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김은아는 이리저리 포션 병을 흔들더니 큰 다짐과 함께 꿀꺽- 꿀꺽- 액체를 삼키기 시작했다.
크으-
포션을 마신 김은아는 인상을 쓰며 끔찍함을 어필했다.
“초록색에 파란색…… 맛도 엄청 쓰고……. 끈적거리기까지……. 포션은 정말 끔찍해.”
모닥불 근처에서 일어난 김은아는 동굴 입구로 나가 비가 억수처럼 쏟아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리는 비도 필드의 설정 중 일부겠지?”
“그렇겠지. 전투 중에 내리는 비는 소리와 흔적을 감춰주니까.”
산에서 지낸 신유성의 이야기는 김은아에게 새로운 지식을 알려 줄 때가 많았다.
“흔적을 감춰줘?”
흥미로운지 신유성의 곁에 다가온 김은아는 자연스럽게 머리끈을 가져갔다. 그리곤 그녀는 당연한 듯 신유성의 머리를 대신해서 묶어주었다.
슥-
계속 설명하라며 턱 끝을 움직이는 김은아. 신유성은 풋- 하고 웃으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런 산지에서 내린 비는 낮은 곳으로 흐르며 흔적들을 지워나가거든.”
“음, 뭐 발자국이랑 그런 거?”
꼼꼼하게 머리를 묶어준 김은아는 한숨을 쉬었다.
“넌 참, 그런 어려운 건 많이 알고 있으면서……. 말해 뭐해. 내 입만 아프지.”
하지만 신유성은 그런 김은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비가 내리는 동굴 밖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비가 내리는 상황은 은아 너에겐 장점이 더 많아. 물에 젖은 상대는 번개에 취약하니까.”
하지만 김은아는 설명을 듣는 내내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표정을 지으며 신유성을 보았다.
2년.
생각해보면 김준혁이 혼수상태에 빠진 그 2년조차 김은아에겐 꽤나 긴 시간이었다.
그런데 신유성은 십 년도 훨씬 넘는 시간을 오직 산에서 보낸 것이다. 자신의 분야에선 너무나 뛰어나지만 그 비어 있는 간극에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흐음…….”
이성과 손을 잡는 것도, 가족이 되자는 말도 서슴지 않고 뱉는 바보가 그런 걸 알 리가 없었다.
깊은 고민.
그리고 그 끝에서.
“야.”
김은아가 신유성을 불렀다.
“좋아. 내가 이해할게.”
도대체 뭘 이해하겠다는 건지 다짜고짜 그렇게 말을 한 김은아는 짧은 설명을 덧붙였다.
“지금부터 내가 가르쳐주면 되니까!”
영 수수께끼 같은 말임에도 기분 좋게 손을 내민 김은아를 보며 신유성은 같이 싱긋 웃으며 악수를 해주었다.
“그래. 은아야.”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는 막막하지만.”
김은아는 신유성의 그 비어버린 간극을 채워주겠노라 선포했다.
프로포즈도 뭣도 아닌 상황이었지만 신유성을 위하는 김은아의 마음만큼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늑한 동굴에서 평화로움을 느끼는 것도 잠시.
지잉-
신유성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제된 살기를 느꼈다. 마치 서늘한 칼끝이 심장 앞에 다가와 목숨을 노리는 기분.
하지만 어린 나이에 맹수와 싸워온 신유성에게 그건 그리 생소한 감각이 아니었다.
스릉-
검을 뽑는 누군가의 움직임.
신유성의 뛰어난 오감은 마치 실타래처럼 공기 중으로 마나의 움직임을 전달했고 무형의 검이 보이는 듯 했다.
“잠깐…….”
지금 동굴의 위치에서는 꽤나 먼 곳. 상대는 마나를 담고 자세를 잡는 것만으로 엄청난 위압감을 담아내더니 은밀한 칼날처럼 갈무리했다. 그 뒤에 남는 건 그저 흉흉한 살기.
쐐액-!
신유성은 마나를 담은 상대의 검이 허공을 내려치는 게 느껴졌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일자 베기.
“어? 왜?”
상황을 모르는 김은아는 놀란 얼굴로 물었지만. 신유성의 눈에는 선명히 보였다.
주우우욱-
자신과 김은아를 노리고 그어진 붉은 선과.
츠츠츳-!
검의 궤도를 따라 엄청난 속도로 쇄도하는 순수한 마나 덩어리가.
“위험해-!”
화악!
다급한 상황에 신유성이 김은아를 밀쳤다.
찰나.
0.1초.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은 시간.
길고 두꺼운 푸른 검기가 주욱 그어진 선을 따라 동굴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아니, 산을 갈라 놓았다.
드드드드-
반으로 잘려진 산은 서로 반대편을 향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단순히 동굴이 아니라 산 전체를 갈라놓았다는 증거.
츠즈즛!
동굴의 상층부가 무너지며 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대가 산을 쓰러트리기 위해 필요한 건 단 일검(一劍)이었다.
* * *
비가 쏟아지는 숲속.
거대한 독수리는 마나가 담긴 날갯짓으로 매섭게 하늘을 회전을 하더니 콜트의 어깨에 앉았다.
“저 동굴이다. 비 때문에 찾는데 고생했지만 확인을 끝냈어.”
콜트가 말을 하는 상대는 잿빛 후드 망토를 뒤집어쓴 류진이었다.
콜트는 학생이라곤 믿기지 않는 기다란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일단 같은 파티였던 저 둘을 떼어 놓는 게 가장 중요하겠지. 합을 맞춘다면 불리하니까.”
콜트는 일반적인 상식 내에서 신유성과 김은아 둘을 떼어 놓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드를 걷고 동굴을 바라본 류진은 그런 고민은 일절 하지 않았다.
“넌 알고 있나? 거짓말 하는 사람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떨림이 있다는 걸.”
오히려 류진은 동굴을 바라보며 콜트에게 묻고 있었다.
“난 거짓말을 하는 자와 손을 잡을 순 없다. 마지막으로 묻지. 나를 선택한 진짜 이유가 뭐지?”
콜트는 류진의 질문에 푸하하- 소리 내어 웃더니 어디서 뜯어 온 건지 모를 잡초를 입에 물었다.
“이 상황에서도 아직 그런 사소한 일을 생각하고 있었나? 좋아 말해주지.”
아그작 퉤-
바닥에 잡초를 뱉어낸 콜트는 류진을 보며 회중시계를 꺼냈다.
“네 상황이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거든. 마천루의 왕자가 어떤 절절한 사연을 가졌는지는 유명하잖아? 너만큼은 아니지만.”
콜트는 회중시계를 열어 빛바랜 사진을 보여주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도 질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약간의 침묵.
그 끝에 류진은 후드를 벗어 던지며 작게 읊조렸다.
“……그게 대답인가?”
“넌 나보다도 간절할 테니 우승할 확률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귀신의 손이라도 잡을 테지.”
차르르- 탁!
콜트는 비를 맞으며 허리춤에서 솜씨 좋게 권총을 꺼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한가?”
가온의 타도를 위해 급조된 파티인 둘에게서 공통점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지만. 명확한 목표는 명확한 길을 만들어주었다.
“그렇군.”
정확히 보았다.
콜트의 말대로 류진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있었다. 그걸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었고. 다른 파티는 물론이며 귀신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 류진에게 자존심은 중요하지 않았다.
[난 그래도! 오빠랑 있는 게 제일 좋아!]
그래. 류진에겐 더더욱 소중한 것이 있었다. 그건 스크린 속 멋진 세상을 보면서도 오히려 자신을 걱정해 괜찮은 척을 하는 동생이었으며.
[익숙해진다는 건. 정말 슬픈 일 같아. 아픈 것에 익숙해지는 건 더더욱…….]
그럼에도 약한 모습을 보이고 마는 아직 너무나도 여린 소녀였으며.
[나, 병이 다 나으면 친구를 만들래. 그것도…… 엄청 많이!]
소박한 꿈을 가진 아이였다.
그래.
류진에게 류밍은 모든 것이었고.
[류밍. 너의 꿈이 곧 내 꿈이다.]
류밍의 소원은.
곧 류진의 소원이었다.
어쩌면 지옥 같은 현실에서 류진을 지켜온 것은 류밍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 마지막 남은 소중한 것을 앗아가려고 하는 건 어떤 시련일까?
만약 신이 있다면.
이것도 신의 시련일까?
사아아-
류진이 눈을 감았다.
자신과 류밍을 향해 뻗어진 수많은 손들이 느껴졌다. 그리고 개중에는 자신의 스승인 검신도, 리벨리온도 있었다.
‘류밍.’
류진이 눈을 떴다.
정제된 마나는 푸른빛을 내며 검을 휘감았고 차가운 시선은 동굴이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꿰뚫을 듯 보였다.
[그렇군. 그 침묵이 네 대답인 게냐?]
너무나 익숙한 그럼에도 무엇보다 원망스러운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기술이 궁금하십니까? 그렇다면 직접 사용해보는 건 어떠십니까? 당신의 동생을 위해.]
헌터라면 응당 베어버려야 할 악당을 자처한 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너를 구하기 위해, 누구를 믿어야 하지?’
마천루의 최강이 아닌.
그저 소중한 것을 지키고 싶은 한 명의 오빠로서.
서걱-
검을 내려쳤다.
천하패검(天下敗劍)
멸검(滅檢)
섬경(纖莖)
류진의 검 끝에서 이어진 건, 자그마한 붉은색 줄.
츳-
푸른색의 마나가 붉은 색의 실타래를 타고 이어졌다.
매섭게 쇄도한 검격과 달리.
츠읏-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처럼.
검 끝의 마나가 가볍게 일렁였고, 하늘거렸다.
[내가 나의 검술의 이름을 천하패검이라 지은 이유?]
류진은 이 순간 떠오른 목소리가 그 사람의 것이라는 게 원망스러웠다. 류진은 검신을 존경하는 만큼 그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하지만.
검신의 가르침은 이젠 씻어낼 수 없을 정도로 류진에게 강렬하게 배어버린 것이다.
[시시한 걸 묻는구나. 그야 당연히……. 나의 검술로 이 천하에 베지 못할 것은 없기 때문이지.]
탁.
산의 정상에서.
숲이 맞닿은 곳까지.
한 줄기로 이어진 얇은 선.
촤아아아악-!
하지만 그 얇은 선은 산을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스윽- 탁.
칼집에 검을 집어넣는 류진.
“이, 이게……. 천하패검? 대체 이 무슨…….”
당황한 콜트는 입을 쩍 벌린 채 자리에서 굳어 버렸지만 류진은 그 광경을 담담하게 바라보더니 짧게 한 마디를 던졌다.
“시작하도록 하지.”
검신의 제자.
마천루의 패자.
류진에게는 그 엄청난 실력을 칭송하기 위한 수없이 많은 칭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류진을 정확히 꿰뚫는 단어는 아이러니하게도 단 하나.
천하패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