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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5화 (284/434)

제285화

클로는 천천히 흰 장갑을 벗으며 이시우에게 물었다.

“이 남자를 구하는 일이 너희에게 목숨을 걸 만큼의 가치가 있나?”

빌런과 헌터의 전투는 아카데미에서 치르던 대련과 결이 달랐다. 전투의 승자는 패자에게 무엇이든 앗아갈 수 있었다.

“너흰 정말…… 그 무게를 알고 있는 건가?”

설령 그것이 목숨이라도.

탁!

클로는 이성환의 목덜미를 잡아 그대로 벽에 내던져버렸다.

쿠웅!

“커허억!”

몸의 내부가 다쳤는지 이성환이 쿨럭- 피를 토해내자 이시우는 최대한 냉정을 유지하려 애꿎은 어금니를 까득- 물었다.

“너…….”

“목숨만 붙어있다면 저 남자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그 이상의 대우를 바랐나?”

클로는 한쪽 손을 들었다.

오른손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푸른빛의 마나는 6급 헌터를 간단히 뛰어넘는 순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직 학생에 불과한 이시우와 사쿠라가 상대하기엔 너무나 벅찬 상대.

“하지만 너흰 다르지. 자비를 베풀 필요도, 살려둘 필요도 없다.”

클로는 이시우와 사쿠라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자비를 베푸는 것도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불러올 미래를 알아두라는 경고였다.

“……다시 묻지.”

이 모든 과정과 결과를 알고도 똑같은 해답을 내릴 수 있는가? 그런 결단력이 학생에 불과한 풋내기들이 가지고 있는가?

“너희에게 저 남자를 구하는 일이 정말 목숨을 걸만큼 가치가 있나?”

그러나 클로의 경고에도 이시우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게 누구라도 달라질 건 없어.”

탕-!

이시우가 탄환을 쐈다.

그러나 총알의 각도는 클로를 노린 게 아니었다. 탄환의 탄착점은 클로와 한참 떨어진 천장의 센서.

콰직!

탄환이 센서를 부서트리자.

구루루룩- 쿵!

트랩으로 설치된 철문이 내려와 이성환과 클로 사이를 가로막았다.

“알고 있어? 메가폴 타워에는 빌런들의 습격을 대비해 다양한 트랩이 숨겨져 있다는 거.”

빙긋 웃는 이시우의 미소에 클로는 여전히 무감하게 답했다.

“……그래서 이런 장난감으로 뭘 할 수 있지?”

“사용하는 사람이 누군지에 따라 뭐든 할 수 있지.”

이시우와 사쿠라는 원거리 공격을 하는 2명의 사수였고 클로는 근접전에서 체술을 사용하는 격투가였다. 이렇게 좁은 통로에서 서로를 마주한다면 움직임이 제한되어 유리해지는 건 사수 쪽이었다.

하지만 이시우의 노림수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그 철문은 좁은 통로에서 번지면 치명적인 독가스나 불 능력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물건이야.”

아무리 강한 능력을 가졌어도 이렇게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을까? 메가폴 타워는 총장의 아들인 이시우의 홈그라운드.

“당연히 일반적인 물리력으로는 부술 수도 없고. 빌런들의 스킬에 대비해서 마나로 코팅되어 있어.”

메가폴 타워에서 이시우가 모르는 건 없었다.

“그러니…… 이런 짓도 가능하다는 거야.”

이시우는 탄환을 쏘는 대신.

포켓에서 꺼낸 플라스크 병을 클로 쪽으로 던져버렸다.

“지금이야!”

플라스크 병이 통로의 절반쯤에 걸치자 이시우는 신호를 주었다.

피잉! 쐐액-!

사쿠라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순식간에 자세를 잡아 활을 쐈다.

“간단하지-!”

퍼엉!

공중에서 병이 터지며 흘러나오는 엄청난 양의 연기.

“시우야 저건…….”

놀란 사쿠라가 보랏빛 연기를 보며 묻자 이시우는 권총을 들고 전방을 향해 사격 자세를 취하며 설명을 시작했다.

“와이번 같은 대형몬스터를 포획할 때 쓰는 마취가스야. 피부를 통해 흡수되기 때문에 숨을 참거나 마스크를 써도 통하지 않지.”

이시우가 던진 건 대형 몬스터도 반나절을 꼼짝하지 못할 양이었다.

마나를 사용한 일방적인 공격이 아니기에 헌터들도 당황 할 수밖에 없는 전략.

1초.

2초.

3초.

영원처럼 짧은 시간이 지나고.

활을 겨눈 사쿠라의 손에서 식은땀이 흐를 때 쯤.

촤악-! 펄럭!

무언가가 펼쳐지고 펄럭이는 소리와 함께 폭풍처럼 매서운 바람이 몰아쳤다.

휘이익-!

덕분에 보랏빛 마취가스가 통로를 타고 날아오자 이시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사쿠라-!”

클로가 어떻게 저리 매서운 바람을 일으켰는지는 모르지만 바람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건 사쿠라도 마찬가지.

위이잉-!

사쿠라는 활에 화살이 아닌 바람의 힘을 실어 시위를 놓았다.

파아앙!

귀가 따가울 정도의 파열음과 함께 허공을 질주하는 초록빛 늑대.

“스톰 퍼니셔-!”

사쿠라에게 스톰 퍼니셔는 흔히 헌터들이 성명절기나 피니쉬 무브라 부르는 필살의 스킬이었다. 몸 안에 남아있던 절반의 마나를 화살 삼아 쏜 것이다.

워우으-!

마치 늑대의 울음 같은 바람 소리와 함께 쏘아진 사쿠라의 화살은 유성처럼 초록빛 마나를 늘어트리며 물결을 일으켰다.

화아악-!

바람과 바람.

서로를 향해 가스를 날리기 위한 힘 싸움.

펄럭-!

하지만 보랏빛 가스 속에서 다시 무언가가 힘차게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유지되던 힘의 균형은 완벽하게 깨져버렸다.

화아악!

이시우와 사쿠라를 향해 날아오는 보랏빛 가스.

“시우야!”

“사쿠라-!”

이시우와 사쿠라는 마나 배리어를 펼치며 서로를 지키려했지만 매섭게 몰아친 바람 앞에선 의미 없는 일이었다.

“큭, 쿨럭-!”

이시우가 사용한 건 대형 몬스터에게 사용하는 마취가스로 인간 정도의 크기라면 한 줌만 흡수해도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시우야. 나…….”

사쿠라는 몸이 뻣뻣하게 굳고 졸린 듯 감겨오는 눈을 비몽사몽한 표정으로 시우를 불렀다.

“사쿠라…….”

그리고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건 이시우도 마찬가지. 결국 이시우가 천천히 정신을 잃자.

저벅저벅.

모든 상황을 끝낸 클로는 천천히 이시우와 사쿠라에게 걸어왔다. 클로의 등에서 뻗어나 있는 건 마치 새처럼 돋아난 거대한 검은색 날개 한 쌍.

클로가 정체불명의 바람을 몰아칠 수 있었던 건 이 거대한 날개 덕분인 모양이었다.

‘……나는 방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시우는 지형지물인 철문을 트랩으로 이용하고 몬스터용 수면가스라는 조커카드를 꺼내들어 클로를 몰아쳤다.

만약 실력이 동등했다면?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유지 되고 클로가 조금 더 수면가스를 들이마셨다면?

‘전략으로는……. 내 패배라고 할 수 있겠군.’

조사를 통해 클로는 이시우가 시티가드의 총장인 이성환의 아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이시우가 이 정도 전략을 가진 채 헌터로서 손꼽히는 실력을 갖추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자신은 물론 네임리스의 앞을 가로막으려 한다면?

스윽-

클로는 손을 들었다.

마나만 실으면 사람의 목뼈를 부서트리는 건 클로에게 간단한 일이었다.

“……선배. 그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하지만 익숙한 누군가의 목소리에 클로는 움직임을 멈췄다. 리벨리온의 빌런인 자신을 선배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부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넌.”

클로는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같이 시간을 보낸 익숙한 사이지만 지난 몇 년의 시간은 두 사람을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만들었다.

“오랜만이네요.”

“……메이린.”

목소리의 주인은 학원도시의 지부장인 메이린이었다.

“나를 막을 생각인가?”

클로는 설령 익숙한 사이라도 손속에 자비를 둘 생각이 없었다. 이제 자신은 헌터가 아닌, 네임리스를 따르기로 한 빌런이었으니까.

“제가 선배를 이길 순 없겠죠. 하지만 알고 계시겠죠? 시간을 끄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는 걸.”

그러나 메이린은 발을 붙잡는 정도로 만족하며 자신의 목숨을 던져버릴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그 아이들을 놓아주시죠. 그렇게만 해준다면 당신을 막지 않겠습니다.”

“지금 빌런인 나에게 부탁을 하는 건가?”

손날을 이시우의 목에 겨눈 클로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메이린은 결의를 다진 굳은 얼굴로 단언했다.

“거래입니다.”

“내 시간을 아끼는 대가로 피라미 2명을 놓아주라 이 말인가?”

차악-

클로가 등에서 펼친 검은색 날개를 접고 길을 떠나자. 메이린은 다급하게 이시우와 사쿠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새액. 새액.

거칠게 숨을 몰아쉬지만 이시우와 사쿠라는 생명에 문제가 있진 않아 보였다.

“……후우.”

안도한 듯 한숨을 뱉은 메이린은 용감한 건지, 무모한 건지 모를 두 사람에게 여러의미로 감탄했다.

‘겨우 학생 둘이서 치에 선배를 궁지에 몰아붙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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