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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4화 (254/434)

제254화

가상 포탈은 너무나 완벽하게 현실을 옮겨 놓은 시뮬레이션 공간이었다.

“진짜, 죽겠네…….”

덕분에 몸이 엉망이 된 김은아는 상처의 디테일이나 통증을 생생하게 느끼고 있었다.

“내가 숲을 내려간다고 유성이를 만난다는 보장도 없고…….”

지금 이 대회에서 남은 건 몇 명일까? 확실한 건 아델라가 떨어진 지금 우승 후보 중 꽤 많은 탈락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이었다.

‘마천루의 류진만 제외하면. 전투에서 유성이를 위협할 수 있는 후보는 없어.’

그나마 변수가 있다면 아델라를 상대로 훌륭한 기습을 보여준 디안의 존재였다.

‘……내가 지금 이 상태로 도움이나 될까?’

김은아는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도대체 언제 삐었는지 김은아는 다리를 절뚝거렸고, 마나는 바닥을 기었다. 이렇게 많은 마나가 빠져나갔는데 자연회복이 가능이나 할까?

절뚝절뚝.

몸을 무리하게 사용한 탓에 다리를 절며 걸어 내려가던 김은아는 괜히 예전 일이 떠올랐다.

[나 진짜, 걸을 수…… 하아.]

치트와의 격전 이후, 몸을 비틀거리는 자신에게 신유성은 등을 내주었다. 언제나 남을 배려하는 신유성의 성격을 알았기에 어울리지도 않게 순순히 업혔었지만.

[좋아. 그럼…… 실례 좀 하자.]

그 경험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물론 부끄럽긴 했지만 무척이나 따뜻하고…….

[꽉 잡아.]

예전 기억에 깊이 몰입한 탓인지 윽- 하고 소리를 낸 김은아는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뭐, 조금만 더 내려가 볼까.’

*     *      *

숲길을 향해 도망치는 디안.

숨죽이며 그 모습을 스크린으로 바라보던 아크만은 괜히 옆에 있는 엘란을 흘겼다.

“저기요. 궁금한 게 있어서 그러는데 파티장님의 그 능력, 당신도 직접 본 적 있어요?”

그 능력이라니 아크만이 마치 암호와 같은 단어를 말하자. 엘란은 옅게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지. 덕분에 어려운 작전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래.

확실히 디안의 기술이라면 상대의 경계를 허물고 기습을 통한 전투의 이점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비교적 디안과 어울린 시간이 짧았던 아크만은 궁금한 점이 있었다.

“근데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말이에요. 그렇게 마음대로 모습을 의태할 수 있다니……. 불 능력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요?”

헌터가 가진 마나량에 따라 발휘될 수 있는 능력은 천차만별이지만 적어도 타고난 특성의 성질에 따라 스킬의 효과는 공통점을 가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전기라면 전기를 토대로 한 스킬의 응용이고. 사령술이라면 흑마술을 기반으로 하며, 냉기의 경우는 얼음을 토대로 한 운용이 대부분이었다.

“아크만. 불이라고 생각하면 달라 보이지만 실은 같아. 파티장……. 그러니까 디안이 사용하는 특성은 진짜 불이 아니기 때문이지.”

“불이 아니라고요?”

아크만이 놀란 얼굴로 묻자.

엘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안의 특성은 같은 파티원인 아크만조차 모르는 부분이 있을 정도로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래. 불이 아니지. 저주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대부분의 특성은 태어날 때 타고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디안 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으니까.”

마치 수수께끼 같은 엘란의 어려운 설명에 아크만은 이해는커녕 더욱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럼 파티장님이 사용하시는 불은요?”

“정확히 그건 불의 형태를 띤 염원이지. 불이 아니다. 불의 형태로 만들겠다고 소원한 순간 그런 형태를 취할 순 있지만. 그건 마나 덩어리에 가깝지.”

불의 형태를 띤 염원.

특성인 척하는 저주.

비교를 할 대상조차 명확하지 않은 디안의 힘을 정확한 개념으로 설명하는 건 어려웠다.

“참 그쪽은 쉬운 말도 어렵게 설명하시더니. 어려운 말은 더 어렵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네요.”

결국 엘란은 한참을 고민하더니 쉬운 설명을 위해 꽃병에 꽂힌 조화를 잡았다.

“이게 뭐로 보이지?”

“꽃이죠.”

“그래. 꽃의 형상을 하고 있지. 하지만 본질은 종이와 테이프다. 그건 절대로 바뀌지 않지.”

아크만은 그제야 아-! 하고 감탄했다. 엘란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조화의 꽃잎을 떼어냈다.

“어렴풋이 이해한 거 같군. 우리 파티장의 능력은 이 종이와 같다. 불의 형태로 방출되지만 특성의 본질은 술식. 그것도 저주의 성질을 띠고 있지.”

모든 이해를 마친 아크만은 한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그럼 굳이 불꽃이 아니어도 된다는 거잖아요? 성질을 복사하진 못해도 원하는 형태는 뭐든 만들 수 있다는 건데…….”

지금 던질 질문은 원리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자신의 파티장인 디안과 그에게 내려진 술식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그럼 왜 하필 불이에요?”

불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농축된 마나 덩어리는 그 자체로 힘을 가진다. 그렇다면 디안을 포함한 그들에게 이어져 내려온 특성은 불이라는 형태를 택했을까?

엘란은 아크만의 질문에 음- 하고 짧은 탄식을 뱉었다.

“글쎄…… . 그건 누구도 알 수 없겠지. 하지만 그를 가까이서 지켜본 나는 왜인지 알 것도 같군.”

화르륵-

엘란은 조화의 꽃잎, 아니 그저 종이를 태워버렸다.

“그들이 이어온 술식이……. 지나간 자리에 잿더미만 남기는 불길과 닮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뭔가 철학적이네요. 그런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하지만 엘란의 말이 이해를 도왔는지 아크만은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보았다. 스크린 속엔 디안이지만 디안이 아닌 누군가가 몸을 풀고 있었다.

“그렇게 보면…… 참 편리한 능력이네요. 확실히 저런 모습이라면 방심을 할 수밖에 없겠는데요?”

너무나 완벽하게 타인으로 변한 디안의 모습은 아크만마저 감탄하게 만들었다.

*     *      *

아델라와 본 드래곤의 충돌로 생긴 거대한 마력 폭풍. 비록 적인지 아군인지는 확실하지 않아도 신유성은 그 흔적이 숲으로 이어졌다는 건 확신했다.

‘숲으로 들어간 사람이 5명도 넘어, 발자국의 위치도 도망보다는 추적에 가깝고…….’

도망치는 사람과 추적하는 사람은 발자국의 거리가 다르다. 거기다 사람의 숫자로 보아 추후 또 다른 전투로 이어졌을 상황도 염두해야 했다.

부스럭부스럭.

멀리서 들리는 나뭇잎을 헤치는 소리. 신유성은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유성아…….”

“은아야?”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로 비틀거리며 수풀을 빠져나온 건 한쪽 팔로 어깨를 부여잡은 김은아였다.

김은아는 반가운 표정도 잠시 크게 상처를 입었는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일찍 만나서 다행이다……. 나 방금 위쪽에서 전투를 치렀거든. 이기긴 했는데…… 상처가…….”

한쪽 팔을 쥔 김은아가 비틀거리자. 신유성은 다급히 김은아를 부축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된 거야?”

신유성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질문하자 김은아는 잠깐 말끝을 흐렸다.

“스미레랑 합류해서 아델라랑 싸웠어. 어떻게 이기긴 했는데……. 스미레는 탈락했고.”

“그래서 아델라를 탈락시키고 지금까지 숲길을 따라 도망친 거야?”

“……응. 그렇지. 생각보다 아델라가 엄청 강하더라고.”

김은아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떨어트리며 담담하게 대답하자. 신유성은 옅게 웃으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 네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구나?”

“어? 응. 그렇지. 내가 아는 건 거기까지야. 근데…….”

신유성의 웃음을 대수롭지 않게 넘긴 김은아는 조심스럽게 검지로 팔꿈치를 건드리며 물었다.

“……저기, 나, 괜찮으면 업혀도 될까? 그게…… 다리를 다쳐서.”

신유성은 그런 김은아를 내려다보더니 한쪽 손을 들었다.

“모습. 목소리. 거기다 말투까지. 정말 대단한 능력이네.

화악-

몸통을 향해 빠르게 비집고 들어가는 신유성의 손끝. 김은아는 다급하게 몸을 비틀었지만 팔을 꿰뚫렸다.

“윽-!”

재빨리 뒤로 물러난 김은아는 악독한 표정을 짓더니 부글부글- 몸이 검은색 거품이 되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큭- 어떻, 게 알았지? 내 변신은 완벽했는데…….”

이내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디안이 눈을 부릅뜨며 묻자 신유성은 가볍게 손을 털었다.

“아무래도 성격은 흉내 내지 못했나 봐.”

신유성이 아는 김은아라면 업히길 원하더라도 분명 한참을 둘러서 표현했을 것이다. 김은아는 부끄러움이 많았고, 남을 의지하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사실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은아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어, 그냥 네가 알고 있는 정보를 듣고 싶었을 뿐이야.”

“……날, 처음 본, 순간부터?”

디안이 손끝으로 찔린 팔을 부여잡았다. 신유성에게 마나가 침투당한 팔에서 타들어 가는 고통이 느껴지자. 거추장스럽다는 듯 팔을 뚝 떼어내 버렸다.

부글부글-

그러자 바닥에 떨어져 기포가 되어 사라지는 디안의 오른팔. 신유성은 그 끔찍한 광경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더니 짧게 읊조렸다.

“……너에게선 죽은 자의 냄새가 나거든.”

신유성의 말은 비유가 아니었다.

디안에게선 스미레가 다루는 언데드보다도 더 죽음에 가까운 냄새가 났다. 헌터들을 숙주로 삼아 전승되어 내려온 저주의 술식은 서서히 디안을 삼켜버렸고, 어느새 디안의 정신이 아닌 술식이 본체가 되었다.

“그래도 네 말에서 진실은 느껴졌어. 은아가 숲길을 따라 도망쳤다는 건 사실이지?”

디안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은 신유성의 손바닥 위에서 이용당했다는 사실에 차가운 분노를 느꼈다.

“역시. 탈락시켜야 할 상대는 아델라가 아니라 네 쪽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넌 너무 위험해.”

“그럼. 아델라를 탈락시킨 건 너였구나? 분명 이 능력을 통한 기습이었을 테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신유성은 디안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정면에서 승부하기엔……. 아델라에 비해 넌 너무 약하니까.”

짧지만 너무나도 정곡을 찌르는 한마디. 이제 도망갈 방법조차 없는 상황에서 디안은 신유성을 보며 마지막 결의를 다졌다.

“그래? 그럼 어디 확인해보자고. 계속 전해져 내려온 우리의 술식과……. 권왕이 키운 천재. 둘 중 누가 더 강한지.”

이건 기습과 도망 그리고 술수.

마침내 그 끝에 도달한 디안의 최초이자 마지막 정면승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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