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2화
사도닉스에 이어 이제는 산드라까지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었다. 신유성은 보스에게 인기가 많았다.
대부분의 헌터가 보스와 전투를 치르는 것과 달리 산드라는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신유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에게는 물어볼 게 참 많아. 가령 어쩌다 우리 섬의 해변으로 밀려오게 되었는지 같은 것.”
그러나 산드라가 그렇게 물어도 신유성의 입장에선 왜 이렇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런 시작점이었을 뿐이었다.
“죄송하지만 그것에 관해선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눈을 떠보니…….”
이 정도의 적당한 대답으로 넘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상대는 여인섬을 지배하는 여제.
‘이런 대답을 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겠지…….’
신유성은 눈치를 살폈다.
산드라의 반응에 따라 최악의 경우 지금 당장 행동을 개시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래?”
도저히 감정을 캐치 해내기 힘든 의미심장한 산드라의 표정에 신유성은 긴장했다.
꿀꺽.
‘역시 먹혀들지 않는 건가?’
어쩌면 차라리 적당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미리 이번 차원에 대해 알아둔 정보가 있으니 거기에 맞춰 이야기를 맞춘다면 불가능하진 않았다.
하지만.
신유성의 걱정은 그저 기우에 불과했다.
“나와 같군.”
산드라는 신유성이 기억을 잃었다는 이야기에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였다.
“괜찮아. 나도 잊기로 했어 나는 기꺼이 내가 가진 모든 걸 버렸지. 나의 과거도 나의 가족도.”
휘리릭!
마치 무도회의 한 장면처럼 산드라는 신유성의 손을 잡아 멋들어지게 돌렸다.
‘이건 은아랑 해본 적이 있어!’
신성그룹의 회장에서 배웠던 걸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이야. 신유성은 마치 무도회에 익숙한 듯 산드라의 손길에 맞춰 회전했다.
“이것 봐. 정말 중요한 건, 잊을 수 없는 거야. 그건 몸이……. 그리고 가슴이 기억하는 거야.”
산드라는 신유성의 춤사위에 만족한 듯 웃더니 손을 놓고 느긋하게 창가로 걸어갔다.
저벅저벅.
성당에서나 볼법한 대형 스테인드글라스 그 너머에서 쏟아지는 오색찬란한 빛의 중심에서.
촤악-
양팔을 날개처럼 펼치며 산드라는 말했다.
“중요한 건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이었는지가 아니야. 과거는 과거일 뿐이야. 정말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이 되고 싶은지다.”
확실히 산드라는 여인섬의 여제다운 엄청난 달변가였다. 수천이 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사람을 수하로 다루는 산드라의 카리스마는 주변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내 손을 잡아보겠나?”
스윽-
산드라가 손을 내밀자 신유성은 그 손을 잡으려다 고민에 빠졌다.
‘뭐지, 의심…… 하지 않네?’
아니 의심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산드라의 태도는 엄청나게 호의적이었다. 이거 사실 생각보다 상황이 쉽게 풀릴 수 있는 게 아닐까?
‘산드라의 장단만 맞춰준다면……. 어쩌면 섬 내에서 이동하는 것 정도는 금방 허락받게 될지도…….’
산드라는 신유성의 고민이 깊어보이자 성큼 다가와 멋쩍게 웃어보였다.
“후훗,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자…… 어서.”
산드라는 규칙을 어긴 자는 자신의 부하더라도 엄하게 다스려 철혈의 여제라는 호칭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신유성에게만큼은 너무나 자상한 산드라의 태도.
적어도 산드라에게만큼은 미(美)라는 건 무력만큼이나 파급력을 가진 아주 중요한 것이 분명해보였다.
끄덕.
‘좋아 지금은…….’
결국 결단을 내린 신유성이 산드라가 내민 손을 잡자. 산드라는 미소를 머금으며 다른 한쪽 손으로 자신의 안대를 내렸다.
위잉-
그러자 드러난 건 안대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산드라의 붉은 눈. 신유성은 산드라가 뿜어내는 마나의 여파에 곧바로 직감 할 수 있었다.
‘……확실해. 안대에 감춰져 있던 오른 쪽 눈. 이게 산드라의 능력!’
신유성은 팔을 잡아 빼려 했지만 산드라는 여전히 꽉 손을 부여잡은 채로 붉은 눈이 빛을 발했다.
지이잉-!
붉은 빛은 마치 모든 걸 삼키는 블랙홀처럼 주변의 풍경을 빨아들이더니.
“……매혹하라. 이슈타르.”
산드라의 속삭임과 함께.
팟-!
한순간에 점멸했다.
‘이건…….’
신유성조차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상상조차 가질 않는 산드라의 능력.
깜빡-
정신을 차린 신유성이 느릿하게 눈을 떴을 때 산드라는 이미 안대를 쓰고 있었다.
“그리 놀랄 것 없어. 당신이 기억을 잃었으니 내 쪽에서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신유성은 산드라의 말에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꺄하하- 나도 갈래!”
“하나 보기도 힘든 동부의 물건들이 오늘은 많습니다! 많아요! 다들 구경하고 가세요!”
“그럼 연주를 시작하겠습니다. 부디 방랑자의 노래를…….”
신유성이 눈을 뜬 곳은 다름 아닌 엄청난 인파가 모인 광장. 그 중심에 세워진 분수대에 앉은 채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어때? 이게 내가 만들고 싶은 제국이다. 총 5개의 주변국을 통합해 나의 통치 아래에 둘 것이다. 고리타분한 신분제도 철폐할 생각이지.”
한쪽 손으로 머리를 감싼 신유성은 산드라의 말에 다시 한번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광장의 수많은 인파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여성이었다.
“눈치챘나? 난 말이지.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 흉포하고 독선적이며 아름답지 못하거든.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만.”
신드라가 한 마지막 말은 신유성도 정말이지 동감이었다.
‘……그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신유성은 산드라가 지닌 사상 따위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산드라가 발휘한 정체불명의 능력.
단순히 마나로 이루어진 기술이라면 신유성이 반응하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단 이야기는 산드라의 안대 속에 감춰진 건 비밀이 덧대어진 고도의 술식이란 말이었다.
‘……차라리 미리 보게 된 것이 잘 된 일이야. 이 능력을 파훼하지 못한다면 산드라는 절대 이길 수 없어.’
과연 탑의 20층.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에 신유성의 표정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당혹한 감정이 드러났다.
“당신. 나를 두려워하고 있군.”
그 감정을 읽어낸 산드라는 여전히 분수에 앉아 여유롭게 말했다.
“본능적으로 느낀 건가? 그럴 만도 하지. 나의 허락이 없다면 당신은 이 차원에서 나갈 수조차 없으니…….”
주춤-
신유성이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섰지만 산드라는 소용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뿐이 아니지. 명심해. 이 세상의 어떤 여자도 나를 거스를 순 없어.”
따악-
산드라가 검지와 엄지를 마주쳐 소리를 내자 신유성의 몸 안에선 스멀스멀 마나가 뿜어져 나왔다.
“당신의 몸에서 엄청난 마나가 느껴지는 걸 보아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어.”
기껏해야 배리어도 만들지 못할 적은 마나였지만 산드라가 마음을 먹는다면 신유성에겐 어떤 일이 벌이 질지 몰랐다.
“나를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그러나 이런 급박한 상황에서도 너무나 차분하게 신유성의 목소리에 산드라는 다시 감탄했다.
“오, 내 능력을 본 사람 중 가장 담담한 반응인걸? 보면…… 볼수록…… 당신의 매력은 한둘이 아니군.”
다행히도 산드라가 신유성에게 호감을 가진 상황 자체는 변함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행동은 서로를 파악하고 원하는 걸 쟁취하기 위한 신경전.
“선택은 당신 몫이야. 어쩌면 기억을 잃기 전 당신은 제국의 기사였을 수도 마탑의 마법사였을 수도 아니, 어쩌면 나를 죽이기 위해 파견된 암살자였을 수도 있지.”
그렇게 말한 산드라는 천천히 신유성에게 다가와 검은색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검지에 감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말했잖아? 중요한 건 과거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미래라고.”
산드라는 지금 신유성에게 섬을 떠날지. 아니면 자신과 이곳에 남을지 묻고 있었다.
“그럼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당신은 뜻대로 하게 해주겠다는 이야기인가요?”
아직은 수수께끼 같은 산드라의 태도에 신유성은 좀처럼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건 모를 이야기지. 난 변덕이 심하고, 가지고 싶은 게 있다면 어떻게든 가지거든.”
산드라는 지금 자신을 신뢰하는 걸까. 신뢰하지 못하는 걸까. 물론 퀘스트를 위해 여인섬에 남아야 하는 신유성의 입장에서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남겠습니다. 저에겐 기억도 돌아갈 곳도 없으니까요.”
산드라는 그런 대답에 만족한 건지 손바닥으로 신유성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좋아. 잘 생각했어. 당신의 있을 곳을 만들어주지. 원하는 게 있다면 내게 뭐든 말해보도록 해.”
‘원하는 게 있냐고?’
여인섬에 있는 파티원들의 행방.
페리아와 베니안의 약점.
그리고 산드라의 안대 속에 숨겨진 눈의 비밀 등 신유성이 말하고 싶은 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명백히 의심을 받고 있는 지금. 그건 너무나 섣부른 행동이었다.
오히려 물어보고 싶은 건 알 수 없는 산드라의 태도와 의도.
“그건 제 쪽에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이죠?”
모든 게 베일에 쌓인 듯 비밀스러웠던 산드라는 신유성의 물음에 생각보다 순순히 대답했다.
“당신과 결혼하고 싶어. 첫눈에 반했거든.”
이걸로 사도닉스에 이어 2관왕을 달성한 유성이었다.
거기다 동물원에서 고백을 했던 김은아와 벨벳이 인정했을 정도로 애정도가 맥스를 찍어버린 스미레. 이미 가족 만들기를 생각 중인 아델라까지 합한다면 신유성의 전적은 5관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