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310화 (309/434)

제310화

고풍스러운 양식.

레이스가 달린 침대.

거기다 자신의 몸을 확인할 때 보았던 거울은 보석으로 세공되어 있는 걸 보며 신유성은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군.’

처음 신유성이 생각했던 여인섬의 모습은 야만적인 원시부족의 이미지였건만 지금 이곳은 중세에나 나올 법한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성.

‘이 몸도 장소도 좀처럼 적응이 되질 않는 걸…….’

심지어 침실에는 하늘거리는 하얀 레이스가 장식되어 있고 창문을 열면 보이는 호숫가에선 잔잔한 물결 위에 빛이 반사되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정말 이런 장소가 극악한 난이도의 20층이 맞는 걸까?

‘일단 지금은 퀘스트를 따르면서 동료들을 찾는 게 먼저야.’

아까 전 확인한 퀘스트의 내용은 산드라의 인정을 받고 부하가 되어 그녀의 부대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신유성의 시작 장소는 꽤 좋았다.

‘시설을 보아. 산드라가 이 성에 머물고 있는 건 분명해. 그녀는 여인섬의 보스니 어쩌면 이 성의 주인일지도 모르지…….’

척 보기에도 침소에 귀중한 물건이 즐비한 걸 보니 성의 주인은 상당한 부와 힘을 가진 듯 보였다.

여인섬에서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당연히 산드라.

‘산드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기 전에 동료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 포켓 - 연결 불가 ]

탑 내부에선 대부분의 경우 포켓이 먹통이 된다.

특히 이렇게 탑의 차원이 본래의 세상과 크게 달라진 경우는 100%라고 말해도 좋았다.

‘동료에게 연락이 불가능한 지금은 탑의 인물에게라도…….’

신유성의 바람이 통한 것일까. 문이 벌컥 열리며 메이드 복장을 입은 여성은 놀란 듯 입을 가리며 소리쳤다.

“어, 어아앗! 드디어 일어나셨네요! 어머 이 사실을 얼른 산드라 님께 말씀드려야 하는데!”

산드라?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이름이 이렇게 쉽사리 나올 줄이야. 하지만 지금은 이 여성에게서 정보를 파악하는 게 우선이었다.

‘난 지금 탑에서 어떤 역할로 이곳에 들어온 걸까?’

신유성에게는 마침 새롭게 얻은 정보가 있었다. 방금 전 여성이 말한 ‘드디어 일어났다.’ 라는 말은 마치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한 사람에게나 할법한 말이었다.

‘그럼 이 인물을 통해서 지금 상황을 파악해볼까.’

마치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는 듯 머리를 짚으며 신유성은 하녀를 바라보았다.

“……드디어 일어났다니요?”

“어머…… 혹시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으시는 건가요? 하긴 그런 엄청난 일이 있었으니!”

하녀는 신유성이 안쓰러운 듯 자신의 입까지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요! 해변가에 배의 파편이며 상자까지 온갖 물건이랑 같이 떠밀려 오셨는데 아무래도 항해를 하시다…… 가엽게도 바다 폭풍을 만나신 거겠죠.”

이야기를 하던 하녀는 무엇이 신나는지 재빨리 다가와 혹시 누군가 엿들을까 주위를 살피며 비밀스럽게 신유성에게 말했다.

“저어…… 이런 이야기까지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아씨를 거둬주신 게 바로 이 여인섬의 주인이신 산드라 님이시랍니다!”

후훗- 하고 웃은 하녀는 신유성이 물을 것도 없이 지금의 상황에 대해 전부 털어 놓았다.

“산드라 님은 해변에 밀려오신 아씨를 보시더니 신분이 귀하신 분이 확실하니 귀이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하녀의 이야기를 통해 파악한 상황은 너무나 간결했다.

‘타고 있던 항해선이 난파하여 여인섬에 조난되고 산드라에게 거두어졌다. 이 정도의 상황인가?’

다만 의문인 건 탑의 기록에서 확인한 산드라는 타인에게 이유 없이 호의를 베풀 자가 아니었다.

‘……아마, 귀한 신분으로 생각했다는 걸 보아. 산드라가 호의를 베푼 이유는 구해준 보답을 기대한 거겠지. 상황이 이렇다면 산드라를 만나는 건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야.’

신유성에게 주어진 건 산드라를 만나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나 최적의 역할.

“그럼 그분께 감사의 인사를 표하고 싶은데……. 지금 만날 수 있습니까?”

신유성이 겉으로는 상냥하게 웃으며 속으로는 퀘스트를 이루기 위한 밑밥을 던지자. 아니나 다를까 하녀는 기다렸다는 듯 냉큼 밑밥을 물었다.

“그럼요! 지금 바로 산드라 님께 아뢰겠습니다!”

공략의 시작부터 20층의 보스이자 여인섬의 주인인 산드라와 대면하게 된 것이다.

*     *      *

[20층에 입장하셨습니다.]

미처 홀로그램의 메시지를 확인하기도 전에.

척! 척척!

이시우는 소리가 날 정도로 다급하게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그리고 곧이어 대체 무엇을 잃었는지.

“아 진짜, 미치겠네…….”

나라를 잃고.

세상을 잃은.

너무나도 허망한 얼굴로 이시우는 중얼거렸다.

“이건, 이건 아니야. 진짜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야…….”

있어야 할 건 없고.

없어야 할 건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 사나이로 죽으려 한 자신에게 이렇게 재미없는 농담이 있을까?

“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풀썩-

땅바닥에 주저앉은 이시우가 하늘을 보며 소리치자 바로 옆에 누군가 죽어가는 듯 끅끅-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끄윽- 흑- 끅- 미쳐, 흑- 나, 흐윽- 시우야…… 진짜로 너무, 흑 웃겨…….”

죽어가는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사쿠라였다. 언제 옷을 바꿔 입은 건지 메이드복을 입은 사쿠라는 배를 부여잡고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아……, 진짜, 눈물 나…… 시우야 그 모습 너무 잘 어울리는데?”

“그만 웃어……. 나는 정말 심각하다고…… 그리고 그 괴상한 옷차림은 뭐야?”

“나? 아무래도 역할에 따라 깨어나는 시간이 다른가 봐. 난 한참 전에 갈아입었어.”

“뭐야…… 그럼 네 역할은 메이드라는 거야?”

이시우가 사쿠라가 입은 메이드복을 손가락질하며 별로라는 표정을 짓자. 사쿠라는 입을 가리고 여우처럼 쿄쿄쿄- 웃어주었다.

“흐응~ 과연 나만 그럴까~?”

[퀘스트: 여제 산드라의 곁에서 정보를 얻으십시오.]

[참고: 당신의 역할은 하녀로 위장한 스파이입니다. 당신은 정보를 얻기 위해 산드라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참고2: 당신은 산드라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주어진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야 합니다.]

[참고3: 산드라는 자신의 여인섬에 남성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남성은 산드라와 무조건적으로 적대적인 관계가 됩니다.]

홀로그램으로 된 탑의 메시지를 읽은 이시우는 사쿠라가 입은 메이드복이 비단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미치겠네, 나보고 이걸 입으라고!? 내가 이딴 옷이 어울리겠냐고! 차라리 죽여! 10미터 넘는 괴물이랑 싸우라고 그래!”

이시우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주어진 현실을 부정하자. 사쿠라는 애써 이시우를 타일렀다.

“시우야……. 낙담하지 마. 탑을 공략한다는 건 목숨을 거는 용감한…….”

물론 참으려 할수록 더욱 심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의 특성상. 사쿠라는 진지한 표정을 유지하는 게 쉽지 않았다.

“흑, 미치겠다. 시우 가슴이 나보다 더 커…….”

“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끅- 미안 부러워서 그래…….”

얼마나 웃었는지 사쿠라가 눈물까지 닦으며 손을 휘휘- 저어주자 이시우는 눈빛은 더욱 이글거렸다.

“하여튼! 그딴 옷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못 입어!”

“아, 왜! 지금은 잘 어울릴걸? 저기 거울 좀 봐!”

이시우는 사쿠라의 손끝이 가리킨 거울을 보며 철렁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저 거울의 너머에는 과연 얼마나 충격적인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직,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겁을 먹은 이시우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사쿠라는 강제로 손을 끌어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그러지 말고~ 이리와!”

그러나 진실이란 가혹한 법.

사람은 때로는 감당 할 수 없는 진실의 두려움에 도망치기도 했고,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기도 했다. 그건 사람이란 기본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었다.

질끈.

“아, 안 돼…….”

결국 이시우가 자신도 모르게 거울 앞에서 눈을 감아버리자. 사쿠라는 무엇이 그리 기쁜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이시우를 달래주었다.

“그러지 말고! 한 번 봐~ 충격 받을 정도로 변하진 않았어.”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용기 덕분일까. 아니면 어떻게든 자신을 달래주던 사쿠라의 응원 덕분일까.

슬쩍-

이시우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질끈 감았던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불투명한 유리처럼 희미해진 이미지가 점점 명확해지고.

“아, 아아…….”

너무나도 또렷해졌을 때.

당혹감.

부끄러움.

그 외에도 온갖 감정에 휩싸인 이시우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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