리라는 걸.”

사아아-

푸른 달빛이 쏟아지고 차가운 바람이 몸을 스칠 때 어린 산드라는 지하 감옥에 누워 생각했다.

자신은 바뀐 것이 없었음에도 그들은 왜 자신에게 호의와 축복을 주었으며, 왜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차가운 지하감옥을 선사한 걸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제는 답이 너무 명확했다.

“타인을 향한 얄팍한 신뢰는 아버지를 나약하게 만들었으며 우리 가족을 몰살시켰지.”

산드라의 한쪽 눈은 고요하고 차갑게 분노했다. 산드라는 지금 신유성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과거를 보고 있었다.

차가운 지하 감옥.

살기 위해 집어 먹었던 쓰레기.

자신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집행자의 눈빛.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건 힘이다.”

촤아악-

[반역자 산드라 센드리벌에게 죄의 낙인을 찍으라!]

치지직-!

산드라는 뜨거운 쇳덩이가 살갗을 태워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강자가 되기 위해 입을 꽉- 다물고 그저 눈을 번뜩였다.

“난 그 진리를 일찍 깨달았을 뿐이야.”

강자의 심기를 거스른 탓에.

[그 눈빛……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군……. 어이, 저 죄인의 한쪽 눈을 뽑아버려라.]

너무나도 끔찍한 일을 당했지만.

산드라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덕분에 한쪽 눈을 뽑히고 내 몸에 낙인이 새겨질지언정 난 좌절하지 않았다.”

스윽-

산드라는 안대를 벗으며 신유성에게 물었다.

“……그렇게 난 이 힘을 얻었다.”

안대에 감춰져 있던 건 너무나도 매혹적인 붉은 눈. 마치 산드라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상대를 빨아들이는 듯 했다.

‘그럼 산드라의 힘은…… 새롭게 얻은 눈과 함께 생긴 것인가.’

그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인 산드라의 기세에 신유성은 그만 압도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이 가지게 된 목표는 대체 무엇일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모든 걸 잃었기에 나는 모든 걸 내 던질 수 있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몰락한 귀족이자 죄인의 낙인이 찍힌 산드라는 그렇게 낮은 곳에서 전설을 시작했다.

“내 시작은 외곽의 한 용병단이었다. 고아들을 모아 전쟁에 보내는 곳이었지.”

산드라는 그들이 쥐어준 단검으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소년병이 되었다. 그 대가로 받은 건 목숨 값으로 빵 몇 개와 푼돈.

그러나 승리를 거듭할수록 산드라의 소속은 달라졌고, 가치는 매번 상승했다.

“다행이 내 목숨은 질겼다. 난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고 17살의 나이에는 이미 100명을 휘하로 둔 백인단장이었지.”

이제 전쟁의 대가로 산드라는 푼돈이나 빵 몇 개가 아닌 금덩이를 받을 정도였다.

물론 그녀는 만족하지 않았다.

100명의 부하가 1000명이 되고 모아둔 재산으로 자신의 성을 건축했지만 그럼에도 산드라는 만족하지 않았다.

“몇 번의 승리를 했는지, 몇 명의 목숨을 이 손으로 거두었는지 이젠 생각조차 나지 않아. 계속 반복할 뿐이지.”

“그럼 당신의 목표라는 건…….”

신유성의 눈에 산드라는 승리 그 자체에 집착하는 듯 보였다. 사실 이 여자는 목표라는 게 없는 것이 아닐까?

“끝이 없는 것입니까?”

산드라는 동감하는 듯 그 질문에 턱을 괴고 한참을 고민했다.

“음, 그렇군……. 솔직히 생각해본 적은 없다. 나의 끝이 언제일지는 나도 알 수 없으니. 다만.”

빙긋-

산드라는 한쪽 손으로 신유성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붉은 눈을 번뜩였다.

“내 다음 목표는 세이덴이다.”

세이덴은 제국 다음으로 손꼽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왕국이자 산드라의 시작이 된 장소.

“만약 승리한다면 난 세이덴의 왕족과 귀족은 물론. 반기를 들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는 모두 처형할 것이다.”

신유성은 방금 산드라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건지 그만 미간을 찌푸렸다.

“죄가 없는 사람에게까지 모두 복수하는 것이 당신의 계획입니까?”

산드라는 그런 신유성의 태도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에게까지 올곧은 태도를 유지하는 신유성이 흥미로워 보였다.

“……확실히 넌 다르군. 이 섬에서 나에게 이빨을 드러낸 건 네가 처음이야.”

그럼에도 신유성이 표정을 풀지 않자 산드라는 시선을 피하며 풋- 하고 웃었다.

“다만…… 내가 복수심 따위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다니. 너무 유치한 발상이군.”

지금까지 산드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건 감정을 배제한 효율적인 판단 덕분이었다.

“내가 그런 선택을 한 건 그게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반역할 수 없도록 칼을 부숴버리고, 공포를 심어 주는 것보다 관리하기 좋은 방법은 없거든.”

세이덴 왕국 전체를 피로 물들이는 건 그 연장선일 뿐.

“만약 패배한다면 당신이 모든 걸 잃게 될 겁니다.”

물론 그런 설명을 들어도 신유성은 승리해도 패배해도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산드라의 목표에 좀처럼 동감 할 수 없었다.

“난 지는 전쟁은 하지 않아. 모든 준비는 끝났어. 나에겐 이 눈이 있거든…….”

너무나 강한 산드라의 자신감에 신유성은 묘한 의심이 생겼다.

‘……단순히 여자를 상대로 유리한 능력이 아닌 건가?’

여인섬이 특별한 경우일 뿐 전쟁에 참여하는 기사와 병사의 대부분은 남자였다. 신체보다 마나에 의존하는 마법사의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래도 전쟁에 있어서 성비는 절대적이었다.

산드라가 이렇게나 전쟁에서 승리를 장담한다는 건 눈에 감추어진 또 다른 힘이 있다는 이야기.

“그 눈에 어떤 힘이 있습니까?”

신유성은 산드라에게 오히려 직설적으로 물었다. 자연스럽게 눈에 대한 주제가 나온 지금이 오히려 기회였다.

‘만약 다른 능력이 감춰져 있다면 어떻게든 알아내야 한다.’

산드라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저주를 해제해 남성의 몸으로 돌아온다 해도 패배할 걱정이 있었다. 그러니 신유성은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흠…….”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산드라는 신유성을 다시 훑어보았다.

“넌 참으로 궁금한 게 많군. 세이덴에서 보낸 스파이라 하여도 이상할 게 없어.”

역시 너무 욕심을 부린 탓일까?

신유성은 긴장으로 몸이 굳었다. 최악의 경우 당장이라도 전투에 임할 생각이었지만 산드라는 여전히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뭐, 상관없겠지.”

오히려 산드라는 마치 대비책이라도 있는 듯 신유성을 믿고 순순히 넘어가주었다.

“사람들은 나를 매혹의 여제라 부르며 내 능력에 대해 추측하지만. 그건 반쪽짜리 추리일 뿐이야.”

신유성은 그런 산드라의 태도에 오히려 의심이 들었다. 산드라는 자신의 무엇을 믿고 이토록 신뢰하는 걸까?

‘만약 신뢰하는 게 아니라면…….’

산드라는 상대의 생각이라도 읽은 건지 묘한 표정을 짓더니 자신의 능력에 대해 털어놓았다.

“내 능력의 진짜 이름은 매혹의 눈이 아닌. 제약의 눈. 매혹은 그 제약에 속된 능력 중 하나일 뿐이지…….”

산드라가 첫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건.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 눈을 얻은 그 순간부터였다.

“내 주변을 믿을 수 있는 여자로 구성하고, ‘여성을 매혹한다.’라는 제약을 정한 건 세이덴에서 벌어질 가장 큰 전쟁을 위해서였다.”

그 모든 준비를 하기 위해 걸린 시간이 20년.

“……내 눈은 제약을 정한 지 20년이 지나면 새롭게 다시 맹세를 맺을 수 있거든.”

새로운 맹세를 정하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도 20년.

“세이덴의 전쟁에서 난 눈의 능력을 ‘남성을 매혹한다.’로 새롭게 맹세를 맺을 것이다.”

과연 이 모든 전쟁이 끝나고 승리를 차지했을 때 산드라는 어떤 위치에 서게 될까?

전쟁이 끝나는 대로 주변 국가에는 산드라의 능력에 관한 소문이 퍼질 것이다.

산드라의 능력은 남성과 여성 모두 매혹할 수 있다.

그녀는 혼자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수 있다.

산드라를 상대로는 누구도 이기지 못한다.

“물론, 그렇게 되면 여성을 매혹하는 힘은 없어지겠지만. 감히 전쟁이 끝났을 때 나에게 반역을 일으킬 사람이 누가 있을까?”

누구도 없다.

산드라의 말을 듣고 진실을 알지 못한다면 감히 반기를 들 생각은 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정말로 그녀는 주변 국가 전체를 차지하고 언젠가 제국을 삼킬 수도 있었다.

“그럼. 당신이 나에게 진실을 말했다는 건…….”

산드라는 절대로 아무런 비책도 없이 이런 말을 털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일종의 변덕이지. 언젠간 이 모든 계획을 털어놓고 싶었거든.”

그녀가 순순히 털어놓은 건 자신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

“이곳을 나갈 쯤엔 넌 모든 기억을 잃을 테니까.”

촤악-

붉은 눈에서 뿜어진 검은색 그림자가 자신을 덮치자 신유성은 이를 꽉 깨물었다.

‘절대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돼!’

남자의 몸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패배한다. 만약 이 기억을 잃는다면 산드라를 상대로 승리하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억을 지켜야 해!’

이건 절호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

촤아악-!

자신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파도처럼 몰려오는 검은색 그림자들을 보며 신유성은 순식간에 판단을 마쳤다.

‘축복을 사용할 순간은 지금이다.’

[축복: 토이 월드의 규칙!]

[효과: 참가자가 원하는 순간. 페널티를 비롯한 탑의 규칙을 1회 무시할 수 있습니다.]

띠링-!

따르르르-

축복을 발휘하자 곰인형에서 공룡모형 장난감 병정에 이르기까지 토이월드의 수많은 장난감들이 나타나 검은색 그림자를 막아섰다.

‘탑의 규칙과 페널티조차 막는 힘이야! 산드라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분명 막을 수 있어!’

이런 과감한 판단을 내린 건 탑의 축복에 대한 신유성의 단호한 믿음 덕분이었다.

펑-!

그 선택이 성공한 걸까?

신유성은 환각에서 깨어났다.

자신을 덮치던 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을 뜬 장소는 아까 전 욕탕 그대로였다.

“……미안하지만.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 이런 위험한 진실 따위, 모두 잊어버리는 편이 나을 거야.”

그리곤 자신을 보며 산드라가 여유롭게 웃자.

‘미안한 건 내 쪽이야.’

신유성은 같이 웃어주었다.

‘모두 기억하고 있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