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5화
만찬회에서 교복이나 갑옷을 입을 순 없었던 탓에 김은아는 베니안이 빌려준 한쪽 다리가 트인 검은색 드레스에 덧옷을 입었다.
‘재질이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그래도 이정도면 괜찮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이 엄청난 인파 속에서 어떻게든 신유성을 찾기만 한다면 오늘 김은아의 목표는 완벽한 성공.
‘근데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네. 섬에 있는 사람들 중 일부만 온 건데도 이렇게 많다니…….’
이 거대한 성에서 김은아는 어디로 가든 꽉꽉 들어찬 사람들의 숫자를 보니 어림잡아도 2천명에서 3천명의 숫자가 넘어 보였다.
‘본격적으로 만찬회가 시작하기 전에 유성이를 찾고 싶은데…….’
만약 정말 단원들이 말했던 ‘귀빈’이 신유성이라면 김은아는 만찬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주목을 받기 전에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근데 쉽지 않네. 난 유성이가 어떤 얼굴로 변했는지도 모르고…….’
이곳을 봐도 저곳을 봐도 여인섬의 만찬회에 모인 건 온통 여자. 김은아는 아직 본 적도 없는 신유성의 ‘미지’에 얼굴을 오직 감만으로 찾아내야 했다.
“엇, 야! 잠깐! 당신!”
김은아는 갈색과 검은색이 묘하게 섞인 머리카락이 자신을 지나치자. 어떻게든 인파를 뚫고 그 머리카락의 주인을 찾아내.
탁-!
결국 어깨를 붙잡았다.
“잠시만! 얼굴 좀- 봐요!”
스윽-
“……네?”
하지만 머리카락의 주인이 고개를 돌아보자 김은아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절대 아니네.’
아무리 신유성이 모르는 얼굴로 변했다지만 김은아는 알았다. 눈앞의 여자는 신유성이 아니라는 걸.
“아, 미안해요. 잘못 봤어요.”
신유성은 어디 있는 걸까.
정말 이 곳에 있긴 한 걸까?
“후우…….”
결국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리던 그 찰나. 김은아에게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1명의 여인이 보였다.
짙은 검은색 머리카락.
조각칼로 깎은 듯 완벽한 이목구비와 얼굴의 옆선. 상대는 비록 평소라면 입을 일 없는 드레스 차림에 긴 생머리를 하고 있었지만 김은아는 확신했다.
‘유성이다-!’
물론 근거는 있었다.
[……그래. 난, 그런 거 하나도 안하고. 흑, ……잘생긴 남자랑 결혼한 다음에 돈만 펑펑 쓸 거야.]
김은아가 김준혁에게 이런 낯부끄러운 말을 하며 떠올린 사람은 신유성 밖엔 없었다.
김은아는 부끄러워서 좀처럼 인정하긴 싫은 주제였지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유성이는 잘 생겼어! 여자가 된다면 저 정도는 예쁠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김은아는 성별은 달랐지만 점점 신유성과 정체불명의 여인이 겹쳐보였다.
‘그래. 저 손가락!’
체격 때문에 모양은 달라졌지만 저 기다랗고 새하얀 손가락을 잊을 리가 없었다.
‘확실해! 저 손가락이라면 내가 제일 잘 알지!’
평온한 주말.
신유성이 소파에 누워 있으면 김은아는 괜히 그 옆으로 다가갔다.
[나, 머리 빗어줘.]
이젠 부끄러움도 없는지 김은아는 신유성의 허벅지에 누워 당당하게 부탁을 했고. 그럼 신유성은 미소를 지으며 저 기다란 손가락으로 김은아의 머리를 빗어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확신하게 만드는 건……. 행동!’
귀빈으로 보이는 여인은 잔을 쥔 채로 테이블에 앉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남들은 신비롭다며 감탄하겠지만. 나는 잘 알지…….’
빙글- 빙글-
신유성으로 의심되는 여인이 괜히 잔을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김은아는 간단하게 추리를 끝냈다.
‘저건……. 와인이 생각보다 입에 안 맞아서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는 얼굴!’
물론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너무 변해버린 부분도 있었다. 가령 다친 김은아를 든든하게 업어주던 등이라거나 기분이 꿀꿀한 날 김은아가 마음 편히 기댈 수 있었던…….
‘음…….’
가늘게 눈을 뜬 김은아는 변해버린 신유성의 몸에서 한참 동안이나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곤 무언가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저 정도면…… 거의 스미레…….”
물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신유성을 발견한 김은아는 한 걸음에 달려가 기쁜 얼굴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이 신유성의 어깨에 닿기 직전.
타악-!
김은아는 먼저 누군가에게 어깨를 붙잡혀 불러 세워졌다. 여자라기에는 자신보다 한 뼘은 커 보이는 엄청난 장신에 금발의 머리.
눈을 가린 검은색 안대까지.
용병들에게 설명을 들었던 그녀는 알 수 있었다.
“……흠.”
눈앞의 여자는 제왕의 군도를 주름잡는 주인들 중 하나이자 이번 공략의 보스 산드라.
툭-
산드라는 주먹에 턱을 괴고 한참 동안이나 김은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의아한 듯 물었다.
“……이 정도면 내가 이름을 외웠을 법도 한데.”
그리곤 산드라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휘리릭- 착-
갑자기 무도회의 한 장면처럼 김은아를 빙그르르- 돌리더니 품안으로 낚아챘다.
“이상한 일이야. 내가 이런 미인을 잊었을 리가 없거든. 넌 어디 소속이지?”
김은아는 궁금했다.
산드라와 전혀 닮지도 않았건 만 도대체 왜 갑자기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으며 안젤라의 얼굴이 떠오른 걸까.
‘뭐지 이 녀석……. 엄청 기분 나쁜데…….’
누구보다 정답률이 높은 김은아의 직감은 산드라를 본 순간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산드라 님. 그자는 제 단원 중 하나입니다.”
베니안의 설명에 산드라는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장미기사단의 소속인가? 어쩐지 한 송이의 장미답더군…….”
산드라는 김은아의 경멸 어린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윙크를 날리며 꿋꿋이 작업을 걸었다.
“잠깐 이야기 좀 같이하지.”
“아니 나는 유…….”
결국 신유성을 코앞에 둔 채 김은아는 산드라의 손에 만남을 저지당하고 말았다.
* * *
신유성이 등 뒤에서 뻗어오는 김은아의 손을 알아차리지 못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은아가 속한 곳은 장미기사단이군. 잘된 일이야. 나중에 몰래 찾아가야겠어.’
그건 굳이 사람이 많은 만찬회에서 아는 척을 해 의심을 살 필요는 없었기에 내린 판단. 신유성에게 필요한 건 직접적인 만남보다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장소였다.
“내가 직접 봤다니까 그러네!”
“시녀장님 보셨어요? 이번에 들어온 신입 엄청 웃겨요!”
“그러니까, 동부 놈들이 꽁무니를 빼고…….”
설령 이렇게 수천 명이 넘는 사람이 뒤섞여 시끄럽게 떠들더라도.
사아아-
[집중력 강화]
신유성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것만으로 주변의 모든 정보를 온전히 변환하여 받아들일 수 있었다.
‘먼저 소리.’
신유성은 뒤섞여버린 수천 명의 목소리 중. 자신이 원하는 게 아닌 소리를 전부 지워버렸다.
“─라니까?”
“그■■요! ■■■…….”
“■■■■! 하하■!”
성을 가득채운 소리는 점점 지워지고 마치 고요한 숲속처럼 아무런 소리도 남지 않았을 때 신유성은 다시 집중했다.
‘……여기서 내가 익숙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구분해 내는 거야.’
김은아는 이미 위치를 찾았기 때문에 신유성은 그 외의 파티원에 목소리를 하나씩 짚어나갔다.
“나는, 못 나가……. 이런 옷을 입고 어떻게 나가…….”
이시우.
“또 그 이야기야? 나가야 파티원을 찾지~”
그리고 사쿠라.
“찾아도 내가 이런 꼴인데 어떻게 만나!”
신유성이 엿들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몇 십 미터 정도의 짧은 거리였다. 그러나 반대로 말한다면 수천 명의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도 거리만 가깝다면 신유성은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동료들의 대화를 골라낼 수 있었다.
‘대기실이군. 다행이야. 시우랑 사쿠라도 성안에 있어.’
그러나 신유성은 아직 듣지 못한 목소리가 있기에 신유성은 대기의 마나를 느끼며 귀를 기울였다.
에이미도 사쿠라도 스미레도 아델라도 아직 들리지 않았다.
‘……성 안에 없는 걸까?’
결국 신유성이 확신을 가지기 위해선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집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소리란 호숫가에 던진 돌처럼 파장을 일으키기에 멀어질수록 원형을 찾기가 힘들어진다.
그렇기에 신유성은 잃어버린 원형을 재조합하기 위해 자신의 집중력을 강화시켰다.
마치 숫자의 조합처럼.
셀 수 없이 많은 소리의 파장들 속에서 어떻게든 동료들의 흔적을 찾아내려 애썼다.
조금 더 멀리.
조금 더 정확하게.
하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일은 동료가 큰 목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외쳐주는 것.
“드■■ ■■이에요-!”
간절한 바람이 닿은 걸까.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온 익숙한 소리의 파장에 신유성은 더욱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게 바로! 만찬회에 선 보일! 저희들의 요리!”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스미레. 거기다 신유성은 스미레가 요리를 가지고 만찬회에 온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이제 남은 건. 아델라와 에이미군.’
이제 완전한 파티까지 신원이 남은 건 겨우 2명.
‘공략은 정해졌어.’
식은땀을 닦은 신유성은 멀어진 산드라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