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자신의 방에서 갑자기 포탈이 열린다면 무슨 반응을 해야 할까?
“이, 이건…….”
바나나 우유를 마시는 신유성의 앞에.
치지지지직!
츠왓!
심상치 않은 소리를 내며 균열이 생기더니 포탈이 열렸다.
저벅저벅.
그곳에서 걸어 나온 건 시무룩해진 얼굴의 벨벳.
“……벨벳?”
신유성은 황급히 바나나 우유를 놓고 벨벳에게 달려가 자세를 낮췄다.
힐끗.
벨벳은 힘이 없는 얼굴로 신유성을 흘겨보더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벨벳……. 스미레 엄마한테 혼나써…….”
스미레에게 혼나다니 무슨 잘못은 한 걸까. 하지만 벨벳의 귀여운 투정은 신유성에게 그런 궁금증도 잊게 만들었다.
“벨벳이 오늘 스미레에게 혼이 났구나?”
끄덕끄덕.
자리에서 주저앉은 벨벳은 억울함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마자……. 벨벳으은 스미레 엄마가 좋아할 줄 알고 그랬는데……. 아니어써…….”
처음으로 혼났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충격이었던 걸까. 벨벳은 꼬마 주제에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었다.
“캬후우우…….”
아무리 참으려 해도 실실 웃음이 나올 것 같은 위험한 상황. 신유성은 고개를 숙인 벨벳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스미레가 네 마음을 몰라줘서 무척, 서운했구나 벨벳?”
끄덕끄덕.
그 모습을 본 신유성이 그저 웃자. 벨벳은 계속 푸욱- 푸욱- 어른처럼 한숨을 쉬었다.
“캬후우…… 사실 벨벳도 알고 이써…… 스미레 엄마는 벨벳을 사랑해……. 그래서 혼냈어! 분명 스미레 엄마도 슬플 거야. 캬후…….”
역시 벨벳은 드래곤이었다.
평범한 어린아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영특했다. 자신을 혼낸 스미레의 기분은 물론이고 잘 되길 바라는 마음까지 읽을 수 있다니.
“그래도 벨벳은…… 혼나는 거 말고 칭찬받고 싶었어…….”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괜찮은 건 아니었다. 아직 어린 벨벳에게 둘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렇구나 벨벳.”
신유성은 그런 벨벳이 그저 귀여운지. 조용조용한 목소리로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럼 벨벳은 어떻게 하고 싶니?”
흐음…….
벨벳은 턱에 검지를 대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저건 누가 봐도 김은아의 버릇이 담긴 제스처.
팟!
고민하던 벨벳이 눈을 빛냈다.
분명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벨벳은 좀 더 사랑받아야 해! 스미레 엄마에게 벨벳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줄 거야! 오늘 벨벳은! 돌아가지 않아!”
벨벳이 고민 끝에 택한 선택지는 다름 아닌 가출. 심지어 잠깐동안 집을 나가는 평범한 가출이 아닌, 국가를 넘어 다니는 국가 단위의 가출!
지이이잉!
“아빠도 벨벳이랑 같이 가자!”
강대한 마나와 함께 또 눈앞에서 포탈이 열리자. 신유성은 싱긋 웃으며 생각했다.
‘……스미레가 걱정하지 않게 메시지를 보내둬야겠는걸.’
그런 신유성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벳은 신난 얼굴로 포탈을 향해 손을 가리켰다.
“캬항-! 아빠! 빨리 저기! 저기! 이러다 닫혀!”
역시 드래곤이라도 아이는 아이였다.
* * *
정돈된 침구.
은빛의 냉장고.
흰색의 방.
모던을 넘어 쓸쓸함마저 느껴지는 기숙사의 인테리어를 둘러보며 아덴은 괜히 안쓰러움을 느꼈다.
“비앙카에는 너를 위해 최고의 숙소를 준비하라고 했건만……. 이렇게나 주변이 조용하다니 혼자 있기엔 너무 적적한 장소구나.”
“괜찮습니다. 길게 머물 생각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아델라에게 외로움은 그리 먼 단어가 아니었다. 볼테라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 지금까지 쭉 그런 시간을 보내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래도…… 간간이 그 사람과 벨벳이 보고 싶긴 합니다.”
지금은 이전에는 없던 그리운 사람이 생겼다는 점.
“그렇구나.”
아덴은 그런 아델라를 보며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 아델라에겐 정말이지 소중한…… 변화. 정말이지 감사할 따름이야.’
하지만 이 텅빈 기숙사에 아델라를 두고 떠날 생각을 하니 좀처럼 아덴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만약.
벨벳과 신유성이 지금 이 순간 아델라의 곁에 있어 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뭐…… 그리 무리한 부탁을 할 순 없는 일이지.’
아덴이 한숨을 쉬며 현실을 인정하려던 그 순간.
츠츠즈즈즉!!
기숙사의 텅 빈 장소에서 균열이 생겼고, 분산 됐던 마나가 한 곳으로 뭉쳐 포탈의 형태로 바뀌었다.
팟!
“아델라! 엄마아아아-!”
거기서 튀어 나온 건 다름 아닌 아델라가 그토록 기다린 벨벳과.
“미안. 아델라. 이런 시간에…….”
편한 옷을 입고 바나나 우유를 쥔 신유성이었다.
뻐금. 뻐끔.
얼마나 놀란 건지 아델라는 커진 눈을 깜빡이더니 뒤늦게 입을 열었다.
“……벨벳? ……당신?”
벨벳은 그런 아델라를 향해 점프까지 하며 안겨들었다.
“캬하앙-!”
“벨벳!”
정말이지 감동적인 모녀의 상봉.
“엄마 나 와써-!”
아델라는 그런 벨벳의 어리광에 미소를 머금으며 꽈악- 온 힘을 다해 안아주었다.
“……잘 왔어요. 벨벳!”
“캬항! 벨벳은 아델라 엄마 집에서 잘 꺼야! 오늘은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아델라는 왜 벨벳이 자신을 찾아온 건지는 몰랐지만 자신의 기숙사에서 묵고 가는 것은 대 찬성인 모양이었다.
기뻐한 건 아덴도 마찬가지였다.
아덴은 신유성을 몹시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유성아! 잘 왔구나! 그럼 이 아이가, 소문의…….”
“네. 저희 새로운 가족인 벨벳입니다.”
아덴은 연달아 감탄사를 뱉으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하하! 잘 왔구나! 잘 왔어! 그런데 이 늦은 시간에 너희가 어쩐 일로…….”
아덴의 질문에 신유성은 벨벳이 듣지 못하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벨벳이 스미레에게 혼났거든요.”
신유성이 비밀이라는 듯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하자. 아덴은 그저 기쁜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그렇구나! 그런 사소한 일에 상처를 받고 토라지는 것을 보면 벨벳도 영락없는 어린아이구나!”
신유성은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싱긋 웃었다.
“그럼 전. 벨벳이 연 포탈이 닫히기 전에…….”
신유성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델라라면 분명 믿고 벨벳을 맡길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벨벳은 돌아가려는 신유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아! 안 대 아빠!”
팟!
신유성의 옷 끝을 잡은 벨벳은 간절한 얼굴로 도리도리-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베, 벨벳?”
“아빠는 벨벳이랑 같이 있어야해! 돌아갈 때도 가치야!”
단호한 벨벳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츠즈즈즉-
시간을 너무 끌어버린 걸까 어느새 닫혀버린 포탈. 아덴은 신유성이 기숙사에 남는다는 이야기에 오히려 두 손 두 발을 들고 환영했다.
“그래. 유성아. 귀한 손님인 네가 벌써 떠날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벨벳은 파자마도 가져 와써!”
벨벳은 아예 작정하고 온 모양인지 가방을 열어 준비해둔 파자마를 꺼냈다.
“갈아입고 오께!”
그리곤 당연한 듯 아델라의 방에 쏙 들어 가버린 벨벳. 아델라는 그제야 신유성을 마주보았다.
“저도 당신이 좀 더…… 머물고 가도 괜찮습니다.”
아덴과 아델라.
모두가 신유성의 방문을 환영하고 있었다. 상대가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머물고 가는 것이 도리.
아덴은 신유성이 남아주길 부탁하는 아델라를 보며 편안해진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그래. 이 기회에 아델라와 유성이가 좀 더 가까워진다면 좋을 테지…….’
아델라가 인정한 이상 아덴에게 신유성과 벨벳은 약혼자와 손녀나 다름없었다.
“그래 유성아. 오늘은 머물고 가거라. 내가 떠나고 혼자 있을 아델라를 생각하니 내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단다.”
신유성에게 아덴은 스승인 유원학과 목숨을 함께한 동료이자. 대부 같은 존재였다.
“알겠습니다. 오전 중에는 파티원과 약속이 있지만……. 벨벳과 같이 돌아간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걸요.”
후욱!
그때 방문을 열며 벨벳이 튀어 나왔다. 벨벳이 입고 있는 건 언젠가 아델라에게 선물 받았던 귀여운 파자마.
“짠!”
“벨벳…… 정말 귀엽습니다.”
“캬항! 당연하지! 벨벳은 아빠랑 엄마를 모두 닮았는걸!”
마치 부부와 그 딸 같았다.
그렇게 사이좋은 가족처럼 같이 방에 들어가며 환하게 웃는 아델라의 미소는 오늘 아덴이 본 아델라의 얼굴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아델라…….’
주륵.
그 지옥 같은 전투 속에서도 흘린 적 없던 눈물을 흘리다니. 분명 나이를 먹은 탓이라고 아덴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분명 기쁨의 눈물이었다.
이제야 아덴은 무거웠던 짐을 덜고 행복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원학이 너에게는 언제나 도움만 받는 구나.’
[은빛바람이라. 거창한 이름이구나…….]
[나를 도발할 생각이냐?]
[그래. 소문을 들었거든. 파티원이 죽은 이후, 계속 혼자서 다닌다지?]
스물 근처의 나이.
아덴은 혈기가 넘친 젊은 시절의 유원학을 떠올렸다.
[겁쟁이 놈. 그리 잘난척 해봐야. 네가 홀로 바꿀 수 있는 건 없다.]
[네가 뭘 안다고!]
그 시절의 아덴은 유원학을 싫어했었다. 처음 만난 주제에 뭐든 아는 척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모습에 환멸마저 느꼈다.
[알고 있지. 넌 그냥 도망 다닐 뿐이다.]
꿀꺽 꿀꺽. 병째로 술을 마신 과거의 유원학은 아덴을 보며 씨익 웃어주었다.
[또 동료의 죽음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공포에서! 죽은 동료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물론 자신의 역린을 건드린 유원학을. 아덴은 진심으로 때려눕혀 버릴 생각이었다.
[역시 네놈은 약하군. 도망만 치는 놈이 강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러니 마주해라!]
유원학은 아덴에게 손을 뻗었다.
[나는 죽지 않는다! 내 동료들을 죽게 두지도 않아! 네가 겁을 먹고 공포에 떨 일도! 같은 슬픔을 겪을 일도 없다!]
아덴에게 내밀어진 유원학의 손은 하나의 구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덴은 유원학의 제자인 신유성을 통해 또 다시 구원 받았다.
신유성은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한 아델라의 행복을 되찾을 유일한 열쇠였다.
‘……원학아.’
오늘 따라 동료가 너무나도 그리운 밤. 아덴은 어느새 조용해진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마싰는 케이크……. 스미레 엄마 벨벳이 잘 모태써…….‘
무슨 꿈을 꾸는지 입을 우물거리는 벨벳.
새근새근.
편안한 얼굴로 잠든 아델라.
둘을 옆에 두고 잠든 신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