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43화 (243/434)

제243화

단 10분.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벨벳과 에이미는 서로 화목하게 웃으며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평화로웠던 일상은 이제 깨져버렸다.

“……헤헤, 미, 미안 화났어?”

대체 무슨 장난을 친 건지.

에이미가 식은땀을 흘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벨벳은 너무나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용서할 수 업서.”

벨벳은 자신의 케이크를 멍하니 응시했다.

“벨벳은 마지막에 딸기를 먹으려고 계속 아꼈는데…….”

“자, 장난이 심했지?”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에이미는 자세를 낮춰 꼭 벨벳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 그럼 냉장고에 있는 딸기 꺼내올까?”

“……그건 그냥 딸기가 아니어써. 딸기에 설탕시럽을 두르고 냉장고에 얼린 거야.”

에이미에게 딸기를 뺏긴 벨벳은 흥- 하고 고개를 틀더니 볼을 부풀렸다. 알에서 태어난 이래 이렇게 삐진 벨벳의 모습은 에이미조차 처음이었다.

“베, 벨벳? 화 풀어 내가 미안해! 용서받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게! 원하는 케이크도 전부 다 사줄게!”

단호했던 벨벳은 에이미가 케이크를 사준다는 이야기에 살랑살랑 천천히 꼬리가 움직였다.

“나 은아만큼은 아니지만 부자야! 원하는 건 뭐든 다 사줄게!”

살랑살랑.

벨벳은 다시 꼬리를 움직였다.

이렇게 반응이 있다는 건 좋은 신호.

“화풀어 벨벳~ 다시는 이런 장난 안할게. 응?”

에이미가 애교를 부리며 콕콕- 볼을 누르자. 벨벳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화 안 나써…….”

“내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오늘은 쏜다!”

짠- 하고 에이미가 카드를 내밀자. 벨벳은 더욱 세차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 그럼…… 케이크 말고 다른 거도 시켜도 갠차나?”

이미 설탕시럽을 코팅한 딸기 같은 건 진작에 잊은 모양. 에이미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당연하지!”

에이미의 즉답에 벨벳은 다리가 4개나 들어 있다는 전설의 치킨을 강력 어필했다.

“벨벳은 사줘~ 사줘~ 사족보행 치킨~”

“그럼 딸기는 용서해주는 거다?”

“벨벳은 큰 드래곤 될 거야! 그런 장난은 이미 잊었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벨벳과 에이미의 분위기는 다시 화목해졌다.

하지만 행복해하는 벨벳을 보니 에이미는 또 장난기가 솟는지 툭- 하고 농담을 던졌다.

“근데 다리는 전부 주문한 사람이 먹는 거 알지?”

툭.

계속 살랑이던 벨벳의 꼬리가 움직임을 멈추고 바닥에 떨어졌다.

“……진짜?”

충격을 받은 벨벳이 굳은 표정으로 묻자. 에이미는 검지로 탕탕 총을 쏘는 시늉을 하며 찡긋 윙크를 날렸다.

“장난!”

“캬항~ 벨벳 깜빡 속아써!”

하하호호-

훈훈한 분위기.

둘만 남는 것에 스미레가 걱정한 것과 달리 에이미와 벨벳은 제법 죽이 잘 맞았다.

*     *      *

강한 열기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황야.

“안녕하세요. 류진.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당신은 절 모르겠지만요.”

추가 달린 체인을 들고 미엘은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스윽.

“가상포탈이라는 거 참 신기하지 않나요? 이렇게나 감각이 생생한데…… 현실이 아니라니.”

류진은 계속해서 말을 거는 미엘을 향해 대답 대신 검을 들었다.

탓- 써걱!

류진은 찰나에 불과한 짧은 순간에 미엘을 베어버렸다. 너무나 빠른 속도에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베어진 미엘.

하지만 검에 닿은 미엘의 몸은 그저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사아아-

사라진 미엘의 신형이 류진의 곁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그것도 이번에는 1명이 아닌 6명.

류진을 전 방위로 감싼 미엘은 여전히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답 대신 검격이라. 성격이 급하시군요. 아니면 낯을 가리시는 성격이신가요?”

부웅-!

이번에는 반원을 그려 순식간에 주위를 베어 버렸지만 미엘은 처음 서있던 위치에서 다시 아지랑이처럼 피어났다.

“이대로는 당신의 검은 영원히 닿지 않습니다.”

미엘의 말처럼 적의 특성을 파악하지 못한 지금은 대치만 이어질 게 분명한 상황. 류진은 그제야 검을 거두었다.

“이게 너의 능력인가?”

싱긋.

미엘은 류진의 질문에 상냥하게 웃었다.

“이제야 이야기를 하실 생각이 드신 건가요? 하지만 질문은 제가 먼저 드리고 싶네요.”

터벅터벅.

“가상포탈은 원한다면 현실의 오감을 백 프로에 가깝게 구현 할 수 있답니다.”

황야에서 두세 발걸음을 움직인 미엘은 무릎을 굽히더니 땅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손을 가져다 대면 흙의 질감이 느껴지고. 뜨겁게 피어오르는 황야의 열기가 느껴지죠.”

하지만 류진에게 미엘과의 대답은 시간 낭비와 마찬가지인 말장난일 뿐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음, 전 류진 씨의 감상을 듣고 싶을 뿐이에요. 예를 들자면 원본과 완벽히 같은 가짜가 있다면. 정말 그걸 가짜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미엘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끝내고 체인을 들었다.

두웅- 둥-

그렇게 미엘이 천천히 체인을 흔들자 추는 여러 잔상을 남기며 마나를 내뿜었다.

츠즈즈즉!

메마른 황야에서 가시덩굴이 솟아나 류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류진은 가볍게 가시덩굴을 썰어버렸지만 미엘의 공격은 멈추지 않았다.

화르르륵-!

이번에는 황야 전체에 아니 세상 전체를 삼켜버릴 듯 엄청난 불길이 땅에서 피어올랐다.

“윽…….”

너무나 뜨거운 열기에 류진은 미간을 좁혔지만 미엘은 아무렇지 않은 듯 불길 속에서 웃었다.

“저는 절대로 당신을 전투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입에서 직접 항복을 받아내는 건 이야기가 다르죠.”

사아아-

이번에는 주변의 공간이 바다로 변했다. 바닥을 딛고 서 있는 류진의 옆에선 물고기가 헤엄을 치며 지나쳤고 해초들이 보였다.

아무리 가짜라고 해도.

환상이라고 해도 이 감각은 진실.

폐가 아무리 공기를 갈구해도 바다 속에서 숨을 쉬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류진은 너무나 고요했고 차분했다.

보통이라면 패닉에 빠져버릴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푸른 검기를 실어 검을 휘둘렀다.

부웅-!

류진의 검이 허공을 베자.

촤아악-!

붉은색의 검기가 바닷물을 가르며 풍경은 다시 황야로 바뀌었다.

“공간 채로 베어버리다니 보기보다 무식한 짓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제 능력에 허점은 없습니다.”

미엘은 가소롭다는 얼굴로 다시 추를 흔들었다. 그러자 더욱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 태양을 바라봤다간 단숨에 눈을 실명시킬 정도로 엄청난 빛이 주변을 비췄다.

하지만 류진은 여전히 차분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정말 네 능력이 단점이 없는 완전무결의 최면이라면……. 왜 너는 이 장소를 택했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움찔-

미엘이 자신도 모르게 눈을 찡그리자 류진은 피식- 웃어주었다.

“굳이 너는 이 탁 트인 장소에서 내 앞으로 직접 걸어왔지. 처음에는 최면을 걸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류진은 손바닥으로 주변을 훑더니 입꼬리를 올려 미엘을 비웃었다.

“……속아주기엔 너무 엉성한 대본이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 당신이 처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당신의 검으론 절 벨 수 없고 영원히 고통만 받을…….”

미엘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류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넌 뭐가 그렇게 두려워 내게 항복을 강요하지?”

“그, 그건…… 당신이 승산도 없는 전투에 고통받지 않도록 저 나름의…….”

“그렇다면 다시 묻지. 왜 이런 탁 트인 장소를 택했지? 마치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처럼 말이야.”

류진의 말에 미엘은 풋- 하고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겠군요. 제 능력과 이 장소가 무슨 연관이 있죠?”

류진은 미엘이 아닌 허공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넌 능력을 쓰기 위해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했던 게 아닌가?”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나와 가까운 곳에 있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잘 숨는 것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이 숨지 않았다고 상대를 속이는 거다.”

콰악-

류진이 땅에 검을 박아 넣자 공간이 조금씩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네가 숨으려 한다면. 너는 이 장소가 숨을 곳이 없다고 나를 속이는 게 효과적이란 이야기지.”

류진의 은월검에는 항마의 힘이 없었다. 덕분에 검을 박아 넣은 것만으로 황야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오진 않았지만, 류진의 검이 닿은 곳은 계속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건. 네 본체가 내 가까이 숨어 있다는 뜻이지.”

류진은 마나의 흐름을 따라 검을 휘둘렀다.

콰앙!

건물의 벽 같은 게 검에 걸렸지만 류진은 단숨에 부숴버렸다.

“벼, 변한 건 없습니다! 어차피 환각을 깨지 않는 이상 당신이 나를 찾을 확률은…….”

“……그렇게나 시끄럽게 떠들며 항복을 종용한 이유는 네게 시간이 없기 때문이겠지.”

당황한 미엘이 꿀꺽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자. 류진은 주변을 향해 검을 휘두르며 천천히 미엘의 위치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넓은 범위의 공간을 다루는 건 마나소모가 큰 일이다. 내가 항복하기 전에 마나가 떨어진다면 낭패겠지.”

“큭-!”

외통수.

마천루의 류진이 감이 좋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차마 알지 못했다.

‘일단. 도망…… 쳐야 해!’

패배를 직감한 미엘은 환영이 유지되는 지금 도망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단 한 걸음을 움직인 순간.

“금방 찾았군.”

류진은 그 미세한 진동만으로 미엘의 위치를 찾아냈다.

“너와 달리 고통 없이 베어주지.”

천하패검(天下敗劍)

일검(一檢)

천경(天傾)

류진의 검이 다가오는 짧은 찰나.

미엘은 눈앞의 세상이 기울어지며 공간 자체가 무너지는 착각이 들었다.

지금 움직인다 한들 저 검격을 피할 수 있을까?

‘불가능해.’

독일의 뮌헨 아카데미는 대빌런 전이 특기였다. 아무래도 인간을 상대로 하는 만큼 가장 중요한 것은 정보 수집.

‘그렇다면…….’

그렇기에 미엘은 류진이 무엇을 벨 수 없을지 알고 있었다.

화아악!

갑자기 바뀐 풍경은 병실.

아니나 다를까 류진은 검격을 멈춘 채 누군가로 변한 미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꺄악! 오, 오빠……. 왜 그래? 무, 무서워…….”

류밍으로 변한 미엘이 손바닥을 내밀며 겁에 질린 모습을 취하자, 류진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미엘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으로 변한다면 내가 베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나?”

“저, 정말 왜 그래?”

도망치기 위해 미엘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류진은 분노를 갈무리하며 검을 꽉 쥐었다.

“그 아이의 모습으론 절대 내 검을 멈출 수 없을 거다.”

탓-

“오히려 류밍은 어떻게든 적들을 베어 넘겨야 할 나의 이유이자 내 모든 것이다.”

류진은 짧은 도약과 함께 단숨에 미엘을 베어냈다. 파괴된 공간 너머로 황야의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