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어제의 소란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평화로운 가온의 부실.
[국가 대항전 가온 아카데미 최종 우승!]
[검신의 제자 빌런 선언?]
[헌터 협회 긴급 발표! 류진은 정신조작을 당했다?]
[연구소장曰 리벨리온이 사용한 마정석 현대 기술 아니다.]
에이미는 뉴스를 보며 안경알이 없는 안경을 쓰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쯔쯔- 고개를 저었다.
“허허…… 무엇이 진짜일까?”
홀로그램으로 된 스크롤을 아무리 죽죽 내려도 온통 국가대항전의 이야기뿐이었다.
물론 개중 절반 이상은 가온의 파티장인 신유성의 활약과 충격적인 빌런 선언을 한 류진의 이야기였다.
“참, 혼돈한 세상이야!”
에이미가 그렇게 뉴스를 보며 어르신처럼 쯔쯔쯔- 혀를 차더니 부실을 둘러보았다.
“근데 이렇게 중요한 날. 이시우 걔는 왜 연락이 안 되는 거지? 포켓도 꺼두고…….”
이시우는 국가대항전이 시작하기 전.
[나. 집에 다녀올게.]
라고 비장한 표정으로 떠났다.
시티가드의 총장인 아버지의 호출 때문이었지만 아직 파티원들이 알 수 있는 건 이시우가 남긴 문자 한 통이 전부였다.
“그 녀석이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무섭단 말이지.”
흐음- 하고 이시우를 걱정하는 에이미를 보며 벨벳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걱정할 필요 업써! 벨벳은 알아! 사람들은 모두 어른이 되기 위해 자기가 해결해야 할 일이 있는 거야. 인생이란! 그런 거야!”
벨벳의 말에 고개를 돌린 에이미는 갑자기 벨벳이 인생 타령을 하게 된 원인을 찾았다.
[7세부터 준비하는 인생론]
[우리들의 인생! 밝은 노년을 위하여!]
[아프니까, 청춘일까?]
책장에 가득 꽂힌 어려운 책들.
도대체 누가 벨벳에게 저런 어려운 책을 읽으라고 책장 가득 사다 놓은 걸까?
‘분명 스미레겠지.’
하지만 꼬마 주제에 인생 타령을 하기는 이른 법. 에이미는 벨벳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요요요, 이제 갓 태어난 주제에! 네가 인생을 알아?”
“벨벳두 인생을 아라!”
벨벳은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진지한 얼굴로 에이미에게 토로했다.
“인생이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거야! 일희일비하지 않고 치킨을 머거도 못 머거도 슬퍼하지도 기뻐하지도 않고…….”
갓 태어난 드래곤 주제에 세상을 다 산 얼굴로 그렇게 토로하는 벨벳을 보며 에이미는 어려운 책을 압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쭈뼛!
그때 갑자기 옷- 하는 얼굴로 문 쪽을 쳐다보는 벨벳.
“이 마나는!”
문이 열리고 비앙카가 아닌 가온의 교복을 입은 아델라의 모습에 벨벳은 당장 한달음에 달려갔다.
“아델라 엄마!”
“……벨벳!”
다시 전학 수속을 끝낸 아델라는 이제 완벽히 가온 아카데미로 돌아왔다. 물론 지금까지는 S반에서 모든 활동을 하고 따로 소속한 파티가 없었지만.
“흐앙~ 아델라 엄마! 이제 딴 데 가지 마! 벨벳이랑 쭉 이써!”
아델라에게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부비적거리는 벨벳을 보며 에이미는 보기 좋다는 듯 웃었다.
“아주 웃겨. 언제는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며.”
역시 아무리 똑똑한 척 굴어도 벨벳은 꼬맹이일 뿐. 아델라는 그런 벨벳에게 미소를 지어주며 따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요. 저는 벨벳을 두고 다시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델라는 에이미를 보았다.
에이미는 아델라의 눈이 마주치자 어색함 때문인지 어흠- 하고 시선을 피했다.
“벨벳을 맡아주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델라는 예전의 그 차가운 느낌이 아니었다. 여전히 무표정한 눈은 좀처럼 기분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왜인지 모를 따스함이 느껴졌다.
“같은 파티원으로서 잘 부탁드립니다. 에이미.”
“으응? 나…….”
자신이 무서워했던 아델라의 호의가 에이미가 아직 어색한지 에헤헤- 웃고 있기만 하자. 벨벳은 손을 흔들었다.
까닥까닥.
얼른 에이미도 가까이 오라는 벨벳의 제스처. 에이미가 멋쩍어하면서도 결국 다가오자 벨벳은 아델라에게 말했다.
“둘이 서로를 안아줘! 아빠가 그래써! 파티원은 그러케 해야 해.”
“나!? 내가?! 아니 갑자기?”
“허걱, 충격. 설마 아델라 엄마가 싫어!?”
“어!? 아니야! 아니야! 나도 좋아해! 지금 안을게!”
에이미에게 더 웃긴 건 머쓱하게 다가가자 순순히 안아주는 아델라였다.
푹.
‘뭔가…….’
포근.
처음으로 아델라에게 안긴 에이미는 왜 그렇게 벨벳이 자주 안기려고 하는지 알 거 같았다.
무척이나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에 마치 이불에 안긴 듯 눈이 감기고 졸릴 지경이었다.
종종종.
귀여운 걸음으로 옆까지 다가온 벨벳은 에이미의 귓가에.
“사실 아빠는 그런 말 한적 업써. 벨벳이 지어내써…….”
너무나도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 * *
“검사 절차는 모두 마쳤습니다. 아직 모든 결과가 나오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발견된 문제는 없습니다.”
혹시나 가상포탈이 붕괴하면서 나쁜 영향이 있었을까. 신유성과 김은아는 헌터 협회가 소개해준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있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포켓도 없이 병원복만 입은 채로 난생 처음 보는 기계와 벽면이 온통 하얀 방에 남게 되자.
둘만 남은 신유성과 김은아는 자연스럽게 서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톡톡.
멋쩍은 분위기에 의자만 검지로 두드리던 김은아는 슬며시 신유성의 얼굴을 바라보며 운을 띄웠다.
“……유성아. 네 생각은 어때? 헌터 협회의 말처럼 정말 정신 조종을 당한 걸까?”
신유성에겐 어려운 질문이었다.
류진과 직접 대화한 신유성은 무엇이 진실인지 알았다. 그건 정신 조종 따위가 아니었다. 동생을 위한 류진의 의지였고 헌터협회의 발표는 명백한 가짜였다.
“……아직 자세한 사실은 알 수 없지만. 그건 거짓 발표야.”
어느새 김은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그럼 류진 걔가 했던 말들이 전부 진짜야?”
헌터 협회를 향해 선전포고를 하는 류진의 모습과 리벨리온의 등장은 전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다.
뒤늦게 방송으로 그 장면을 본 김은아는 생각이 많아졌다.
“아직은 알 수 없어. 하지만 곧 알게 될 거 같아.”
거기에 신유성의 의미심장한 이야기는 김은아의 찝찝한 마음과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켰다.
“그냥 감이야? 나한테 숨기고 있는 건 아니지?”
하지만 신유성의 정보는 아직 추리의 단계였다. 유월에게 들은 신하윤의 정보는 아티팩트를 비밀리에 비정상적으로 많이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쩌면 그건 리벨리온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다.
‘무언가를 계획 중인 건 분명해.’
데이터 센터에 등록하지 않고 아티팩트를 모으는 건 불법. 굳이 그런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신유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큰일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때 자신은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을까?
그는 언제나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했다. 모자라더라도 후회는 없었다. 다만.
스윽.
신유성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김은아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뭐, 뭔데 갑자기. 궁금하게 심각한 표정으로 말도 없이.”
지금의 신유성은 소중한 게 너무 많았다. 자신이 다친다면 슬퍼할 사람 또한 너무 많았다.
만약 그 갈림길에서 자신이 선택을 해야 한다면 이 평화와 안정일까? 아니면 줄곧 쫓아온 꿈일까?
‘처음엔 선택지가 하나뿐이었어.’
그래. 무신산에서 권왕과 함께 수련을 할 땐 신유성에게 선택지란.
‘꿈을 위해 달리는 것.’
오직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줄곧 달려왔던 길 말고도 너무 즐겁고 행복한 일이 많다는 걸 알 게 되었다.
하지만.
“그래도 은아야. 지금은 기뻐하는 게 먼저야. 그토록 바라던 우승을 했으니까.”
지금은 노력해준 김은아와 파티원을 칭찬하고 우승을 축하해 사기를 북돋울 순간이었다.
“우리가 전 아카데미에서 최고라는 거지? 물론 1학년만이지만.”
아카데미의 2학년부터는 실전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행사와는 자연스럽게 거리가 멀어졌다.
하지만.
검신의 제자인 류진.
아덴의 제자인 아델라.
마녀의 제자인 로렐라이까지.
이번 국가대항전은 그야말로 역대급이라 불릴 만큼 쟁쟁한 이들이 참가했다.
하지만 결국 신유성의 파티는 그 모든 후보를 꺾고 1등에 도달했다. 이제 더더욱 자라날 아카데미의 파티로서 최강이 될 자질은 충분히 보여주었다.
“그렇지.”
기뻐해야 한다는 말과 달리 담담한 신유성의 대답.
“흐응~”
장난기가 돋은 김은아는 환자복 위로 허리에 손가락을 집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우린 동굴에서 했던 이야기나 마저 끝낼까?”
“동굴에서?”
저건 시치미를 떼는 걸까.
진짜 몰라서 하는 반응일까.
김은아는 괜히 심술이 났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게 대처했다.
“내가 가르쳐 준다고 그랬잖아.”
김은아는 신유성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일부러 말해주지 않았다. 그런 걸 세세하게 설명했다간 또 얼굴이 뜨거워질 게 뻔했다.
하지만 아무리 부끄러워도 먼저 다가가지 않고, 알려주지 않으면 이 바보와는 평생 제자리걸음만 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스윽.
신유성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는 김은아.
“이러면…… 넌, 기분이 어때?”
김은아는 자신의 얇은 손가락과 달리 수련이 된 신유성의 손가락을 하나 둘 만지작거렸다.
“가슴이…… 두근거리지 않아?”
좀처럼 붉어진 얼굴로.
만지작- 만지작-
김은아는 조심스럽게 신유성의 손가락으로 장난을 쳤지만.
“은아는 무척 손이 부드럽구나.”
신유성은 김은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따위 감상평을 내놓는 게 전부였다.
“그, 그게 전부야!?”
결국 김은아는 분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분노에서인지 용기에서인지 어디서 우러나왔을지 모를 행동을 했다.
“그럼! 이, 이러면?”
화악-
신유성에게 고개를 파묻으며 목 주변을 껴안는 김은아.
“……이래도, 안 두근거려? 아무 기분도 안 들어?”
그렇게 신유성을 껴안은 김은아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질문을 하는 그 순간.
벌컥!
“결과가 나왔습니다! 바로 퇴원 절차……를…….”
검사를 끝내고 타이밍 나쁘게 의사가 들어왔다.
결국 반사적으로 신유성에게서 고개를 뗀 김은아는 신유성을 원망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씨, 넌, 나중에 봐……. 다음도 남았으니까.”
얼굴이 붉어진 김은아는 씩씩거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쿵!
그렇게 닫힌 문.
둘만 남은 의사와 신유성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