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첫 주말.
역시나 가장 먼저 일어나 부실을 지키는 건 스미레였다.
요리를 하며 흥얼거리는 콧노래.
그 리듬에 맞춰 둥실- 둥실- 움직이는 몸.
“아! 유성 씨!”
스미레는 무슨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앞치마를 입고 머리를 묶은 채 신유성을 반겼다.
“우와 선물이 산더미 같아요. 전부 유성 씨 숙소로 도착한 건가요?”
한달음에 걸어 나와 신유성의 짐을 나눠 들어준 스미레는 뭐가 그리 기쁜지 얼굴을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게다가 전부 엄청 가격이 비싼 것들……. 와! 손편지랑 종이학도 있네요!”
“아직 아카데미를 벗어난 적이 없어 유명세가 실감은 안 나지만.”
확실히 아카데미 밖을 구경하는 시간도 필요했다. 겨우 몇 달간 이렇게 미친 듯 앞만 보며 달려왔으니 신유성은 한동안은 휴식을 취할 생각이었다.
‘은아랑 했던 약속도 있고.’
그렇게나 큰소리를 치며 온갖 멋진 장소를 보여주겠다고 말했으니 김은아와 시간을 보내는 건 이미 확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유성이 고개를 내려 빤히 자신을 바라보자 스미레는 허둥지둥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 그…… 오늘은 주말인데도 무척 일찍 부실에 오셨네요! 무척 피곤 하셨을 테니 좀 더 주무실 줄 알았는데…….”
하지만 지금 신유성에게 몇 시간의 수면 시간은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신하윤이 찾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몽환의 마녀 모르간’의 아티팩트.
‘분명 스미레의 편린인 라플라스는 모르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 거야.’
이미 확신을 가진 신유성은 모르간의 정보를 부탁하기 위해 스미레의 손을 잡으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길게 잠을 못 잤어. 오늘은 스미레 널 빨리 만나고 싶었거든.”
물론 신유성의 말에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었다. 아마 신유성이 말하고 싶은 정확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선.
[새벽에 있었던 일 때문에 길게 잠을 못 잤어.]
[오늘은 편린인 라플라스에게 모르간의 정보를 묻기 위해. 스미레 너를 빨리 만나고 싶었거든.]
적어도 이 정도 길이의 문장은 필요했다.
“네? 저, 저를요? 아, 당연히! 저도 유성 씨를 무척 만나고 싶었지만…….”
거기다 이렇게 손을 잡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니.
“헤헤, 조금…… 부끄럽네요.”
스미레가 기쁜 듯 얼굴을 붉히며 웃자 신유성은 소파를 가리켰다.
“그럼 스미레. 괜찮으면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아, 네! 단팥죽이 다 되려면 1시간은 삶아야 하니까요.”
스미레는 분명 소파에서 신유성과 마주보고 앉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옆자리에 앉아서 서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게 될 줄이야.
확실히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신유성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건 심장 건강에 나빴다.
“오늘 새벽 제법 큰 사건이 있었거든. 난 신하윤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조금이나마 단서를 알게 됐어.”
“그런 일이…….”
스미레는 신유성의 심각한 표정에 덩달아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빠졌다.
스윽.
하지만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스킨십이 늘게 된 걸까.
“스미레.”
신유성이 다시 자연스럽게 양손으로 손을 감싸자 눈을 마주 본 스미레는 홀린 듯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네, 넷…… 유성 씨!”
“그 단서는 너의 편린인 라플라스와 관계가 깊어.”
사실 스미레는 신유성에게 부탁 같은 건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미 스미레는 신유성을 위해서라면 못해줄 것이 없었다.
“유성 씨의 부탁이라면 당연하죠! 하지만…… 라플라스 님은 워낙 변덕스러우셔서요.”
하지만 그렇게 말은 했어도 머리 장식에 손을 얹은 스미레는 눈을 감고 곧바로 라플라스를 호출했다.
- 라플라스 님?
* * *
고성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 아늑한 최신식 침대에 수면안대까지 차고 라플라스는 꿀 같은 수면을 즐기고 있었다.
♪-♬ ♬
하지만 시끄러운 벨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결국 라플라스는 잠에서 일어났다.
“윽, 대체 누가 이렇게 이른 시간에…… 라고 말을 해도 우리 아이밖에 없겠군.”
잠에 찌든 라플라스는 정말이지 죽겠다는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래. 아이야. 무슨 일이더냐?”
- 아! 라플라스 님!
라플라스는 자신을 반가워하는 스미레의 목소리에 한결 짜증이 누그러들었다. 아무리 졸려도 라플라스는 자신이 아끼는 스미레의 부탁이라면 이렇게 응해주었다.
- 유성 씨가 라플라스 님에게 물어 보고 싶은 게 있다고…….
라플라스는 스미레의 이야기에 휴우- 하고 긴 한숨을 쉬었다.
“대충 상황은 알겠구나. 스미레 네 남편이 나에게 물어볼 주제라면 하나밖에 없지. 그 신하윤이라는 요상한 마녀의 일 아니겠느냐?”
- 네!? 나, 남편이라니!
“호칭이야 아무래도 좋으니 그럼 잠깐 이야기 좀 해야겠구나.”
라플라스는 자신의 머리장식에 손을 얹었다.
“마침 네 신랑한테는 전부터 부탁할 것도 있었으니…….”
스미레의 부탁이기도 하니 빙의를 통해 직접 부실에 강림하기로 한 것이다.
* * *
스미레의 얼굴은 그대로지만 어딘가 바뀐 눈매와 분위기.
“흠-”
라플라스는 신유성을 평가하듯 위아래로 눈길을 훑더니 짧게 감탄했다.
“이 정도라니 우리 아이의 애간장을 태울 만도 하구나.”
라플라스는 핏- 하고 웃으며 신유성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훑더니 옅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뭘 물어볼 진 이미 알고 있다. 모르간에 대해서겠지?”
“그렇습니다.”
스윽 소파에서 일어난 라플라스는 신유성이 아닌 딴 곳을 바라보며 뻐근한 듯 기지개를 폈다.
“근데 난 내가 알고 있는 걸 모두 말해줄 생각은 없다만? 이건 우리 자매들끼리의 이야기이니 말이다. 아무리 편린이라도 나는 마녀. 그 정도 긍지는 있다.”
라플라스는 신유성에게 관심이 없는 듯 베란다의 유리를 보며 스윽- 스윽- 머리를 빗었다.
툭-
결국 단정했던 머리카락의 웨이브가 풀리며 긴 생머리로 변하자 라플라스는 마음에 든 듯 유리를 보며 감탄했다.
“오, 이 모습도 꽤 어울리는 군. 다음에는 이렇게 꾸며줘야겠어.”
“정보는 신하윤이 왜 모르간의 아티팩트를 찾고 있는지 그거면 충분합니다.”
라플라스는 신유성의 간절한 부탁에도 큰 흥미가 없어 보였다.
“그래?”
헌신적으로 무슨 부탁이든 들어주는 스미레와는 정반대의 성격.
“근데 우리 아이가 너에게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건 알고 있다만. 기본적으로 나와 그 아이는 다른 인물이다.”
머리를 푼 라플라스는 신유성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내게 원하는 게 있다면. 너도 내가 원하는 걸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말한 라플라스는 소파로 다가와 신유성의 상체를 짚었다. 평소의 스미레의 성격이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도발적인 모습.
‘……흐음.’
하지만 서로의 몸이 닿아도 동요 하나 없이 진지한 신유성의 표정에 라플라스는 고개를 저었다.
“너는 겉만 멀쩡하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참으로 재미없는 남자구나.”
결국 김이 샌 듯 라플라스는 신유성에게서 몸을 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때? 대가를 치를 준비는 되었느냐? 각오가 되었다면 알려주지.”
과연 라플라스가 말한 대가란 무엇일까? 수수께끼 같은 라플라스의 행동으로는 좀처럼 종잡을 수 없었다.
“대가란 무엇입니까?”
신유성의 질문에 라플라스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쿡쿡쿡- 요염하게 웃었다.
“그건 또 궁금하더냐? 예를 들면 복종의 맹약을 맺는다던지? 오직 우리 아이만을 평생 따르기로 맹세하는 거지.”
라플라스는 굳은 표정으로 빤히 신유성을 내려다보더니 풋- 하고 다시 웃었다.
“농이다. 그래서야 정당한 교환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 겉으로는 악해 보여도 마녀들의 거래는 제법 공정하니 말이다.”
사아아- 팟!
마나를 담은 라플라스의 손동작에 하늘 위로 수정구들이 떠올랐다. 수없이 많은 수정구들이 비추는 건 다름 아닌 라플라스와 신하윤의 결전이었다.
“신하윤. 그 계집이 원하는 건 모르간의 재림. 정확히는 마녀의 힘을 완벽히 흡수하는 것이다.”
라플라스가 비춘 수정구의 전투는 서로가 밀리지 않는 비슷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실력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모르간의 기억을 가진 신하윤은 스미레를 통해 강림한 라플라스를 압도하고 있었다.
“알고 있느냐? 신하윤이 모르간의 힘을 모두 흡수한다면 신하윤은 모르간의 전성기보다도 강해진다는 사실을.”
라플라스의 말은 절대 과언이 아니었다. 염력을 활용한 신하윤의 전투력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몽환의 마녀 모르간의 능력과 마나가 더해진다면 그 잠재력의 끝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알겠느냐? 신하윤을 막는다면 지금이다. 하지만 지금도 신하윤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지. 스미레의 눈을 통해 너를 지켜보았지만. 좀 더 승리에 가까운 쪽은…….”
좀처럼 말꼬리를 흐리던 라플라스는 스미레와 똑같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뭐, 그 이상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꾸나.”
하지만 좀 더 정보를 얻고 싶었던 신유성은 라플라스를 붙잡았다.
“그럼. 신하윤은 이미 모르간의 편린을 가진 겁니까?”
“글쎄 옳다고 보면 옳고 틀리다고 하면 틀리구나. 거긴 한없이 원본에 가깝지만 조금도 원본과 닮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러나 신유성의 질문에 라플라스는 수수께끼 같은 말로 답했다. 그리곤 요염하게 웃으며 신유성의 몸을 짚었다.
“그리고……. 질문을 받는 건 끝이다. 이제 대가를 치룰 시간이니 말이다.”
스윽-
그 말을 끝으로 라플라스는 부드럽게 신유성의 몸을 밀어 넘어뜨렸다. 그리곤 안기듯 함께 넘어지는 라플라스.
툭.
결국.
넘어진 신유성의 배 위에 올라타 앉은 라플라스는 미소를 지었다.
“너와 수다를 떨어준 대가로 우리 아이 좀 아껴 주거라.”
그 말을 끝으로 곧 라플라스의 눈빛이 흐려졌다.
툭-
힘없이 떨어진 고개.
하지만 스미레는 여전히 신유성의 몸 위에 앉은 채였다.
“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린 스미레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 어라…….”
왜 자신의 몸은 신유성을 깔고 앉아 있는 걸까. 거기다 왜 신유성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다리에 손을 얹고 있는 걸까.
“유, 유성 씨!? 어, 어어어! 괘, 괜찮으세요!? 왜 제 밑에…….”
놀란 스미레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때.
“……어제 당신이 들려준 별자리 이야기. 무척 재밌었습니다. 생각보다 박식하군요. 벨벳에게도 들려주어야겠습니다.”
“그 이야긴 됐어.”
부실의 문 앞에서 들리는 아델라와 김은아의 목소리.
“어, 어어어!?”
결국 당황한 스미레가 일어날 새도 없이 부실의 문이 열렸고.
“이게 먼…….”
충격적인 장면에 뇌가 정지한 김은아는 입을 벌린 채 말을 잃었고, 눈이 커진 아델라는 멀뚱멀뚱 둘을 바라보았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스미레가 외칠 수 있는 말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오해에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