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1화
어두운 암운 속에서, 얼기설기 이어진 거대한 다리 뼈대가 한 걸음 움직였다.
쿠웅-!
재료로 소진된 시체가 강할수록 소환수도 강해진다는 언데드의 특성을 백분 살린 최강의 언데드, 본 드래곤.
하지만 스미레의 앞에선 그런 본 드래곤조차 순한 양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처음보다 엄청 얌전해졌네요.’
흉악한 비쥬얼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한 본 드래곤의 행동은 스미레를 제대로 주인으로 모시고, 컨트롤이 되어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서머너 링크.”
[소환사의 마나가 소환수에게 이전 됩니다.]
[소환수 : 본 드래곤]
[보유하신 마나의 32%가 본 드래곤의 에너지로 변환됩니다.]
화륵-
스미레에게 마나를 전해 받자 본 드래곤의 텅 빈 눈에 푸른빛이 일렁였다.
진정으로 본 드래곤의 주인이 된 스미레. 마나에 동화된 본 드래곤이 몸을 숙이자 스미레는 본 드래곤에게 올라탔다.
촤아아악!
뼈대밖에 남지 않은 본 드래곤의 날개가 펼쳐졌다. 가죽조차 남지 않은 날개에 우웅- 소리를 내며 둘러지는 푸른 마나.
본 드래곤은 실체화된 마나로 가죽을 대신해 힘차게 날갯짓을 시작했다.
펄럭! 펄럭-!
본 드래곤의 날갯짓은 마치 헬리콥터를 방불케 하는 거센 돌풍을 만들며 하늘 높이 올라갔다.
산보다 더 높이.
섬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아니, 하늘에 뜬 구름조차 제쳐버리며 스미레는 본 드래곤을 타고 비상했다.
땅이 아득하게 보이는 높은 위치에 겁이 날 법도 했지만 스미레는 본 드래곤과 교감이 된 덕분인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번쩍!
그리고 그런 스미레의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 번개.
‘저건…….’
누가 봐도 명백한 김은아의 흔적에 스미레는 고스트크루즈를 보며 하강을 명령했다.
“저 장소로 가주세요!”
경기의 초반부터 김은아와 합류에 성공한 것이다.
* * *
에이미는 스크린 속 웅장한 모습의 본 드래곤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벨벳도 드래곤이니까. 언젠가 저런 거대한 드래곤으로 변할 수 있는 건가?’
하지만.
빨대로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행복해하는 벨벳을 보자 에이미는 좀처럼 드래곤의 모습이 연상되지 않았다.
‘흐음…….’
굳이 드래곤다운 점을 찾자면 귀여운 뿔과 꼬리가 달렸다는 정도.
너무 빤히 바라본 걸까.
서로 눈이 맞자 벨벳은 에이미를 마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캬항-?”
벨벳의 기분에 따라 살랑살랑 움직이는 꼬리.
‘아무리 봐도 드래곤보다는…….’
그래.
에이미는 분명 이런 동물을 본적이 있었다.
‘강아지에 가까운 거 같은데…….’
생각을 읽지는 못해도 기분은 잘 읽는 벨벳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에이미를 보았다.
‘먼지 모르겠지만 먼가 무례한 생각을 하고 이써…….’
하지만 지금은 심증뿐.
물증이 없기에 이번만큼은 넘어가야 했다.
* * *
브리이드[bʲɾʲiːdʲ]의 불씨.
화르륵- 핏-
디안은 왼손에서 피어오른 불길을 잠재우며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더 약하군.”
디안의 앞에서 한쪽 팔을 늘어뜨린 건 다름 아닌 사쿠라였다.
[배리어가 69% 남았습니다!]
[데미지 31%]
상성의 차이일까.
실력의 차이일까.
사쿠라는 디안의 일격에 배리어가 부서지며 사수에게 가장 중요한 팔을 다쳐 버렸다.
“큭…….”
사쿠라가 분한 마음에 디안을 노려보아도 바뀌는 건 없었다.
콰앙!
디안이 거대한 대검을 땅에 내려찍자 단단한 돌이 파편이 되어 튀겼다.
순식간에 가려진 시야.
덕분에 활을 쏠 수 없었던 사쿠라는 바람으로 흙을 밀쳐내려 했지만.
“타오르는 불 앞에서 바람은 그저 무의미하지.”
대검에 불을 두른 디안이 사쿠라를 정면에서 쳐냈다.
쩌억!
바람의 힘을 갑옷처럼 둘러 데미지를 최소화했지만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
[배리어가 32% 남았습니다!]
[데미지 68%]
덕분에 사쿠라의 몸은 공처럼 땅을 굴렀다. 디안은 넝마가 된 사쿠라를 보며 의문이라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의문이군. 이 실력으로 어떻게 결승전까지 올라온 거지?”
하지만 이렇게 큰 전력 차이에도 사쿠라는 디안의 말을 인정 할 수 없었다. 사쿠라는 홀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아니었다. 사쿠라에겐 자신을 응원해주는 이들이 있었고, 질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런 식의 일방적인 패배는 용납할 수 없었다.
“네가 뭘 알아? 그리고…… 아직 경기는 끝난 게 아니거든?”
꾸욱-
고통을 참기 위해 사쿠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가 아닌 가상 포탈 주제에 고통 하나는 더럽게 생생했다.
“포효의 바람!”
사쿠라가 마나를 쥐어짜 내며 양손을 뻗자. 사자의 형상으로 실체화 한 바람이 덤벼들었다.
하지만.
부웅!
사쿠라가 쏘아낸 바람의 사자는 디안이 휘두른 단 한 번의 칼질에 몸이 갈라졌다.
“의미 없는 발악……. 정말 이게 전부인가?”
디안의 불길은 격이 달랐다.
세대를 거치며 더욱 더 강렬해진 디안의 술식 앞에서 사쿠라의 바람은 오히려 불길을 키울 뿐이었다.
‘……어떻게든 거리는 벌렸지만.’
기회는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싶었지만 사쿠라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미 패색이 짙어졌다는 건, 이미 승부가 결정이 났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포기하는 모습을 보일 순 없어…….’
사쿠라는 궁도장을 나오며 모두에게 자랑스럽게 소리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니까! 저만 믿어요! 제가 아버지에게 배운 궁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두에게 보여줄 테니까.]
실은 그런 말을 한 이유가 자신감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국가 대항전을 거치며 결승전에 이르기까지 사쿠라는 수없이 한계를 느껴 왔다.
그중에서는 자신의 승리가 운이 아닐까? 하는 경기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긴장했다는 사실조차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던 건, 입장의 변화 때문이었다.
사쿠라는 언젠가부터 자신이 항상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가 그리 강인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쿠라.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스스로를 의심하고, 결국에는 인정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자신의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땐 너무 기뻤다.
[우리 궁도부의 방식이……. 낡은 게 아닐지,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의 방식이 필요하지 않은 게 아닐지……. 외면받고 도태되는 현실 속에서 난 나도 모르게 인정하고 말았단다.]
늘 강했던 아버지가 자신에게 솔직한 말을 털어놓는 게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이 낡은 방식에서만 지킬 수 있는 가치가 있다는 걸. 나는 왜 잊고 말았을까? 이 가치로 누구보다 빛나는 너를 보며…… 이젠 반성하게 되는구나.]
그래. 그건 아버지가 자신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사쿠라 언니! 힘내요!]
[우승할 수 있어요! 누나는 저희 궁도장의 자랑이에요!]
[아니! 사쿠라는 우리 일본의 자랑이지!]
자신의 가벼운 화살에 담긴 무게는 절대 가볍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 선 사쿠라는 모두를 대표하고 있었다.
팟-
1초보다 짧은 찰나.
활을 든 사쿠라는 잠깐의 망설임이나 조준도 없이 정확히 디안의 미간을 향해 쏘았다.
팡!
그야말로 속사(速射)
자신의 템포를 빠르게 가져 상대의 흐름을 뺏어 오고 있었다.
화르륵!
대검을 통해 쳐낼 수 없었는지 디안은 불을 이용해 화살을 태웠지만 그건 잘못된 방법이었다.
팡-! 팡! 팡!
속사를 택한 사쿠라는 디안에게 쉴 새 없이 화살을 쏘았다.
촤아악!
자신에게 달려오는 디안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쪽으로 슬라이딩을 하며 끝까지 화살을 상대에게 퍼부었다.
팡-! 팡! 팡!
다리. 머리. 허벅지.
정확하게 불길의 빈틈을 노린 화살이 한 발 꽂혀 들어갔다.
[배리어가 95% 남았습니다!]
[데미지 5%]
디안이 매섭게 달려들어도 둘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팡-! 팡!
[배리어가 87% 남았습니다!]
[데미지 13%]
팡!
[배리어가 82% 남았습니다!]
[데미지 18%]
상대에게 바람이 통하지 않는다면 굳이 상대를 향해 조준할 필요가 없었다.
사쿠라는 스스로 바람의 흐름을 타고 자신의 몸을 맡기고 있었다.
주으윽- 팡! 파바밧!
자세를 잡을 때는 순식간에 화살을 퍼붓고. 앞쪽에서 뒤로 바람을 불어 엄청난 거리를 물러났다.
촤아악!
매끄러운 돌바닥에서 뒤로 물러 나는 사쿠라의 슬라이딩은 더욱 빨라졌다.
주으윽- 팟! 팟! 팟!
이제 사쿠라의 궁술은 정돈된 속사포 같았다.
[배리어가 75% 남았습니다!]
[데미지 25%]
‘단 한 순간도 방심하면 안 돼.’
조금이라도 자세가 무너지면.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빈틈을 보이면 이제 두 번의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디안이 화살로 데미지를 받으면 받을수록 사쿠라는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배리어가 48% 남았습니다!]
[데미지 52%]
물론 그 정점은 디안이 절반 이상에 해당하는 피해를 입은 순간이었다.
화르륵-
디안의 불꽃은 소유주가 피해를 입고 패색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검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불길의 세기도 마치 주인의 패배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 더욱 강렬해졌다.
“엄청난 정신력이군. 실력에 관한 발언은 취소하도록 하지.”
무엇보다 사쿠라를 거슬리게 만드는 건 디안의 너무나 담담한 태도였다.
디안은 제대로 된 거리조차 좁히지 못한 채 50% 이상의 데미지를 받았음에도 너무나 담담했다.
마치 패배 따윈 염두에 두지 않은 모습. 사쿠라는 분위기를 타 상대를 압도하고 있음에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이 녀석 뭔가 믿는 구석이…….’
그렇다면 차라리 상대가 방심한 지금 끝내버리면 되지 않을까?
사아아-
사쿠라는 신중하게 화살에 마나를 실었다. 화살에 바람의 속력이 더해지면 5% 10%가 아닌, 남아 있는 대부분의 배리어를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파앙!
그러니 이번에도 사쿠라는 디안이 불길을 이용해 막거나 피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디안은 마치 전투를 포기한 것처럼.
쿠웅-!
사쿠라의 화살에 오히려 정면으로 머리를 가져다 댔다.
[배리어가 1% 남았습니다!]
[데미지 99%]
[누적 데미지가 100%를 채우면 포탈 밖으로 퇴출됩니다!]
그러나 디안은 전투를 포기하거나 실수를 한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다.
화아아아악-!
오히려 오른팔에서 치솟는 검은 불길을 보며 지루한 전투가 끝났다는 듯 확신한 얼굴로 말했다.
“3초. 그 안에 끝내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