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11화 (310/434)

제311화

시작은 몰락한 귀족의 여식.

하지만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전쟁을 승리로 기록했던가?

산드라는 미소를 지으며 줄지어 도열한 병사들을 보았다. 여인섬은 단 1명의 남성도 용납되지 않는 금남의 구역이었지만 산드라는 여성의 몸으로 용병들을 규합시켜 지금의 아성을 이룩했다.

“저희가 용병단으로 참전한 국가가 모두 승리를 기록했습니다. 이번 전쟁도 기록할만한 대승! 정말 감축드립니다.”

지금 한쪽 무릎을 꿇으며 산드라에게 보고를 올리는 건 베니안. 그녀는 5급 중에서도 상격의 실력을 가진 기사로 산드라의 심복 중 하나였다.

“어찌 그것이 내가 축하받을 일이겠나? 모두 베니안 자네와 용병단에 속한 이들의 노력 덕분이지.”

산드라는 안대로 한쪽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다른 한쪽은 분명 베니안을 보며 웃고 있었다.

“산드라 님…….”

베니안은 산드라의 미소에 감동받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럼 페리아 동부전선은 어때?”

“지금까지는 의뢰가 거의 없던 동부전선에서도 이번 전쟁으로 여인섬의 용병단의 명성이 자자해졌습니다. 오늘만 3건의 의뢰가 들어왔을 정도입니다.”

기사 출신인 베니안이 무릎을 꿇은 것과 달리 페리아는 지팡이를 든 채 서 있었다. 하지만 산드라를 대하는 페리아의 모든 행동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아닌 무한한 신뢰와 존경이 담겨 있었다.

“그래? 생각보다 빨리 끝났군. 잘된 일이야. 이젠 우리에게 감히 이빨을 드러낼 놈도 없으니 중립을 지키며 의뢰비를 올리면 되겠군.”

산드라가 이렇게까지 부하들에게 존경을 받는 건 6급에서도 상격에 달하는 압도적인 그녀의 무력을 가졌음에도 전략가 못지않은 빠른 머리 회전 덕분이었다.

작은 용병단에 불과했던 여인섬이 지금의 부와 명성을 축적한 건 전부 산드라가 실익을 채웠기에 가능한 일. 페리아는 당분간 중립을 지키자는 산드라의 의견에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당분간은 현상 유지입니까?”

물론 그 중립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다.

“그래. 그렇게 천천히 힘을 모아 하나씩 하나씩 주변 국가를 잡아먹는 거야. 우리 여인섬의 단결력을 보여주고…… 공포를 심어주는 거지.”

산드라의 진정한 목표는 주변 국가를 하나씩 삼키며 거대한 제국을 형성하는 것. 여인섬은 그 시작점이자 산드라가 가진 야망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 긴 전쟁 때문에 피로할 터인데 형식적인 보고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다음 전쟁까지 모두 휴식을 취하도록.”

그 말과 함께 산드라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안대를 낀 산드라의 미소는 비록 반쪽짜리에 불과했음에도 베니안과 페리아는 마치 홀린 듯이 고개를 주억였다.

“아, 알겠습니다!”

“네! 단장님!”

그렇게 자신의 성으로 돌아가는 산드라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유독 가벼웠다.

‘오늘은 그녀가 깨어났으면 좋으련만…….’

물론 그 이유는 산드라가 여인섬의 해변에서 발견한 너무나 신비로운 한 소녀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날은 모든 것이 특별했다. 유독 그날따라 이른 시각에 일어났으며 변덕스럽게 순찰이자 산책을 겸해 산드라는 해변으로 나갔었다.

‘그래. 마치 운명처럼…….’

그것이 첫 만남.

산드라는 정신을 잃고 잠든 흑발의 소녀를 보고 운명을 직감했다.

‘그 소녀의 아름다움은 절대 인간의 아름다움이 아니야.’

그건 마치 여신.

산드라는 해변으로 떠밀려온 흑발의 소녀가 자신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 같았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누구보다 미(美)를 숭상하는 자신이 살아생전 이보다 더 강렬한 이끌림을 받을 수 있을까?

‘그래. 이건……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운명.’

산드라는 흑발의 소녀를 본 이후, 어떤 바쁜 업무 중에도 아무리 잊으려 애써도 좀처럼 소녀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산드라는 눈을 뜬 모습도 단 한마디의 말도 나눠보지도 못한 상대 때문에 이렇게나 상사병을 겪고 있는 자신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후우…….”

하지만, 몇 번을 강조해도 모자랐다.

자신조차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소녀는 압도적인 미(美)를 지니고 있었다.

‘출정하기 전에 그 소녀가 깨어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     *      *

아무래도 이쪽 차원에선 가온의 교복이 이상하게 보인 모양이다.

‘갈아입을 드레스까지 준비해주다니…….’

아니 생각해보면 준비해준 게 아니었다. 이런 품위 있는 드레스는 입는 것조차 일. 신유성 혼자서 입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덕분에 여러 명의 하녀가 자신에게 붙어 손수 입혀주며 머리 정리까지 도와주는 탓에 신유성은 정신이 없었다.

‘빨리 산드라와 여인섬의 정보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대충 하녀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조합하자면 여인섬은 산드라의 휘하에 모인 일종의 용병단이었다.

당연히 용병 단장인 산드라에게는 수족처럼 따르는 여러 부하들이 있었고 그중 유독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는 건 기사 출신의 베니안과 마법사 출신의 페리아라고 했다.

[베니안 님이 얼마나 대단한 기사신지는 직접 봐야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기다란 검을 휘두르실 때마다 신비로운 청색 머리카락이 같이 휘날릴 때면 어찌나 아름다우신지!]

[그리고…… 페리아 님은 마탑 출신의 마법사신데 이 용병단에서 녹색 머리카락을 가진 분은 그분밖에 없답니다. 혹시 뵈신다면 꼭 인사를 드리세요!]

하녀들이 수다스러운 덕분에 신유성은 그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꽤 많은 정보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그중 9할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예쁘다는 칭찬에 관련된 것이었으므로 걸러 들을 필요가 있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은 산드라에게 나를 믿게 만들고 3인의 능력에 대해서 전부 알아내는 것…….’

산드라. 베니안. 페리아.

여인섬 최고의 전력인 3인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전투에 임한다면 파티는 큰 피해가 생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을 알고 자신을 안다면 백전불패. 여인섬의 보스인 산드라가 지닌 특별한 힘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신유성은 파티의 승률이 적어도 9할 이상은 될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 그러니 지금은 급하게 생각할 건 없어.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동료를 찾고 정보를 모으는 거야.’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의심을 받지 않으며 정보를 모을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건 바로 주변 인물을 이용하는 것. 신유성은 자신의 머리를 빗겨주는 하녀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저처럼 검은 머리카락은 처음 보는 게 아니십니까?”

“네? 흐음…… 여인섬에는 동부에서 오신 분은 적으니 확실히 흑발은 드문 머리 색이긴 하죠! 그래도 처음 보는 건 아니랍니다.”

이건 신유성이 생각한 질문 중 가장 의심을 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래요? 시간이 난다면 꼭 만나보고 싶네요. 혹시 기억을 잃기 전 저를 알지도 모르고…….”

기억을 잃은 척.

이렇게 자연스레 연기를 하는 신유성을 과연 누가 의심 할 수 있을까? 덕분에 하녀는 아무런 의심조차 없이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우으음, 그게 솔직히…… 이름까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베니안 님의 부대에 속하신 분 중 하나라는 건 알고 있어요.”

만약 모든 파티원의 시작점이 여인섬이 맞고 그중 흑발을 가진 사람이 1명이라면 그건 김은아가 분명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은아를 만나기 위해선 그 전에 베니안과 안면을 터야겠군.’

신유성은 더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지만 말을 아꼈다.

이제 막 여인섬에서 눈을 뜬 신유성은 기억을 잃은 척 연기를 해야 했고, 의심을 받지 않아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간단한 질문으로 파티원의 정보를 캐내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신유성이 더 이상의 말을 아끼자 하녀는 말을 덧붙였다.

“산드라 님의 성에서 용병분의 숙소는 제법 거리가 멀어요. 혼자 성 밖으로 나가시긴 힘들 거예요. 허락해주실 거 같지도 않고…….”

확실히 여인섬은 아직 이방인에 불과한 신유성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생각보다 섬의 크기가 너무 방대해. 거기다 마음대로 움직이기에는 제약도 많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단 1명이라도 파티원을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 멤버가 파티에서 전력이 높은 편인 아델라 스미레 김은아 중 하나라면 임무를 맡기기에 더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려면 어떻게든 산드라와 만났을 때 내 마음대로 섬을 돌아다닐 수 있도록 허락을 따내야 해.’

하지만 누군가의 마음을 산다는 건 뛰어난 화술과 상대방의 심리를 꿰뚫어야 하는 일이기에 어찌 보면 전투로 승리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일이 어떻게 풀릴지는 신유성조차 확신할 수 없는 미지수였다.

기이익.

그러나 시간이 지나 신유성이 모든 준비를 끝내자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저어……. 산드라 님께서…… 만남을 청하셨습니다.”

너무나 빨리.

‘시작됐군.’

담판의 순간이 온 것이다.

*     *      *

산드라의 집무실.

그 문 앞에선 신유성은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산드라는 아지트를 굳이 섬이라는 단절된 장소를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정확한 진의는 알 수 없지만 무척이나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나를 거둔 게 보상 때문이라면. 기억을 잃었다는 이야기에 바로 섬에서 추방할지도 모를 일이야.’

그나마 나은 선택지는 어떤 일을 맡기게 되든 산드라가 자신을 계속 여인섬에 두는 것. 설령 하찮은 잡무를 맡게 되어도 섬을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신유성은 정보를 수집하며 동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니 내 첫 목표는 산드라에게 인정받아, 어떻게든 섬에서 추방당하지 않는 것.’

생각을 정리한 신유성이 하녀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자.

“산드라 님. 귀빈께서 오셨습니다.”

하녀는 산드라에게 신유성이 도착했음을 알렸고 곧 문이 열렸다.

“……드디어 일어났군.”

여성이라기에는 너무나 진중한 목소리. 산드라의 눈이 부실 정도로 환한 금발이 창가의 빛을 반사했고 푸르른 벽안은 온전히 신유성만을 담았다.

산드라의 눈빛은 어찌나 강렬한지 덕분에 신유성조차 당황하게 만들 정도였다.

‘뭐지…… 저 눈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너무나 다른 산드라의 분위기.

저벅저벅.

바닥을 울리는 굽 소리와 함께 제복을 입은 산드라는 천천히 신유성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마치 오래도록 기다린 연인을 만난 듯 애타는 얼굴로.

“……겨우 며칠 동안.”

아주 강렬하게 바라보더니.

처억!

한쪽 손으로는 신유성의 어깨를.

한쪽 손으로는 신유성의 손을 꽈악 붙잡으며 너무나도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이 순간이 오기를 몇 번이고 빌었는지 알고 있나?”

물론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갑작스러운 전개에.

‘……이게 뭐지?’

신유성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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