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신유성에게 청소기를 빌린 걸 잊고 아예 본국인 호주까지 갔다가 외박을 끝내고 돌아온 레니아.
“으악, 미안! 나는 진짜 가져다준 줄 알았지 뭐야? 믿기지 않아 내가 이런 잔악무도하고 끔찍한 실수를 하다니…….”
용서를 구하겠다며 몸을 90도로 접어 머리를 숙인 레니아를 보며 신유성은 걱정부터 됐다. 정말 저러다 땅에 머리라도 닿는 게 아닐까.
“아니,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사실 내가 아니라 스미레가 찾아주기도 했고…….”
“뭐 정말!? 안 되겠다! 스미레한테도 사과하지 않으면…….”
신유성은 당장 스미레를 만나겠다며 부실로 들어오려는 레니아를 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스미레는 아델라랑 벨벳이랑 같이 장보러갔어.”
“우으- 그렇구나…… 아! 그럼!”
레니아는 무언가 떠오른 듯 포켓에서 네모난 박스를 하나 꺼냈다.
“이거라도 받아줘! 우리 어머니 공장에서 만드는 건데 이거 진짜 귀한 거야! 맛도 있고!”
레니아가 꺼낸 건 귀중한 포장지에 담긴 초콜릿. 그러나 평범한 초콜릿은 아닌 듯 술병처럼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무슨, 병처럼 특이하게 생겼는데 먹는 거야?”
곧바로 신유성이 관심을 보이자 레니아는 헤헤- 하고 뿌듯하게 웃어주었다.
“역시 너도 이건 관심이 있구나? 이거 그냥 초콜릿이야. 원래는 초콜릿 안에 위스키가 담겨 있어야 하는데 학생이 그런 걸 먹어도 될 리가 없으니까~”
“거의 논 알코올! 깔루아가 아주 쪼그으으음~ 들어가서 향만 첨가된 거야. 걱정 마! 개미가 아닌 이상 이거 먹고 안 취해~”
레니아가 내민 건 아무리 특이해도 기본적으로 달콤한 디저트. 신유성이 그런 선물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트레이닝 룸에서 훈련을 끝내고 먹으면 되겠지.’
신유성은 처음 맛보는 디저트에 큰 기대를 품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 * *
이번 벨벳 구출 작전의 주역.
김은아는 부실에 오는 것치고는 한껏 꾸민 채였다.
“유성아~ 내가 한다면 한다고 그랬지!?”
함께 작전을 진행했던 파티원들에게 칭찬을 들어서인지 김은아는 한눈에 봐도 뿌듯함과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었다.
그리고 김은아의 활약을 생각했을 때 그건 백분 사실이었다. 김은아는 헌터 협회가 아플 만한 부분을 캐치하고 파고들어 순식간에 원하는 바를 쟁취했다. 신유성에게도 대단하다며 칭찬을 받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
“뭐야, 너 씻고 있어?”
그러나 신유성은 보이지 않았다.
샤워실의 문을 두드려도 아무 반응도 없고 주방에서 벨벳의 방까지 모두 뒤졌지만 신유성은 보이지 않았다.
“얘 어디 있어? 레니아가 부실에 있다고 그랬는데…….”
도대체 얼마나 바쁘기에 이렇게나 얼굴 보기가 힘든 걸까? 아침부터 색다르게 머리를 묶고 평소보다 힘을 잔뜩 줬지만 오늘도 허탕을 쳤다는 생각에 김은아는 허탈함에 힘이 빠졌다.
푸욱-
결국 소파 위에 앉은 김은아는 테이블 위에 놓인 초콜릿을 보았다. 이런 흔적을 보면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신유성은 부실에 있었던 게 분명했다.
“에휴…… 참 얼굴 보기 힘들다.”
얼마나 바쁘기에 그 잠깐 사이에 또 사라진 걸까? 김은아는 못마땅한 얼굴로 포장을 뜯어 초콜릿을 입안에 하나 집어넣었다.
으적으적-
초콜릿을 거칠게 씹자 입안에 퍼지는 알싸한 맛과 묘한 향기. 김은아는 초콜릿이 마음에 들었는지 의외라는 얼굴로 다시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뭐야. 이거 맛있네.”
* * *
신유성이 부실에 돌아오자마자 보게 된 건.
빼꼼.
귀여운 자세로 소파 위로 얼굴을 내민 김은아였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오늘따라 왜 저렇게 얼굴이 붉은 걸까?
김은아는 손바닥을 팔랑팔랑- 세차게 흔들며 신유성을 불렀다.
“유성아아! 여기! 여기이…….”
애교가 잔뜩 섞인 목소리로 다급히 신유성을 부른 김은아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김은아의 옆으로 온 신유성은 마른 침을 삼키며 테이블을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절반 이상이 사라져 버린 초콜릿.
신유성이 그렇게 한참이나 테이블을 바라보자.
“안대.”
김은아는 신유성의 볼을 양 손바닥으로 눌러 자신을 보도록 고정했다.
“저거 왜 봐…… 초콜릿이 나보다 예뻐?”
부실의 문을 열기 전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양 볼을 붙잡힌 채로 이렇게 가까이서 김은아의 얼굴을 보게 되다니.
“나 머리도 새로 했다? 예쁘게 묶었어……. 딸꾹…….”
김은아는 어쩐지 졸려 보이는 눈으로 딸꾹질을 하더니 신유성에게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 예뻐?”
감히 이런 분위기에서 김은아의 면전에다 대고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까. 그건 목숨이 10개라도 할 수 없었다.
“으응, 예뻐 은아야…….”
결국 당황한 표정으로 신유성이 답했지만. 김은아는 신유성의 말에 눈망울까지 커지며 정말로 감동한 눈치였다.
“지……, 진짜?”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며 눈을 빛내는 김은아. 신유성은 이전의 경험으로 취한 김은아가 어떤 상대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정말이야.”
당연히 신유성이 한 답변은 너무나도 명쾌한 정답이었다.
“그치이? 헤…… 내가 얼마나 예쁜데……. 그치이~ 유성아?”
그 증거로 평소보다 애교가 몇백 배는 증가한 김은아는 팔짱을 끼고 몸을 밀어붙였다.
“나 어제 진짜 고생했어…… 그리구우우…… 너 돌아오면 칭찬 받으려구우, 계속 기다렸다아? 근데 유성이 어제 왜 안 와써……. 나 너무 슬펐어. 서운해…….”
중간중간 딸꾹- 딸꾹- 거리면서도 잘도 말을 하는 김은아.
‘이상하다. 레니아가 절대 취할 일은 없다고 했는데…….’
물론 김은아는 전통 티라미수를 먹고 취한 전적이 있었으니 초콜릿을 먹고 취했다고 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델라에게 들었어! 정말 대단해 은아야.”
이젠 완전 신유성의 품에 안겨든 김은아는 슬며시 올려다보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왜 나는 머리 안 쓰다듬어 줘? 스미레한테는 해줬으면서……. 딸꾹…… 서운해…….”
평소에는 몰랐지만 김은아는 칭찬과 머리 쓰다듬기가 세트라고 생각하는 걸까?
신유성은 머리를 쓰다듬으면 김은아가 애써 정리한 머리카락이 헝클어져서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너 스미레한테는 바닐라 냄새 좋다고 그랬다며. 우으…… 그래서 나도 똑같은 거 썼는데…… 나한테는 말 안 해주고…….”
말문이 트인 김은아는 서운했던 점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탑에서도…… 나느은…… 요리 못 하는데 스미레는 요리 잘하고…… 다 맛있고…… 크고…….”
김은아의 귀여운 투정이 계속되자 신유성은 일단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취한 김은아를 상대로는 무조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상책이었다.
하지만.
슬쩍.
김은아가 손을 뻗어 초콜릿을 하나 더 집어 먹으려고 하자 신유성은 결국 말릴 수밖에 없었다.
“은아야? 이미 초콜릿에 취한 거 같은데…….”
신유성이 느릿한 김은아의 초콜릿을 뺏어 들자.
“초콜릿 먹고 취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내 초콜릿 돌려죠오…….”
김은아는 와앙- 하고 신유성의 손을 잡아먹으려고 했다.
“……우어이손 맛읻다.(유성이 손 맛있다.)”
장난기로 가득 찬 김은아는 신유성과 눈을 마주치고 헤에- 하고 웃었다.
“그래도 너랑 둘이 있으니까 기분 좋아……. ……너도 좋아?”
어쩐지 아까보다 진지해진 김은아의 목소리. 확실히 김은아는 탑에서 신유성과 함께였지만 자신만 동떨어진 기분에 외로움이 컸었다.
특히나 자신보다도 훨씬 활약하는 스미레를 보며 부럽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지금의 행동은 그런 내면의 표출.
‘이건 은아가 약해졌을 때만 보여줄 수 있는 솔직함이 아닐까.’
아무래도 김은아는 취한 순간만큼은 내면의 솔직한 감정이 부끄러움이나 체면을 이겨버리는 모양이었다.
“정말 좋아.”
그래도 솔직해진 보람은 있었다.
신유성의 답변에 김은아의 표정은 만족 중의 대만족.
“헤…… 유성아……. 나도 너처럼 강해질게 너만 열심히 하면…… 힘드니까. 나도 강해져서…… 딸꾹! 무슨 말인지 알지이~?”
신유성은 김은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웃고 말았다.
“응, 알아.”
김은아는 대체 무슨 말을 아냐고 하는 걸까? 그런데 왜 자신은 정말 이미 알고 있는 걸까?
“……응. 똑똑하네! 그러니까, 너희도 너희만 알고 있진 마. 우리느은~ 같이 해결해야 해. 알지?”
마치 김은아는 신유성의 걱정을 아는 듯 말했다.
“너랑. 벨벳이랑……. 우리 모두는 가족이니까. 그지?”
사실 어리광을 부렸을 뿐 신유성이 벨벳이 돌아온 그 중요한 날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김은아는 얼핏 알고 있었다.
신유성은 이미 자신들에게조차 말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고민이 많다는 걸.
“……나도 계속 기다려 주고 싶지만. 그래도 힘들어……. 네가 고민하는 걸 보는 게 힘들어……. 그리고 서운해. 무슨 말인지 알지?”
아무리 취한 김은아라도.
이번만큼은 취한 사람의 말이 아니었다. 이건 그저 김은아의 내면에 담긴 진솔한 이야기일 뿐.
“은아야…….”
쓰다듬던 손을 멈춘 신유성이 지그시 입을 닫자. 김은아는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신유성에게 물었다.
“나, ……예뻐?”
“……응. 엄청.”
그 말과 함께 신유성이 웃어 보이자 김은아는 만족한 듯 허벅지에 볼을 비비며.
“사랑해. 유성아.”
그제야 낮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