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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1화 (270/434)

제271화

마천루의 야경은 은하수라는 말이 어울렸다.

밤하늘처럼 까만 호수 위에 무수하게 많은 도시의 불빛이 수놓은 밤의 풍경은 마치 무수한 별이 반짝이는 새카만 우주와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있어도 웨이린의 입에서 나오는 건 감탄이 아닌 길고 긴 한숨이었다.

“하아…….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고.

어깨에는 턱을 기대고.

웨이린은 마천루의 풍경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갑자기 파티장이 증발했다니. 아니 빌런이 됐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그냥 망했지. 협회에선 우리 파티는 해체하고 다른 곳에다 재편성시킬 생각이래. 어쩌겠어. 협회 말이니 마천루 아카데미도 냉큼 바로 받아들일 거고.”

류진의 충격 발표 덕분에 웨이린과 한설아는 이산가족처럼 공중분해 되게 생겼다.

“더 짜증 나는 건……. 이딴 일을 당했는데도 난 도저히 류진을 미워할 수 없다는 거야.”

감정이 풍부한 웨이린이 갑자기 훌쩍거리자 한설아는 등을 두드려주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걘…… 우리 생각도 안 할 텐데 왜? 설마 또 잘 생겨서는 아니지?”

역시 사이가 안 좋은 척 굴어도 이렇게 달래주는 걸 보면 둘은 같은 파티였다.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맞지……. 근데 너도 봤잖아. 류진과 그분 사이에는 뭔가 있다는 걸. 류진이 괜히 그런 선택을 했겠어? 분명…….”

“씁, 그만!”

한설아는 검지를 내밀며 쉿-! 하고 소리를 내어 웨이린을 제지했다.

전설의 헌터이자 협회장인 검신은 날아다니는 새도 떨어트리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존재.

반면 웨이린과 한설아는 풋내기 학생에 불과했다.

“야…… 미쳤어?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당황한 한설아가 주변을 둘러보며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붉게 물든 웨이린의 눈에는 이미 독기가 맺혀 있었다.

“근데 너도 봤잖아. 무릎까지 꿇은 류진한테 그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하는지.”

한설아는 골치가 아픈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한설아도 웨이린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알겠으니까. 설령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입 밖에는 내지 마.”

“됐어. 어차피 난 떠날 거야. 파티도 박살 난 마당에…….”

팟-

자리에서 일어난 웨이린이 터덜터덜 걸어가자 다시 머리를 헝클인 한설아는 일단 그녀를 따라나섰다.

“가긴 어디로 가는데? 설마 전학 갈 생각이야? 갈 곳이나 있고?”

“왜 없어. 능력 있는 친척한테 빌붙으면 돼.”

“아, 메이린. 그 사람 말이구나? 의외긴 하지만 나름 계획은 있네.”

“난 똑똑해. 그리고 내 머리는 지금 아주 냉정하다고. 난 강해져서 언젠가 류진을 막을 거야. 감옥에 잡아넣어도 내가 잡아넣어야지.”

“그게 파티원으로서의 의리인가? 대단하네. 상대가 류진이라면 분명 단숨에 쪼개질 테지만.”

파티장이 떠나고 해체되어버린 파티.

남겨진 파티원인 한설아와 웨이린은 씁쓸한 공통점을 가진 채 터덜터덜 걸어가며 서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난 어디로 가지….”

“넌 왜 떠나게?”

“그냥 너희들도 다 떠났는데 기분 전환 삼아. 물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어. 가온에선 세븐 넘버에도 못 낄 거 같고…….”

“그럼?”

“몰라~ 쵸텐이나 갈까? 마천루 입학하기 전에 초대장 보냈던데.”

“풉. 이제 와서?”

“마음이 바뀌었다고 하지 뭐~”

“잘도 받아주겠다.”

웨이린이 비웃듯 킥킥- 하고 웃자 한설아는 한결 마음이 놓인 얼굴로 웨이린의 머리를 헝클였다.

“네 걱정이나 해라. 나는 받아줄 곳은 많으니까. 다만…….”

한설아는 아까보다 조용해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잘 적응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지만.”

웨이린은 한설아의 약한 모습에 어어어-? 하면서 유난을 떨었다.

“이것 봐라? 걱정되게 갑자기 왜 약한 척이야.”

“파티가 터진 것만 이걸로 벌써 두 번째야. 어쩌면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럼 나 따라서 한국 가던지.”

“안가.”

“됐고, 그럼 또 보자.”

내일 비행기를 통해 떠날 생각이었지만 웨이린은 여느 때와 같이 다시 아카데미에서 볼 것처럼 그렇게 말했다.

“……응. 그래.”

그리고 그건 한설아도 마찬가지.

웨이린과 갈라서며 한설아는 담담하게 말해주었다.

“또 보자.”

비록 파티는 공중 분해되고 뿔뿔이 흩어지게 생겼지만 둘의 만남이 영원한 끝난 것은 아니었다.

*     *      *

신성그룹의 대저택.

독립 선언 이후, 아주 오랜만에 복귀한 김은아를 가족들은 무척이나 반겨주었다.

“은아야! 돌아왔구나?”

아주 입구부터 마중 나온 김준혁부터.

“그래. 은아야! 이렇게 주말 정도는 찾아와도 괜찮아! 널 보러 아버님도 돌아오신데.”

호들갑을 떠는 김윤아까지.

“아아아! 진짜, 다들 호들갑은! 나 그냥 집에 옷만 찾으러 온 거라니까?”

모두를 제친 김은아가 방에 들어가자 그곳에는 비서인 이수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돌아오셨군요!”

“아주, 반응만 보면 몇 년은 안 본 사람인 줄 알겠어.”

“그만큼~ 모두가 아가씨를 보고 싶어 했다는 거겠죠.”

하지만 김은아는 어디까지나 저택에 돌아온 건 드레스 룸을 방문하기 위해서일 뿐 그렇게 큰소리를 친 마당에 이렇게까지 환대를 받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됐어. 낯간지럽게.”

지잉-

김은아의 손짓에 벽면에 감춰두었던 드레스 룸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자 방에는 끝도 없이 이어진 옷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나 기숙사에 가져온 건 마음에 드는 게 없더라고.”

어딜 가려고, 누굴 만나려고 준비하기에 저택에 직접 옷까지 고르러 올까?

‘뻔하지.’

하지만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걸 눈치가 빠른 이수현이 모를 일은 없었다.

“그럼 제가 좀 봐 드릴까요?”

“어! 그럴래? 몇 개 안 입고 나올 거야. 그럼 나 이상한 곳 있는지만 봐줘!”

옆에서 좀 봐준다는 말에 이렇게까지 아이처럼 기뻐하는 걸 보니 이수현의 예측은 정답이 확실했다.

‘귀여운 녀석……. 그래. 어디 한번 보자!’

스슥- 슥슥-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는 소리와 함께 김은아는 곧바로 드레스 룸에서 걸어 나왔다.

“어때?”

모자가 달린 검은색 오버핏의 후드티 차림.

“진짜, 귀여운데요?”

이수현은 진지한 얼굴로 굳굳- 이라 외치며 쌍엄지를 치켜들었지만 김은아는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자신을 비춰보더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너무 애 같아.”

‘애 맞잖아.’

그래 한 번의 시행착오 정도야.

“그, 그런가요?”

이수현은 어른으로서 기꺼이 웃어 넘겨줄 수 있었다.

“자! 이건 어때!?”

이번에는 검은색 리본이 달린 흰색 와이셔츠. 그리고 멋들어지게 주름이 접힌 베이지 치마였다.

‘역시 어릴 때부터 비싼 옷만 입고 커서 그런지 센스가 있어.’

이번에도 진심으로 감탄을 한 이수현은 다시 김은아에게 쌍엄지를 치켜들었다.

“단정하면서도 리본 덕분에 심심하지 않은 게 완전 세련된 느낌인데요?”

“아니, 이상해. 지금 보니까 리본 너무 큰 거 같아.”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

김은아는 최고의 옷을 입고 신유성을 만나기 위해 패션쇼를 벌이고 있었다.

“이건 어때?”

“아, 그…… 털 코트가 튀긴 하지만 오히려 그게 유니크한 느낌?”

“흠, 지금 보니 아직 겨울도 아닌데. 좀 뜬금없지?”

스윽- 슥!

“이건 어때?”

“오히려 블라우스를 묶어서 매치한 게, 느낌이 무척 산뜻 하다고 할까요?”

“아니야. 해변도 아니고 학원 도시인데. 좀 더 어울리는 패션이 있을 거 같아.”

스윽, 슥-

“이건?”

“이런 탑에 캡 모자라니 아가씨는 정말 천재가 아니신가요? 보기만 해도 정말…….”

“아냐 이건 너무 헐벗은 거 같아. 그리고 날씨 생각하면 좀 추울 거 같고…….”

5번.

“흠, 이렇게 오버룩으로 하의를 가린 느낌?”

“네! 정말 다리가 긴 아가씨한테 딱 어울리는…….”

“아니지 아냐. 이렇게 입으면 춥다니까?”

10번.

“짠, 이렇게 흰색 니트에 올 블랙!”

“아가씨, 현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는 돌고 돌아 모던함 아니겠습니까? 완벽 그 자체…….”

“아냐. 생각해 보니 좀 올드해.”

15번.

“이렇게 오버롤 원피스? 안에 옷 하나 덧입고.”

“아가씨가 입으니 정석적이고 캐주얼한 옷도 이런 느낌이 나네요!”

김은아의 패션쇼가 끝나지 않고 반복될수록 이수현에겐 점점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 씨, 괜히 봐준다고 해가지고 이제 할 말도 없는데…….”

“어 나, 불렀어?”

“네!? 아니요 아가씨~ 정말 욕심 같아서는 시간만 있으면 하루 종일 보고 싶다고요~”

“하, 진짜, 오버하긴! 어떻게 하루 종일 옷만 입어~?”

끝나지 않는 김은아의 욕심에 맞춰주려니 정말 죽을 맛.

“아! 이번에는 진짜 이거다!”

하지만 김은아가 기뻐하며 원피스를 입고 나오자 이수현은 처음의 웃음을 잃지 않았다.

다만 문제는.

‘아까 입었던 거잖아.’

분명 김은아가 전에 입었던 원피스라는 점.

‘설마 시험인가?’

이수현은 김은아의 표정을 확인했다.

하지만 기대에 가득 찬 김은아의 표정을 보며 이수현은 확신한 듯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입으니 정석적이고 캐주얼한 옷도 이런 느낌이 나네요!”

방금 전과 똑같은 옷에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대답이었지만 김은아는 응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에 찬 얼굴로 거울을 확인했다.

“맞지!?”

조삼모사(朝三暮四)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

이수현은 아주 유명한 고사성어가 떠올랐지만 꾹 눌러 참았다.

“이거 완전 예뻐! 이번 외출에 딱 어울리는 거 같아!”

거울 앞에서 원피스의 옷자락을 잡으며 웃는 김은아를 보며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렇게 귀여운데. 좀 바보 같을 수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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