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신유성은 홀로 부실에 있는 서고를 둘러보았다.
[재투자를 위한 경제학!]
[경제로 보는 던전 탐구]
[몬스터를 알자! - 드래곤 편]
서고에 꽂힌 두꺼운 책을 보며 신유성은 멋쩍게 웃었다.
‘……정말 벨벳이 이런 책을 읽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벨벳은 동화책에는 관심도 없는지 꺼낸 흔적조차 없었다. 아무리 지식을 탐구하는 게 드래곤의 타고난 특성이라지만 이건 똑똑해도 너무 똑똑했다.
[캬향~ 벨벳은 천재야!]
양손에 치킨을 쥐고 웃는 벨벳을 떠올리자 신유성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계속 이 평화로운 삶이 유지되면 좋을 텐데.’
그러나 신유성은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건 언제나 강한 자의 몫이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신하윤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도 막아 내는 것도 모두 불가능했다. 그러니 신유성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강해지는 것.’
아무리 신유성이라도 자신의 누나인 신하윤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수는 없었다. 신하윤의 한계 같은 건 아직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신하윤이 감춘 ‘비밀’의 크기 정도는 서서히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다.
‘정말 마녀의 힘을 깨우는 게 목표라면…….’
만약 성공한다면 그건 헌터 역사상 최초의 사례였다. 사령술사인 스미레가 라플라스의 편린을 얻은 것과 염동력을 사용하는 신하윤이 몽환의 마녀인 모르간의 힘을 흡수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었다.
‘위험도는 예상할 수도 없어.’
그러니 위협이 닥쳤을 때 이 평화를 지키려면 신유성은 지금 강해져야만 했다.
‘탑은 오르는 건, 강해지기 위해 가장 빠른 길.’
신유성은 책상에 앉았다.
최근 스미레는 사령술사의 힘을 각성해 본 드래곤과 계약을 했고, 김은아는 빠른 속도로 체력과 명중률이라는 단점들을 극복하고 있었다.
‘거기다 아델라마저 파티에 합류했으니까.’
탑에 도전을 한다면 지금이 적기.
[탑의 30층을 돌파 하여라. 지금 너와 동료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게다.]
거기다 유원학이 말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라도 신유성은 탑에 올라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모두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계획을 앞당기면 앞당길수록 위험도는 높아진다.’
신유성은 아무리 이유가 충분하더라도 자신의 욕심으로 파티원을 위험에 빠트리는 선택은 하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힘을.
소중한 것을 잃으면서 얻을 이유는 무엇도 없었다.
‘……어떤 선택이 옳은 걸까.’
책상에 앉은 신유성의 고민이 깊어져가는 그 순간.
똑똑.
조심스러운 노크와 함께 방문 너머에서 스미레가 물었다.
“유성 씨? 들어가도 될까요?”
“응. 들어와.”
신유성의 허락에 그제야 방문을 연 스미레는 토끼 모양으로 깎은 사과를 접시에 담아 책상 위에 올렸다.
“오늘 산 사과인데 무척 달아서요…….”
그렇게 말을 하며 멋쩍게 볼을 긁적이는 스미레를 보자. 신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고마워.”
신유성의 자상한 미소 속에서도 무언가를 느꼈는지 스미레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으세요?”
스미레는 역시 이런 부분에선 예리했다. 절대 미소 정도로 넘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아니야. 그냥 좀 생각이 깊어졌을 뿐이야. 파티장의 결정은 곧 모두의 미래를 결정하는 일이니까.”
결국 신유성은 스미레가 걱정하지 않도록 최대한 괜찮다는 어투로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 결정은 원래 어려운 일이니까. ……벨벳은?”
이건 신유성 나름의 배려.
“아델라 씨와 자고 있어요.”
스미레는 그 마음을 알고 있는지 더 이상 신유성에게 묻지 않았다. 대신 의자를 가져와 신유성의 옆에 앉을 뿐이었다.
콕-
그리곤 포크로 사과를 집어 신유성에게 먹여주는 스미레. 신유성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걸 아기 새처럼 잘도 받아먹었다.
하나.
둘.
셋.
접시 위의 사과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입안에 달콤한 과즙이 흘러넘치자 신유성은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 걸 느꼈다.
“정말 달콤하네.”
“……후후, 이제야 정말로 웃으시네요.”
스미레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틀자 깔끔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움직임을 따라 찰랑였다.
“만약 고민이 있으시다면…… 모두 함께 결정하는 건 어떨까요?”
스미레는 이런 결정의 순간까지 신유성의 부담을 덜어주려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신유성을 위한 스미레의 행동은 헌신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야말로 신유성에게 스미레는 어느 순간에도 자신을 믿어주는 내 편. 피를 나눈 가족보다 더 가족에 부합하는 존재였다.
“응. 고려해볼게.”
스미레는 한결 걱정이 사라진 신유성을 보자 그제야 마음이 놓인 듯 다시 포크를 집었다.
“아 그런데……. 은아 씨는 유성 씨와 같이 나가신 거 아니었나요?”
포크로 사과를 먹여주며 스미레가 뒤늦게 묻자 우물거리던 사과를 삼킨 신유성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응…… 동물원에서 무슨 일 있었거든.”
신유성이 김은아와 애니멀 파크에서 벌인 일이라곤 ‘키스’ 하나밖에 없었다.
“헉,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놀란 스미레가 눈이 커지며 묻자 이번에도 신유성은 너무나 담담하게 말했다.
“아, 궁금해?”
아무래도 신유성은 스미레의 앞에서 그 모든 일을 털어놓을 모양이었다.
* * *
훌쩍- 훌쩍-
눈물을 닦던 사쿠라는 다행이라는 이야기만 중얼거렸다.
“솔직히. 조금은…… 훌쩍, 내가 싫어진 줄 알고…….”
언제나 능글 맞게 웃는 모습만 보여주었던 사쿠라가 계속 눈물을 훌쩍이자 이시우는 말 못할 죄책감이 밀려왔다.
자신은 사쿠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대체 얼마나 큰 마음고생을 시킨 걸까?
“그럴 리 없잖아……. 내가 갑자기 널 왜 싫어하냐?”
“훌쩍…… 솔직히 그건 그렇지. 이렇게 적극적이고 착하고 예쁜데다 요리도 잘하는데……. 나를 싫어하는 남자가 있다면 그건 말이 안 되는 일이야…….”
상태가 좀 나아졌는지 한술 더 뜨는 사쿠라를 보며 이시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좀 괜찮아졌나…….’
하지만 그 생각을 하기 무섭게 사쿠라는 이시우를 벽으로 밀쳐 매섭게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쿵!
“그래서…… 솔직히 말해 시우 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사쿠라는 이시우를 양팔로 가둔 채 정면에서 노려보았다. 눈까지 가늘게 뜨고 죽일 듯 바라보자 이시우는 부담스러웠는지 결국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냥……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어. 나랑 있으면 귀찮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도장에도 너한테도.”
사쿠라는 이시우의 말에 화가 난 듯 더욱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걸 변명이라고 해? 결혼도 할 사이인데 무슨 일이 있든 그 정도는 함께 헤쳐 나가야지!”
“아니 또 이게 뭔 소리야! 갑자기 결혼은!”
이시우가 식겁한 표정으로 닫힌 문을 열어 주변을 살피자 사쿠라는 오히려 자기가 더욱 충격 받은 표정을 지었다.
“……설마, 너, 나랑 결혼 안 할 생각이었어?”
“아니 우린 아직 학생인데…….”
“졸업하고 바로 안 해!?”
사쿠라는 가늘게 뜨던 눈을 오히려 과장되게 크게 떴다.
“아, 아니 내 말은 벌써부터 그런 걸 생각해야 하냐 이 말이지…….”
결국 당황한 이시우가 말까지 더듬자 사쿠라는 오히려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내가 만든 아침밥도 먹었는데?”
“밥 먹은 게 별거야?”
아침밥을 먹었으니 급해도 너무 급한 사쿠라의 계획에 이시우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아빠가 너한테 도장도 준다고 했어.”
“나한테는 과분해. 나는 그런 걸 운영할 정도로 성실하지 못해.
하지만 이시우의 반응이 재밌는지 사쿠라는 포기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하지만 같이 잠도 잤는데!?”
“그건 그냥 너무 늦어서 자고 간 거잖아! 그것도 마루에서!”
“어머, 당연히 마루지~ 우린 아직 학생인 걸…….”
페이스에 말려들긴 했지만 쿄쿄쿄- 웃는 사쿠라를 보니 이시우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다음부턴 그러자.”
“응, 뭘?”
“함께 헤쳐나가자고.”
“결혼 하자는 줄 알았네.”
끝까지 장난을 친 사쿠라는 다시 꽈악 이시우를 안아주었다.
“다시 돌아와서 축하해.”
그러나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
탁-!
마치 정전이 일어난 듯.
전 건물의 불이 꺼졌다.
이건 메가폴 타워에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야 말로 도시 전체에 찾아온 암흑.
“머, 뭐야?”
놀란 사쿠라가 껴안고 있는 팔에 더욱 힘을 주자.
“컥…….”
이시우는 숨이 막혀오는 와중에도 눈에 마나를 부여했다. 투시안과 천리안을 통해 순식간에 넓어지는 시야.
‘이건…….’
건물 밖과 건물 안을 동시에 확인하게 된 이시우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 메가폴 타워의 밖은 마나로 만들어진 푸르고 투명한 벽이 건물을 감싸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해킹하고 이 정도 크기의 결계를 펼쳐?’
이시우가 아는 빌런 중 이런 간이 큰 짓을 할 단체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리벨리온이다.”
“리, 리벨리온?”
놀란 사쿠라가 껴안았던 팔을 풀자 이시우는 사쿠라의 손을 꽉 잡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가자 사쿠라. 이번에는 함께 구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