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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4화 (313/434)

제314화

산드라는 붉게 물든 하늘이 서서히 노랗게 익어가는 고즈넉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일이 벌어진 지 얼마나 지났지?’

시간이란 무엇일까.

단 하루의 짧은 시간 동안 푸른 하늘이 어둡게 물드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은 참으로 빨랐으며 너무나 가팔랐다.

‘9년, 아니…… 10년인가.’

눈을 감으면 가물가물 떠오르는 기억은 마치 어제 벌어진 일 같건만 지금 되새겨보니 지나버린 시간은 자그마치 10년.

‘그렇게 되짚어 보면…… 참 많은 게 바뀌었군.’

칼을 들이미는 전장이 아니라 황궁의 정치판에서도 후환을 없애기 위해 패배자의 목숨을 거두는 건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이젠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자신의 가문은 몰락했으며 가족들은 몰살당했다.

물론 그 시작은 아버지의 동료가 배신을 했기 때문이었지만 산드라는 원초적인 이유가 그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는 나에게 가르쳐준 것이지.’

타인이란 자신을 제외한 전부다.

그건 가족도 마찬가지이며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산드라는 누군가를 신뢰하고 약해진 모습을 드러냈기에 자신의 아버지가 목덜미를 물렸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선……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진리를.’

강자와 약자.

신뢰와 배신.

‘그 두 단어는 종이 한 장의 차이도 나지 않아. 사회와 야생은 별반 다르지 않지.’

정말 중요한 건 그 치열한 생존의 갈림길에서 자신이 승자인지 패자인지를 결정하는 것.

빙그르-

한 바퀴 잔을 돌린 후, 후각으로 그윽한 와인의 풍미를 즐긴 산드라는 드디어 입을 열었다.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나? 페리아? 그녀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고.”

잔을 내려놓은 산드라는 그제야 고개를 틀어 페리아를 보았다. 페리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산드라를 노려보았다.

“그,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까딱-

산드라가 검지를 움직였다.

그건 계속 말해보라는 제스처.

페리아는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떨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마침 운이 좋게 여인섬으로 떠밀려왔다느니 경비대가 추궁할 수도 없게 기억조차 잃었다느니! 산드라 님은 정말로 그 말을 믿으십니까?”

열을 내는 페리아의 모습에 산드라는 질린 듯 눈을 찌푸리며 다시 고개를 틀어 노을을 바라보았다.

“그래. 네 말대로 분명 희박한 확률이지…….”

자신을 신뢰해준다고 생각한 페리아는 얼굴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건 아주 잠깐의 착각일 뿐.

“하지만. 그렇다고 벌어질 수 없는 일은 아니지. 몰락 귀족에 불과했던 내가 제왕의 군도에서 군림할 수 있는 건……. 모두가 패배할 거라 예측한 전장에서 승리를 거뒀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불순분자를 감싸며 다시 여유롭게 와인을 음미하는 산드라의 모습에 페리아는 분한 듯 입을 다물었다.

엄격한 규율 아래에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며 철혈의 통치를 보여주던 산드라가 왜 이렇게 변한 걸까? 그리고 이방인에 불과한 녀석에게 이렇게나 특별한 대우를 해주는 걸 대체 무엇 때문일까?

“……평소의 산드라 님답지 않으십니다.”

페리아는 생각했다.

자신은 지금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충신 그러니 이 정도 발언을 할 자격은 분명히 있는 거라고.

하지만 산드라는 안대를 쓸어내리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페리아? 난 인간을 믿지 않아. 설령 그게 너라고 해도…….”

“사, 산드라 님…….”

“너라면 내가 여인섬을 만든 이유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얼음장처럼 차가운 산드라의 목소리에 페리아는 방금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굳어버렸다.

“……죄송합니다.”

푹-

자신이 주제넘었다는 듯 페리아가 고개를 숙이자 산드라는 위압감을 지우며 평소처럼 웃어주었다.

“괜찮아. 나도 네가 걱정하는 건 이해하니까. 하지만 알고 있잖아? 내 능력이 건재한 이상…‥. 그런 걱정은 무의미하다는 걸.”

산드라가 여인섬을 만든 이유.

산드라가 자신의 부하들을 여자로만 구성한 이유.

페리아는 그 두 가지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모두 저 안대 속에 숨겨진 능력과 깊은 연관이 있었으니까.

‘그래……. 그 능력이 있는 이상 그 정체불명의 여자가 산드라 님에게 해를 끼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겠지…….’

어쩌면 자신의 의심은 수년간 옆을 지켜온 자신보다 정체불명의 여자가 더욱 특별한 대우를 받는 걸 보며 질투한 걸지도 몰랐다.

“추태를 보여 죄송합니다.”

결국 페리아가 다시 고개를 숙이며 깔끔하게 인정을 하자 산드라는 만족한 듯 웃으며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부디 그녀가 섬에 잘 적응 할 수 있도록 친하게 지내길 바라. 페리아 너만 믿을게.”

“아, 알겠습니다. 그럼…… 신원미상의 인물을 완전히 섬에 받아들이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역시 완전히 의심은 떨칠 수 없었는지 페리아가 떨떠름한 얼굴로 묻자. 산드라는 신유성의 모습을 떠올리며 정말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그래. 부디 그럴 생각이야. 그리고 신원 같은 건 관계없어. 난 알 수 있거든.”

설마 자신이 모르는 사이 따로 정보라도 얻으신 걸까? 페리아는 놀란 얼굴로 산드라를 보았다.

“무엇을 말이십니까?”

그러나 페리아의 믿음은 다시 배신당했다.

“이런 자리에 머물며 사람을 보다 보면 감이라는 게 생기기 마련이지. ……그래. 그렇기에 알 수 있다. 토끼처럼 선한 그 눈동자. 마치 첫눈처럼 새하얀 모습의 그녀는…… 그래. 천사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의 산드라는 이미 신유성에게 홀려 있었다.

*     *      *

오직 여성으로 이루어진 백전불패의 용병단이 마치 제국의 기사처럼 갑옷을 입고 황실의 검술로 적을 제압한다고 하여 붙은 이름.

장미 기사단.

물론 베니안은 정말 제국 기사단의 소속이었으니 장미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정 틀린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 꼬락서니를 못 봤기에 하는 말이겠지.’

모닥불 앞에서 짧은 셔츠를 입고 술판을 벌이며 멧돼지 고기를 뜯는 자신의 부하들을 보며.

절레절레.

베니안은 못 볼 꼴을 본 듯 고개를 저었다.

“제발…… 품위를 지키어라.”

베니안은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고 한숨까지 쉬었지만 덩치가 큰 여성 단원은 나뭇가지로 이를 쑤시며 말했다.

“품위도 좋지만 그 전에 더워서 죽겠습니다. 뭐, 근데 상관없지 않습니까?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보다 베니안 님! 오늘 산드라 님의 성에서 만찬회가 열린다는 게 사실입니까!”

“뭐야 진짜? 평소엔 보기도 힘든 맛있는 음식이 왕창 있겠네!”

“저희도 가겠습니다!”

“저도요!”

산적 떼처럼 야만적으로 뼈다귀를 들고 팔을 뻗는 부하들의 모습을 보며 베니안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너희는 어디 내놔도 부끄러운 녀석들이군…….”

반면.

그런 자신의 부하들 틈에서도.

능숙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해 우아하게 식사 예법을 지키는 단 1명의 소녀가 있었다.

‘그래. 저 정도 예법이라면 만찬회에 데려가도 문제는 없겠어.’

산드라는 뼈째로 쥐고 뜯어먹는 몇몇 부하들 덕분에 식사 예절을 지키는 소녀가 까마귀 떼에 한 마리의 백조처럼 유독 눈에 띄었다.

거기다 덥다고 옷도 헐벗고 있지 않으니 얼마나 좋은가?

“거기! 너 신입! 나와 만찬회에 가지 않겠나?”

결국 산드라가 콕 한 명을 짚어 부르자. 신입으로 불린 소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됐어. 여기서 식사는 죽을 거 같을 때, 최소한으로만 먹기로 방금 정했거든.”

현대의 요리 중에서도 최고급의 식재료로 길들여진 김은아의 입맛에 용병단의 멧돼지 고기구이는 얼마나 끔찍한 식사였을까?

김은아는 가히 썩어버린 표정으로 접시 위에 식기를 놓았다.

‘스미레의 음식이 그리워…….’

지금 스미레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만찬회를 안 가? 신입 너 이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다?”

덩치 큰 단원이 아무리 설득을 해도 방금의 끔찍한 식사 덕에 여인섬의 요리에는 흥미를 잃은 김은아.

“맞아! 맛있는 음식도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이번에 오신 귀빈분의 미모가 보통이 아니래!”

“나도 시녀들 이야기 들었어! 아름답고 신비로운 것이 마치…….”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이야기에 귀가 쫑긋거렸다.

사람들 입에서 이렇게나 찬송이 쏟아질 정도라면 김은아가 예상이 가는 사람은 1명밖에 없었다.

“……그 귀빈이라는 사람 어떻게 생겼는데?”

만일의 만약.

정말 여인섬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는 그 귀빈이 신유성이라면 의심을 받지 않는 선에서 만나야 했다.

“그렇게 궁금하다면 직접 가보는 게 어때?”

결국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한 김은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근데 만약 유성이가 맞으면…….’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변했기에 이렇게나 칭송이 끊이질 않는 걸까? 김은아는 어떻게든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 했지만 좀처럼 예상이 가지 않았다.

*     *      *

“저, 그럼 스미레 마스터! 메뉴 구성은 어떻게…….”

셰프도 아닌 거창하게 마스터라는 칭호까지 붙게 된 스미레는 그만큼 이번 만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우음, 그러게요.”

메뉴를 선별하는 것도.

레시피를 정하는 것도.

요리를 하는 것도.

이번 만찬회에서 모두 스미레의 역할. 스미레의 어깨에 걸린 무게는 너무나도 막중했다.

“귀빈분이 어떤 분이신지…… 평소에 어떤 요리를 좋아하시는지 알 수 있다면 더 확실하게 메뉴를 정할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스미레의 고민에도 하녀들은 명확히 답을 줄 수가 없었다.

“그냥 엄청나게 아름다우시다는 것밖에는…….”

그저 스미레에게 주어진 건 이 정도의 힌트뿐.

“무척, 아름다우시다고요?”

하지만 스미레는 그런 단편적인 힌트만으로도 어딘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지금까지 스미레의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이었고.

‘설마!’

만약 여인섬의 저주로 ‘여자’의 몸이 된다면 지금의 찬사가 누구보다 잘 어울릴 사람이었다.

‘유성 씨!?’

이렇게 추리망이 좁혀진다면 메뉴 선택은 너무나 간단했다. 이제 스미레의 퀘스트는 신유성이 좋아할 음식을 만드는 것!

“저, 정했어요!”

여인섬에서 가장 뛰어난 미모를 가진 사람을 위해 메뉴에 대한 확신을 가진 스미레는 번쩍-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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