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2화
가온 아카데미도 학생들로 북적였지만 번화가인 학원 도시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학생들의 시끄러운 대화 소리와 빠르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로 가득 찬 영화관의 앞.
“……어, 왔네?”
김은아는 벽에 기댄 채 지루한 듯 단화를 신은 발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김은아가 신유성에게 멋쩍게 행동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흰색 티와 검정 단색 원피스.
평소와 달리 한 줄로 땋은 머리카락은 단아하지만 잔뜩 멋을 부린 모습이었다.
“그, 길 잃으면 어쩌나 걱정했더니……. 용케 잘도 찾아 왔다?”
다리를 베베- 꼬며 슬쩍 시선을 올려 눈치를 보는 김은아.
“응.”
신유성은 그런 김은아를 내려다보더니 미소를 지어주었다.
“은아는 그 머리도 정말 잘 어울리네.”
결국 김은아는 윽- 하고 표정이 붉어졌다. 눈치가 없어 보이면서도 신유성은 이렇게 훅 들어오는 순간이 있었다.
“내, 내가 했는데, 당연하지…….”
“맞아. 은아한테는 뭐든 잘 어울려.”
그렇지- 라며 신유성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김은아는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아무래도 신유성의 칭찬은 완벽하게 정답인 모양이었다.
“됐고! 그럼 시작하기 전에 빨리 가자!”
신유성의 칭찬으로 어깨가 치켜 올라간 김은아는 음료와 팝콘을 주문하면서도 신유성에게 집요하게 물었다.
“근데 어느 게 제일 잘 어울려? 머리? 아니면 옷? 이번에는 평소랑 좀 다른 느낌이긴 한데…….”
신유성은 다시 김은아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이수현과 달리 신유성은 패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고, 풀어서 말하는 재주는 더더욱 없었다.
“그냥 잘 어울려. 오늘도 엄청 예쁜 거 같아.”
그러나 정석적인 칭찬은 어느 상황에나 통하는 법. 음료와 간식이 준비되는 내내 하늘로 올라간 김은아의 입꼬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 그래? 그럼 이거도 볼래? 나 한쪽에 귀걸이도 했는데…….”
머리카락을 넘겨 귀를 드러내고 다른 한 손은 원피스를 꼼지락꼼지락 만지는 김은아.
슥-
김은아는 괜히 원피스를 괴롭히며 방황하던 손을 올리며 신유성에게 말했다.
“이, 이것도! 요새 바빠서 소홀했더니 손이 거친 거 같아서 이번에 집에 간 김에 관리받았다?”
빨리 만져보라며 김은아가 손을 내밀자 신유성은 순순히 손을 잡아 주었다.
역시 자랑스럽게 내민 만큼 촉촉하고 부드러운 김은아의 손.
만지작. 만지작.
“그러네.”
신유성은 이젠 아예 감탄을 하며 양손으로 김은아의 손을 만졌다.
“확실히 달라.”
어린 시절부터 나무와 바위를 박살 내며 수련을 한 신유성의 단단한 손과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부드러운 촉감에 심취한 신유성이 너무나 진지하게 김은아의 손을 만지작거리는 광경은 멀리서 보면 우스운 느낌이었다.
“읏, 그건 쫌, 간지러운데…….”
간지러움에 숨을 참은 김은아는 점점 얼굴이 붉어질지언정 신유성의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 다 됐습니다.
직원이 준비한 음료와 팝콘을 내밀고 나서야 그제야 손을 떨어트리는 신유성과 김은아.
“그, 그럼 가자!”
김은아는 그제야 이 상황에 민망함을 느꼈는지 팝콘과 음료를 챙겨 빠르게 엘리베이터 앞으로 걸어갔다.
* * *
언령(言靈)
어느 차원 어느 국가든 말에는 힘이 담겨 있다는 신앙이 많았다. 드래곤들의 언약과 용언도 같은 부류의 힘이었다.
‘현역 때만 해도 이 특성으로 종횡무진 위험한 장소를 누볐지.’
빌런들의 아지트에 침입하는 한편, 불법 밀렵 단체를 체포하기 위해 잠입을 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젊은 나이에 이 정도 커리어를 가진 이수현은 그야말로 모든 길드가 탐내던 초 엘리트 헌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수현의 업무는 어떠한가?
[그냥 같이 따라만 갔다가 와.]
[가드들도 없이 번화가에 갔다가 우리 은아한테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김은아라면 껌뻑 죽는 김석한의 명령 덕분에 오늘 이수현의 업무는 김은아의 호위였다.
‘하지만…… 아가씨한테 들키지 않아야 한다.’
착!
날렵하게 벽 뒤에 숨고.
스윽-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우며.
이수현은 김은아와 신유성의 곁을 배회했다.
“여기가 영화관이구나.”
“저기~ 우리 자리 있다!”
달달한 분위기를 풍기며 영화관에 들어가는 둘을 보며 이수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주 꿀이 떨어지겠네. 난 마지막으로 연애한 게 언제더라…….’
하지만 슬픔도 잠시, 싱글싱글 웃는 남자 직원의 미소에 이수현은 흐뭇하게 웃었다.
“네 포켓을 통해 예약하신 자리를 체크하겠습니다.”
“그럼요~ 여기!”
하지만 흐뭇하게 웃고 있던 이수현은 친절한 직원에게 벼락같은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아 예약하신 관람관은 바로 옆에 있는 곳입니다!”
“……어?”
김은아가 예약한 곳은 A-1관.
이수현이 예약한 곳은 A-2관.
상황을 직시한 이수현은 후우- 하고 긴 한숨을 쉬더니 선글라스를 벗으며 직원에게 말했다.
“나랑 교대합시다.”
사아아-!
이수현의 특성인 언령(言霊).
물론 이건 사용하기 위해선 제한이 수도 없이 많은 스킬이었다.
하지만 제약에 걸려도 일반인에게서 유니폼을 받아 업무 교대를 하는 정도는 이수현에게 일도 아니었다.
“아, 교대. 그렇지. 근데 어, 이렇게 일찍?”
이상함을 느낀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수현은 능숙하게 연기했다.
“잊으신 거예요? 오늘 몸이 안 좋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나? 그래. 덕분에 고마워. 일찍 가서 쉬지 뭐.”
일찍 퇴근하게 되었다며 이수현에게 감사를 표하며 멀어지는 영화관의 직원.
“……이런 곳에서 내 능력을 쓸 줄이야.”
스윽- 슥-
화장실에서 유니폼을 갈아입으며 이수현은 깊은 회의감을 느끼고 있었다.
* * *
[좋아. 내가 이해할게.]
[지금부터 내가 가르쳐주면 되니까!]
김은아는 무신산에 있느라 세상을 알지 못하는 신유성을 위해 ‘스승’을 자처했다.
그럼 오늘 김은아가 위한 선택한 영화는 과연 무엇일까?
‘당연히 로맨스 영화지.’
김은아가 고른 건 너무나도 달달한 로맨스 영화. 사실 김은아는 데이트를 위해 만반에 준비를 한 탓에 영화의 줄거리도 이미 대강 알고 있었다.
‘짜식. 어떻게 반응하는지 볼까?’
헤실- 하고 웃는 걸 보니 장난기가 잔뜩 돋은 김은아의 표정.
‘이 영화 엄청 슬프다던데.’
아주 어릴 때 툭하면 운다며 가족들에게 울보라고 불렸던 탓일까? 물론 대부분의 일은 김준혁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생각해 보면 김은아는 신유성의 앞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자주 울었다.
‘근데 유성이가 우는 건 본 적이 없어.’
김은아가 옆에서 지켜본 신유성은 냉철해 보여도 의협심도 강했고 화를 낼 땐 화를 내는 등 은근히 감정이 풍부했다.
하지만 신유성이 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보고 싶어.’
그래.
김은아는 지금 신유성이 우는 모습을 정말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그렇기에 고르고 고른 영화가 바로 이번 영화!
쉿.
“……유성아아, 너는 영화관 처음이지?”
김은아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속삭이자.
“……응 영화는 스미레랑 본 적이 있지만. 영화관은 처음이야.”
신유성은 마찬가지로 작게 김은아에게 속삭였다.
“……잘 됐네에. 영화관은 또 완전 달라.”
어두운 스크린의 막이 오르고.
영화가 시작 되자 김은아는 손수 팝콘을 먹여주었다. 이전에 스미레가 포크로 가라아게를 먹여주던 모습이 내심 부러웠던 모양이었다.
‘냉큼냉큼 잘도 받아먹네.’
하지만 김은아가 여유로운 건 아주 잠깐이었다. 영화 속 배우들이 입을 맞추는 장면을 보며 김은아는 어색하게 눈을 흘겼다.
하지만 입을 닫은 신유성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어…….’
김은아에게는 답답함만 쌓였다.
과연 신유성은 저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있을까?
김은아는 궁금했다.
왜 자신은 영화관에서 스크린이 아닌, 신유성만 바라보고 있는 걸까? 하지만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인정하기 싫지만…….’
김은아는 분명 둘 중 더 좋아하는 쪽은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신유성의 말이 일반적인 사랑의 감정과 많이 다르다면.
이건 일방적인 짝사랑일 수도 있었다.
‘난…….’
영화가 무르익고.
여주인공이 병으로 쓰러지며 핑크빛 분위기가 어둡게 물들어가던 그때.
“……아.”
약속한 듯 서로를 바라보며 김은아와 신유성의 눈이 맞았다.
영화에 집중하다 말고 왜 자신을 바라본 걸까?
“……은아야.”
나긋한 목소리와 함께 신유성이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자.
“……응.”
김은아는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일에 치여 여주인공을 등한시하던 주인공.
하지만 뒤늦은 후회와 함께 쓰러진 여주인공에게 입을 맞추고 기적적으로 다시 영원을 맹세하며 입을 맞추는 영화의 줄거리를 보며. 아마 영화관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하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고.
“……뭔지 알아.”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김은아가 준비됐다는 듯 눈을 감자.
“고마워.”
신유성은 감사를 표하며.
스윽- 와작, 와작!
김은아의 팝콘을 집어갔다.
덕분에 석상처럼 굳어 있다 머쓱한 얼굴로 눈을 뜬 김은아는 한참을, 아주 한참을 가만히 신유성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냥. 죽여 버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