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77화 (276/434)

제277화

조련사와 범고래가 공연장에 입장하자 박수와 범고래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가 쏟아졌다.

하지만 김은아는 여전히 신유성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김은아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은아야. 그렇게 너무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지금도 충분히 행복해.”

하지만 신유성이 덧붙인 말에 김은아의 무언가가 무너진 건 확실했다. 신유성의 입장에선 김은아를 배려한 말이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유성아 난…….”

무언가를 말하려던 김은아는 말을 멈추고 씁쓸하게 웃었다. 방금 전의 행복했던 순간이 이젠 믿기지 않을 만큼 김은아의 마음은 상처를 입었다.

“……아니지.”

풍덩- 와아아아-

범고래의 묘기와 함께 함성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채우자, 김은아는 한참을 고민하다 생각을 정리하고 선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거 같아.”

이야기를 하는 김은아의 눈시울은 조금씩 붉어지고 있었다. 김은아는 어젯밤부터 잠도 못 이루며 기대를 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유성아, 있지. 나는…… 내가 느끼는 기분을…….”

어쩌면 신유성을 위하는 척 말하고 행동했던 일들이 자신의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널 행복하게 만들고 싶던 게 아니라. 그냥 내가 행복해지고 싶었나봐.”

“은아야…….”

김은아는 검지로 신유성의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난 괜찮아. 위로하지 마. 그냥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어.”

이런 순간에도 김은아는 신유성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뛰었다.

“난 너랑 있으면 이렇게 긴장되고 두근거리는데…… 유성이 넌 아무렇지도 않잖아.”

괜찮은 척 말하지만 김은아는 이미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슬픔인지, 분함인지는 알 수 없어도 신유성의 거절에 이미 김은아의 마음은 꺾여버렸다.

“……으.”

이젠 공연이 문제가 아니었다.

김은아는 더 이상 신유성을 마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줄곧 둔할 뿐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어쩌면 이건 자신만의 짝사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냥 욕심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평범한 파티원으로.

친구로.

그렇게 지내자.

김은아는 계속 자신을 토닥이며 합리화를 했지만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뚝. 뚝.

결국 다시 얼굴에서 눈물이 흐르자 김은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오늘은 이만 돌아갈래.”

자신의 어떤 말이 김은아에게 상처 줬는지 모르기에 신유성은 차마 울면서 떠나는 김은아를 붙잡지 못했다.

결국 공연장을 걸어 나가며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는 김은아.

[난 너랑 있으면 이렇게 긴장되고 두근거리는데…… 유성이 넌 아무렇지도 않잖아.]

계속해서 자신의 주변을 맴도는 김은아의 말. 그렇게 한참을 신유성이 김은아의 말을 되새기며 고민하고 있을 때.

터벅- 터벅- 턱.

어디서 나타났는지 이수현은 어느 때보다 화가 난 얼굴로 신유성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안 따라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처럼 이수현은 김은아의 편이었다.

물론 김석한이 내린 명령처럼 이수현은 그저 멀리서 지켜볼 뿐 둘의 연애 사정에 끼어드는 건 주제넘은 일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곁에서 김은아의 마음을 지켜본 이수현은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쫓아간다고 바뀌는 게 있을까?

만약 자신이 어딘가 망가져 있는 게 사실이고, 그런 자신의 행동으로 김은아만 상처받는 것이라면 어쩌면 상황을 이대로 두는 것이 정답일 수도 있었다.

김은아가 자신에게 바라는 감정은 신유성에겐 꽤 어려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신유성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자신을 바라보는 이수현을 내려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따라갈 겁니다.”

그 행동이 복잡한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신유성은 그저.

“은아를 혼자 두고 싶지 않아요.”

울고 있는 김은아를 절대로 혼자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

언젠가 분명 한 적 있는 맹세였다.

신유성은 알고 있었다.

도시의 사람들과 동떨어진 채, 성과 같은 저택에서 쓸쓸이 홀로 김은아가 바라본 풍경을 알고 있었다. 왜 자신에게 그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의지하던 가족을 잃고 홀로 삼킨 김은아의 눈물도 알고 있었다.

왜인지는 명확히 말 할 수 없지만 신유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울고 있는 김은아를 혼자 둘 수 없었다.

‘문제는….’

경기장을 빠져나온 신유성에게는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애니멀 가든에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다.

이렇게나 넓은 장소를 빽빽하게 가득 채운 인파 속에선 신유성조차 김은아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김은아는 분명 자신의 가까이에 있었다.

‘……은아가 갈 만한 곳.’

김은아는 한 번 울음이 터지면 좀처럼 멈추지 않는 울보지만. 그런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진 않았다.

김은아가 원하는 건 원하는 만큼 울 수 있을 정도로 조용하면서도 남에게 자신이 이상하게 보이진 않을 장소.

‘알겠다.’

결정을 내린 신유성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     *      *

김은아는 거대한 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호수를 바라보았다.

거대한 비취빛 잉어.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모여 빵조각 따위의 먹이를 주며 행복하게 웃는 사람들.

훌쩍.

모두가 행복한 이 장소에서 청승맞게 훌쩍이는 건 김은아뿐이었다. 거기다 그렇게나 기대했던 데이트를 스스로 망쳐버리다니.

분명 최고의 날이 될 거라고 생각했건만 최악의 날이 되어버렸다.

‘그치만…….’

김은아는 훌쩍이던 눈가를 닦아내고서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 녀석 앞에서 울고 싶진 않아.’

그래서야 정말 신유성에게 차인 것 같았다. 자신은 그저 같이 ‘가족’이 되지 않을래? 하고 제안했을 뿐이고, 신유성은 아직 괜찮다는 식으로 말한 거니 따지고 보면 아직 차인 건 아니지 않을까?

‘억울해.’

왜 하필 자신이 좋아하게 된 사람이 신유성일까. 이성에 대해선 저렇게나 둔하고, 자신의 감정 같은 건 하나도 알아주지도 않는 녀석인 걸까.

김은아는 지금까지 원하는 건 뭐든지 가져왔지만 정작 가장 가지고 싶은 건 좀처럼 가질 수가 없었다.

훌쩍.

김은아는 자신이 매고 온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신유성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한참을 고민한 머리였지만 이젠 의미가 없었다. 예쁘게 리본을 매고 홀로 쓸쓸히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훌쩍.

막상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김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신유성을 걱정했다.

훌쩍.

‘그 녀석. 나 찾다가 길 잃으면 어쩌지.’

산에서는 잘만 길을 찾으면서 도심에선 은근히 길치인 게 신기했다. 코앞에서 길을 잃고 건물들만으로는 좀처럼 방향을 파악할 수 없다느니 간판의 모양이 똑같다느니 알 수 없는 이야기만 했다.

훌쩍.

하지만 신유성은 김은아의 걱정처럼 길치는 아닌 모양이었다.

저벅저벅.

신유성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고, 길을 잃지도 않았다. 훌쩍이는 김은아의 옆에 다가와 다행이라는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찾았다.”

“……윽.”

하지만 그럼에도 김은아는 대답을 하지 않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어 숨겼다.

신유성이 자신을 찾아온 게 솔직히 기뻤지만 그렇게 말을 하고 도망친 마당에 기쁨을 드러낼 순 없었다.

“……어떻게 찾았어.”

그렇기에 이렇게 드레스에 표정을 숨기고 먹먹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게 김은아의 최선.

“은아라면 여기 있을 거 같았어.”

신유성의 말에 김은아는 기쁜 마음과 서운함이 함께 들었다. 신유성은 왜 김은아 자신에 대해 이렇게나 잘 알면서, 자신이 신유성에게 가진 이 애타는 감정만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걸까.

스윽.

김은아는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찾아준 것에 대한 약간의 기쁨. 우는 모습을 들켜버린 창피함. 헤어지자마자 만나버린 것에 대한 민망함에 김은아는 퉁명한 목소리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 왜 찾았는데.”

하지만 이렇게나 삐져버리고 토라져 버린 김은아에게 신유성의 존재와 행동은 반칙과 같았다.

“당장이라도 너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신유성은 기다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김은아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려주었다.

“분명 은아 네가 느낀 감정은. 너만 느낀 건 아닐 거야.”

신유성은 김은아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던 때 같은 장소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안 떠나. 말했잖아. 나도 파티가 좋다고. 그러니까, 좀…… 그런 표정 하지 마.]

김은아의 손을 꽉- 부여잡은 자신을 김은아는 위로해주었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더욱 뚜렷하게 느껴지던 서로의 온기.

김은아는 마치 자신의 감정을 읽은 듯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랑 같은 기분인 거야.]

우리는 서로 같은 기분이라고.

신유성의 예리한 오감은 그 순간에 느꼈던 심장의 두근거림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증거로.

“……물론 너랑 있으면 긴장이 되는 게 아니라 무척 편안하고 행복하지만.”

신유성은 김은아의 손을 자신의 심장에 가져다대어 두근거리는 박동을 느끼게 해주었다.

툭-

다른 팔은 여전히 무릎을 껴안은 채, 한쪽 팔만 신유성의 가슴에 가져다 댄 우스꽝스러운 모습.

김은아는 그걸로 만족한 건지 자세를 풀고 신유성의 눈을 바라보았다.

민망함조차 그의 얼굴을 한참이나 정면에서 바라보았다.

두근- 두근-

“쫌, 빨리. 뛰긴 하네.”

분명 자신을 바라보며 빠르게 뛰는 이 심장의 박동은 거짓말은 아니겠지. 설령 형태는 다를지라도 분명…….

콱-

김은아는 심장에 올려 뒀던 손으로 신유성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근데 아직은 모자라.”

그래.

김은아는 신유성이 기다리기만 해선 좀처럼 다가오지 않을 녀석이라는 걸 잘 알았다.

‘그러니…….’

김은아는 신유성의 자신을 향해 신유성을 잡아끌었다.

툭-

서로 맞닿은 입술.

“웁-”

놀라서 눈이 커진 신유성과 결심을 끝냈는지 너무나 결연한 표정의 김은아.

그렇게 용기를 내어 신유성의 첫 입맞춤을 훔친 김은아는 좀처럼 입술을 떼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