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6화
산드라가 어릴 적 배웠던 귀족의 옛법으론 파티의 주인이 강당을 지키며 손님들을 맞이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산드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똑- 토독-
산드라는 테라스에 앉아 한 방울, 두 방울 하늘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쏴아아-!
엄청난 양의 물줄기가 대지를 적시는 순간까지 자신의 방에서 와인을 음미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비가 오는군.’
산드라는 비가 오는 날이 좋았다.
능력을 얻게 된 순간부터.
아니 어쩌면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한 순간부터, 자신은 얼마나 많은 땅을 피로 적셨을까.
그 때문일까.
산드라는 하늘에서 내린 비가 땅을 흐를 때면 자신의 복잡한 머릿속이 씻어지는 기분이었다.
빙그르르-
산드라는 다시 와인잔을 돌렸다.
투명한 유리잔의 벽을 새빨간 와인이 적실 때면 산드라는 내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기억이 등을 타고 생생하게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감옥의 차가운 바닥.
피로 더럽혀진 손.
그리고…….
화끈-!
산드라는 마치 어깻죽지가 불에 타오르는 격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에 불과했다. 산드라는 의자에 앉은 신유성을 내려다보며 평소처럼 여유롭게 웃었다.
“……이렇게 따로 불러서 미안하군. 나는 시끄러운 게 질색이라서 말이야.”
“괜찮습니다.”
오히려 신유성의 입장에선 이렇게 산드라가 따로 시간을 내어준 건 기회나 다름없었다.
‘산드라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이끌어내려면 이쪽이 좋겠지.’
하지만 의심을 사면 모든 것이 끝이기에 신유성은 자신이 뒤를 캐낸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이야기를 조심스레 유도해야 했다.
“신기하군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이 섬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확실히 산드라의 여인섬은 신기한 구조를 하고 있었다. 일개 용병단장에 불과한 산드라는 마치 한 국가의 왕처럼 수천 명의 사람들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 섬과 산드라에게는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신유성이 자연스럽게 운을 띄우자 산드라는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으며 기꺼이 대화에 응했다.
“내 이상을 믿고 따라준 고마운 사람들이지…… 물론 우린 기본적으로 도망자들이지만.”
“도망자?”
“그래 도망자. 여기 있는 모두는 과거로부터 도망친 사람들이다.”
이건 산드라의 과거와 능력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기회. 신유성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애썼다.
“무엇에게서 도망친 거죠?”
하지만 질문이 과했던 탓일까.
산드라는 말을 멈췄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얹고 양 손가락을 깍지 낀 채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그 전에 묻지. ……넌 기억을 되찾고 싶은가?”
산드라가 그렇게 물어도 신유성은 그저 ‘기억을 잃은 여인’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기억은 모두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분명했다.
신유성에겐 누구보다 자신을 우선시 해주는 스미레가 있었으며, 누구보다 자신을 의지해주는 은아가 있었고, 이젠 아내와 딸이나 마찬가지인 아델라와 벨벳이 있었다.
기억을 잃는다는 건.
그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
“네. 당연히 찾고 싶죠.”
신유성이 너무나 당연하다며 즉답하자 산드라는 질문에 살을 덧붙였다.
“그래? 너의 기억들이 끔찍한 일투성이라 해도?”
쭈욱-
산드라는 신유성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밤이 되면 잊지 않고 깨어나.”
그리곤 긴 손가락을 마치 벌레처럼 움직여 신유성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벌레처럼 타고 올라와. 매일 너를 갉아 먹는다고 해도?”
신유성은 산드라가 너무 몸을 가까이 붙인 탓에 상대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감정을 종잡을 수 없는 목소리로 신유성의 귓가에 속삭였다.
“잊고 싶은 과거란 저주와 마찬가지거든. 차라리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네 편이 나은 게 아닐까?”
신유성도 언제나 좋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몰래 눈물을 훔친 건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산드라의 말에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나쁜 기억을 잊고 싶다는 이유로 좋은 기억까지 잃고 싶진 않아요.”
산드라는 그런 신유성을 보며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와는 정반대의 인간이군.’
신유성과 자신은 닮지 않았다는 걸. 오히려 흑과 백처럼 대립하는 정반대의 인물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흥미롭다.’
처음 흥미를 보인 이유가 단순히 그저 미모 때문이라면 지금은 인간 본연에 대한 흥미에 가까웠다.
‘이 여자는 나에 대해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러나 산드라는 어떤 이유가 되었든 약점이 될 만한 자신의 과거를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산드라를 뒤덮는 건 미지의 상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호기심.
“……오늘 밤은 같이 보내도록 하지. 당신과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거든.”
사도닉스를 홀렸던 신유성은 이번에는 본의 아니게 산드라의 호감도를 맥스까지 올려놓고 있었다. 보스가 지성을 가지고 있다면 무조건 홀려버리는 마성의 재능.
“저는 당신에게 들려드릴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저 들어드릴 뿐입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신유성의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기’ 스킬은 ‘그 사건’으로 자존감이 낮았던 스미레를 단번에 사로잡은 고급 기술이었다.
“그거면 충분해.”
스킬은 당연히 성공.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산드라와 고개를 끄덕이는 신유성의 모습은 마치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식사를 끝내면 시종이 욕탕으로 안내해줄 거다. 내 성에 있는 거대한 욕탕은 제국에도 밀리지 않아. 내 유일한 취미지.”
산드라에게 욕탕은 어찌보면 비의 연장선이었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세상을 씻어 내리는 것처럼 산드라는 거대한 욕탕에 몸을 담그고 자신을 지워버렸다.
“기뻐해도 좋다. 나의 욕탕에 초대받은 건 네가 유일하니까.”
산드라가 그런 비밀스러운 장소에 신유성을 초대했다는 건 꽤나 각별히 여긴다는 의미였다.
‘……이렇게까지 빨리 믿음을 살 줄이야.’
신유성의 입장에선 생각했던 것보다 목표를 너무 빨리 쟁취해 떨떠름할 지경이었다.
“물론……. 그 전에 식사를 해야겠지. 만찬회의 주인공인 너를 위해 준비한 요리가 있거든.”
딱-
빙긋 웃은 산드라가 검지와 엄지를 맞대어 소리를 내자 기다렸다는 듯 양옆으로 문이 열렸다.
“……음?”
자신도 모르게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고개를 돌린 신유성과.
“어, 허엇!”
그런 신유성을 보자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스미레.
‘백 퍼센트 확실해요! 이 엄청난 미모! 분명 유성 씨에요!’
비록 신유성의 모습이 변했어도 스미레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토록 찾던 신유성이라는 걸.
“뭐지? 문제라도 있나?”
결국 둘의 반응을 의아하게 생각한 산드라가 신유성에게 묻자.
“아, 아뇨…… 요리의 냄새가 너무 좋아서 그만…….”
신유성은 어떻게든 이유를 둘러대었다. 산드라와의 대화에 집중하느라 스미레가 근처까지 온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전채 요리는 카나페입니다! 비스킷에 옆의 샐러드와 고기를 곁들여서…….”
요리에 대해 설명하며 스미레는 생각했다.
‘그래도 상황은 좋아요!’
만날 방법만 정한다면 주어진 시간을 활용해 또 점수를 챙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산드라 님에게 들키지 않고 유성 씨에게 메시지를 전할 방법이 없을까요?’
번쩍-!
번개가 내려치듯 스미레의 머리를 관통하는 엄청난 아이디어. 요리의 설명이 끝나고 산드라가 카나페를 맛보는 동안 스미레는 신유성의 이목을 양손에 집중시켰다.
차악-!
그리곤 손바닥을 겹쳐 베개처럼 배더니 코오오- 자는 시늉을 하는 스미레. 그다음 스미레는 손바닥을 길처럼 평평하게 만들어 다른 손으로 그 위를 사람처럼 걸었다.
‘알겠다!’
지금까지 맞춰온 합 때문일까.
‘모두가 자는 시간에 몰래 나한테 오겠다는 이야기구나!’
신유성은 단번에 스미레의 메시지를 알아챘다.
끄덕- 끄덕!
이야기를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인 신유성은 쉿- 하고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대더니 까닥까닥- 손바닥을 움직여 이리오라는 시늉을 했다.
‘이건…… 혹시 들킬 수 있으니 조용하고 은밀하게 오라는 메시지! 유성 씨가 내 메시지를 이해하신 게 분명해!’
스미레와 신유성은 산드라가 미처 알아챌 수 없도록 몸짓 언어를 이용해 합이 착착 맞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 * *
스미레의 요리를 모두 맛본 신유성은 꿈만 같은 기분이었다. 거기다 식사를 마치자마자.
츠으윽-
물이 가득 찬 뜨끈한 욕탕에 몸을 담그고 휴식을 취하다니.
‘……공략이라기엔 너무 호사스러운 걸.’
딱 한 가지 부족한 게 있다면 목욕을 마친 순간 늘 신유성이 냉장고에서 꺼내 마시던 그리운 음료가 없다는 것.
‘목욕을 마치고 바나나우유가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말이야.’
첨벙- 저벅-
눈을 감고 피로를 녹이는 신유성의 귓가에 물을 튀기며 걸어오는 산드라의 발소리가 들렸다.
“후훗…… 이미 기다리고 있었군. 내 욕탕은 어때? 첫 손님의 감상이 듣고 싶군.”
“……혼자 있기에는 아까울 지경입니다.”
산드라는 완전히 몸을 담그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 신유성 몸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신기하군. 그렇게 많은 마나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몸에 단 하나의 상처도 없다니.’
설령 마법사라도 마나라는 위험한 힘을 수련한다면 자잘한 상처는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유성의 몸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마치 방금 갓 새로운 몸을 얻은 조각품처럼, 살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자그마한 흔적조차 없었다.
“네 몸의 흔적들은 잃어버린 기억과 함께 사라지기라도 한 건가? 마치…… 새로 태어나기라도 한 듯 순백의 몸이군.”
산드라의 말은 의외로 정답과 맞닿아 있었다. 신유성은 탑의 페널티로 문자 그대로 몸을 새로 얻었다. 이전과 달리 몸에 작은 상처조차 없는 건 그 때문.
반면.
신유성이 본 산드라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내 몸이 신기한가? ……후훗, 그럴 만도 하지. 너와 달리 온몸이 흉터와 상처투성이니까.”
미소를 지은 산드라는 욕탕에서 일어서더니 자랑스럽게 자신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하지만 이 상처는 내게 자랑스러운 기억들이다. 이 상처는…… 세이덴 국가의 전쟁에서. 그리고 이 상처는 첫 용병전을 뛰었을 때. 그리고 이 허벅지에 상처는 칠흑 군도 놈들의 텃세 때문이지.”
산드라는 끝이 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하나하나 기억해내 자랑스럽게 설명을 해주었다.
그러나 산드라의 몸에서 신유성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오직 하나.
‘저건…….’
날갯죽지에 커다랗게 새겨진 정체불명의 붉은 표식이었다.
“그럼 저건…….”
신유성이 표식을 가리키자 지금까지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산드라의 표정이 굳었다.
스윽-
산드라는 등을 돌려 표식을 보여주더니.
“이것? 이건 전쟁을 통해 얻은 자랑스러운 상처가 아니야. 이건 낙인이지.”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낙인은 산드라의 과거와 능력.
그리고 목표와 관련된 가장 큰 핵심.
빙긋-
그럼에도 산드라는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궁금하다면 말해줄게. 다만 긴 이야기가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