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7화
부스럭- 부스럭-
익숙한 기시감 신유성은 숲에서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여기 있었구나.’
신유성이 웃음을 참으며 수풀을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얼굴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어, 어어…….”
머리카락 위에 바보처럼 나뭇잎을 올린 김은아는 엉망진창이 된 모습으로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유성아!”
김은아는 반가운 마음에 신유성을 향해 황급히 다가오려다 악-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절뚝거렸다.
“아, 아으으……. 그 스킬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야…….”
나무를 짚고선 김은아가 앓는 소리를 내자 신유성은 너무나 담담하게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은아야, 다리가 아프면 업힐래?”
“……어?”
갑자기 훅 들어오는 신유성의 제안에도 김은아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반응하려고 했다.
“뭐……. 지금은 전투 중이고 빨리 안전한 장소를 찾아야 하니까. 으음 뭐, 그게 맞긴 한데…….”
그게 옳다고 말하면서도 김은아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나무를 붙잡은 채로 신유성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업혀?”
김은아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전투를 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니 메인카메라에 잡힐 확률은 적지만 그래도 신유성에게 업힌 모습이 방송을 탈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응, 괜찮아. 은아야 난 멀쩡해.”
가까이 다가온 신유성이 자세를 낮춰 등을 내어주자 김은아는 신유성의 등에 슬쩍 손을 올렸다.
“아, 진짜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하네…….”
김은아는 마치 누군가 들으라는 것처럼 중얼거리며 자신의 머리를 긁적였다.
“크흠…….”
대체 마음속으로 몇 번의 심사숙고를 거친 건지 김은아는 너무나 진지한 표정으로 신유성의 등에 업혔다.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김은아의 무게.
“그때보다 무거워진 거 같은데.”
그럼에도 신유성이 장난을 치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김은아는 다급히 반박을 했다.
“머, 뭐라는 거야! 똑같거든!?”
김은아는 당황했지만 이내 신유성이 자신의 긴장을 풀어주려 장난을 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은 대체 어디까지 배려심이 깊은 걸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부상으로 시름시름 앓던 김은아는 어쩐지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신유성의 목을 감싸 안고 체온을 느끼고 있으니 졸린 느낌마저 들었다.
“유성이 너, 스미레가 탈락한 건. 알고 있지? 그리고 아델라도…….”
그래.
이렇게 졸려올 때는 대화가 최고.
등에 업힌 김은아가 운을 띄우자 신유성은 짤막하게 답했다
“응.”
남의 등에 안기는 건 왜 이렇게 편안한 걸까. 부끄러움도 잠시 김은아는 신유성의 등에 포옥- 하고 파고들어 조곤조곤 속삭였다.
“……아델라는 엄청 강하더라. 사실 우리가 진 거나 마찬가지야.”
깊은 한숨.
김은아는 찝찝한 표정으로 먼 곳을 바라보더니 진이 빠진 목소리로 자조적이게 중얼거렸다.
“내가 조금만 더 강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럼 스미레도 탈락하지 않았을 거고…….”
점점 내려가는 김은아의 가드.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는 김은아의 성향은 이제 파티원들에게는 작동하지 않는 듯 보였다.
“은아야. 강해지고 싶어?”
신유성은 김은아의 말에 진지한 얼굴로 고민을 하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했다.
“……뭐?”
한참 곰곰이 생각하더니 뱉는 게 겨우 저런 말이라니. 눈이 가늘어진 김은아는 콕콕- 검지로 신유성의 옆구리를 간질였다.
“장난해? 당연하지!”
꾸욱- 빙그르르-
“으, 은아야…….”
김은아가 옷 위로 기다란 검지를 꼼지락거리자 신유성은 몰려오는 간지러움을 참았다.
“어라~ 표정 뭐야 너? 유성이 네가 간지럼도 타?”
그 신유성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니 김은아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새로운 규칙을 선포했다.
“너 이제 나한테 장난치면 무조건 이거야.”
국가대항전 중에 이어지는 신유성과 김은아의 핑크빛 분위기.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은아 네가 얼마나 강해지고 싶은지, 그리고 왜 강해지고 싶은지.”
잠깐의 고민.
하지만 마음을 정리한 김은아의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난 그렇게 거창한 건 없어. 그냥 너희랑 같이…… 쭉, 헌터 생활을 하고 싶어. 같이 탑도 오르고. 같이…….”
주르륵- 혼잣말을 쏟아내던 김은아는 뭐가 불만인지 갑자기 눈을 가늘게 뜨며 검지로 신유성의 허리를 콕콕 찔렀다.
“야 근데 사람 부끄럽게.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없자. 김은아는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신유성의 표정을 살폈다.
빼꼼-
“그냥 궁금했어.”
“어라, 말 안 해? 네가 그냥 그런 말 하는 애야?”
꼼지락- 꼼지락- 또 장난에 시동을 거는 김은아는 확실히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휴, 그래도 합류해서 다행이다. 솔직히 숲으로 도망칠 때만 해도 탈락인 줄 알았는데……. 이렇, 어! 저기! 저기! 유성아 동굴이야!”
정말 김은아의 말처럼 숲의 상층부에는 동굴이 있었다.
툭- 투두둑-
그렇게 동굴이 발견되자 그제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추적추적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잘 됐다. 저기서 내가 챙겨둔 포션도 마시면 되겠네!”
승리를 위한 재정비.
이제 막 벌어진 국가대항전의 결승전이었지만 신유성과 김은아에겐 아주 오랜만의 휴식처럼 느껴졌다.
* * *
카우보이 모자.
목에 두른 붉은 머플러.
마치, 서부의 총잡이 같은 모습으로 콜트는 미소를 지었다.
“우리 지역에선 그날의 운을 점칠 때 이렇게 동전을 던져보곤 하지.”
팟! 티르르르-
콜트가 엄지로 동전의 끝을 치자. 허공에 뜬 동전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탁.
콜트는 자신 앞으로 떨어지는 동전을 솜씨 좋게 움켜쥐며 류진을 바라보았다.
“동전의 앞면이 나온다면 행운을 상징하지만. 뒷면이 나온다면 그날의 불운을 상징하지.”
콜트는 무관심한 류진을 앞에 두고 동전을 확인했다.
“……앞면. 역시 널 찾아온 건 옳은 선택이었나 보군.”
능글맞은 콜트의 이야기에도 류진은 대답 대신 검을 꺼냈다.
스릉-
시끄러우니 문답무용으로 베겠다는 류진의 제스처.
탕!
하지만 콜트는 바닥에 견제사격을 하면서도 류진의 근처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를 베더라도 제안은 들어보는 게 좋을 거야. 우린 지금 같은 처지에 놓여있으니.”
“제안? 그건 서로의 입장이 동등할 때 가능한 일이다.”
“자신감이 넘치는군. 물론 네가 그만큼 강한 건 인정하지만…… 알고 있나? 신유성은 사도닉스 레이드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는 걸. 거기다……. 2명이 살아남은 저쪽과 달리.”
콜트는 싸울 의지가 없다는 듯 자신의 허리춤에 총을 집어넣었다.
“우리 파티는 10분도 채 되지 않아 날 제외한 모두가 탈락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너도 마찬가지 아닌가?”
콜트의 말처럼 류진의 파티인 웨이린과 탈락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손을 잡자는 거지 살아남은 파티원이 2명인 팀도 있는 지금. 혼자 남은 우리들끼리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것이 자신만 관계된 일이었다면 류진은 절대로 콜트의 손을 잡을 리가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우승이다.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말거라.]
하지만 지금의 류진에겐 설령 1%의 확률이라도 어떻게든 올려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네가 너희들의 비밀을 모르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저 흥미로워 방관할 뿐이다. 명심하도록.]
자신은 어찌하다 이렇게 지독한 인간에게 꼬여버린 것일까. 헌터의 길을 택하고 자신이 원한 건 거창한 소원이 아니었다.
그저 류진은 자신의 동생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길 바랐다.
“……손을 잡자는 이야기군.”
어쩌면 이미 꼬여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의 류진은 무엇이 옳은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과연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해야 류밍을 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류진을 무엇보다 괴롭게 만드는 건.
“좋다. ……하지만 끝이 다가오면 널 베겠다.”
허울뿐이더라도 스승인 검신과 빌런인 리벨리온의 사이에서 류밍의 목숨을 두고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현실이었다.
* * *
신성그룹 별채에는 영화관에도 꿇리지 않을 거대한 스크린이 있었다. 물론 그걸 통해 보고 있는 건 당연히 김은아의 모습.
- 유성아!
어린 시절에나 가끔 보았던 김은아의 애교 섞인 행동은 가족들에게 너무나 생소했다.
특히 말끝마다 입꼬리를 들어 배시시- 웃음을 짓는 모습이나.
꺄르르- 꺄르르-
한마디 한마디에 웃음기가 섞여 나오는 김은아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신성그룹의 일원들은 자신이 알던 김은아가 맞는지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카드를 두고 집을 나갔을 때는 걱정도 했는데…… 유성이랑 은아의 사이가 여간 돈독한 게 아니네요~ 평소에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는데 보기가 참 좋아요.”
어머니인 김윤하가 운을 띄우자 김준혁은 김석한의 눈치를 보면서도 소신 있게 발언했다.
“거기다 은아가 저렇게 열심히 하는 모습은 저도 처음 보네요. 무척 즐거워 보이기도 하고…….”
김석한은 오랜만에 보는 손녀의 모습에 즐거울 법도 한데 신유성이 김은아를 업어준 것이 영 못마땅해 보였다.
“크음…….”
물론 부상도 있었으니 단순히 김은아를 업어주기만 했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 어라~ 표정 뭐야 너? 유성이 네가 간지럼도 타?
하지만 필요도 없이 아주 서로 하하 호호- 사이좋게 웃으며 핑크빛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니 김석한은 이 상황을 좋게 볼래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 너 이제 나한테 장난치면 무조건 이거야!
이젠 아주 꿀이 뚝뚝 묻어나오는 김은아의 애교 섞인 장난. 그러다 김은아와 신유성이 단둘이서 동굴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오자 김석한은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팟-!
그리고 그때 카메라의 화면이 바뀌었다.
[1번 참가자가 뷰어가 닿지 않는 장소로 이동하였습니다. 송출 대상을 변경합니다.]
그렇게 이내 보이는 류진과 콜트의 모습에 김석한은 불호령을 내렸다.
“아니! 뷰어가 닿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하필 김은아와 신유성이 들어간 장소는 스크린에 송출이 되지 않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다시 돌려 봐!”
김석한의 명령에 따라 다시 1번 카메라를 선택했지만 스크린에 보이는 건 동굴의 입구뿐. 김석한의 입장에선 뒷목을 잡을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