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트라파니 현 마레티모 섬.
에메랄드 빛 대양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식당에서 아덴은 스테이크를 썰었다.
“이렇게 바쁜 시기에 불러내서 미안하구나. 그래도…… 오늘은 너와 꼭 식사가 하고 싶더구나.”
아델라는 그저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 한 채 말없이 오렌지 시트 케이크를 보았다.
아덴에게도 아델라에게도.
오늘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매년 돌아오는 이날은 마녀 루이스가 볼테라를 얼어붙게 만든 날이었으며.
아덴은 자식과 며느리를.
아델라는 부모를.
힘없이 떠나보낸 날이기도 했다.
“……아델라.”
나이프와 포크를 놓은 아덴은 진중한 목소리로 아델라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아무런 대답도 없는 긴 정적.
아덴은 자신이 든 식기를 내려놓았음에도 아델라는 티스푼으로 눈앞의 시트 케이크를 조각내어 아주 조금 떠먹었다.
푹신한 시트.
은은한 오렌지의 향.
화이트 초콜렛의 단맛.
이건 벨벳이 먹었다면 분명 좋아할 맛이었다. 이 모든 경기가 끝나면. 이탈리아의 모든 일을 끝낸다면 꼭 이 케이크를 사서 벨벳에게 돌아가야지.
아델라는 마음속으로 딱 그 정도의 감상을 남기며 담담히 아덴에게 말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빙긋-
“날 원망하지 않느냐?”
아덴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입은 그렇지 않았다. 이전의 아델라에게라면 분명 곤란한 웃음이었다. 이게 기쁨의 웃음인지, 슬픔의 웃음인지 좀처럼 알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아델라는 달랐다.
아덴이 왜 자신을 보며 그런 얼굴로 웃고 있는지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제가, 무엇을 원망한단 말씀이십니까?”
아델라의 담담한 질문.
하지만 아덴은 좀처럼 대답이 어렵다는 얼굴로 멋쩍게 웃었다. 그는 유원학의 동료로 최강의 헌터 중 하나였지만 여전히 자신의 손녀가 어려웠다.
그 때문일까.
아덴은 아델라의 앞에서 먼저 자신의 진심을 밝혔다.
“이유야 많지 않으냐? 동상의 존재를 너에게 알리지 않은 것…….”
“그건…….”
이야기를 듣던 아델라가 아덴의 말을 끊었다. 톡- 하고 얇은 티스푼으로 이유도 없이 케이크를 조각낸 아델라는 멍한 눈으로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절 위해서…… 혹여나 제가 슬퍼할까. 하신 행동이지 않습니까?”
허어- 하고 멍하니 입을 벌린 아덴의 얼굴. 아덴은 아델라의 이야기에 퍽이나 놀란 모양이었다. 감정의 표현조차 없던 손녀가 자신을 이해해주다니. 하지만 아덴은 그 뒤 더욱 씁쓸한 표정이 됐다.
“정확히는…… 내겐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아덴에겐 아델라의 슬픔보다 무서운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손녀딸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아덴에게 무서운 건, 부모의 얼음 동상을 본 아델라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것이었다.
평소와 같은.
너무나도 차가운 얼굴로 아델라가 얼음 동상을 무감하게 지나칠까 아덴은 그게 더욱 무서웠다.
“……아델라. 너를 처음 본 순간. 난 직감했단다. 루이스의 겨울이, 그 끔찍한 기억이…… 너의 마음을 고장 내고 말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델라도.
아덴과 이렇게 솔직한 말을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아덴은 아델라를 볼 때면 줄곧 저런 표정으로 웃었다. 하지만 저 웃음이 슬픈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건 이제 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스윽-
아덴의 두터운 손이 아델라의 손을 감쌌다.
“……나를 용서하지 말거라 아델라. 나는 겁쟁이란다.”
슬픈 표정으로 웃는 아덴을 보며 아델라는 담담하게 물었다.
“무엇이…… 두려우셨습니까?”
“하하……. 그야 긴 사투 끝에 루이스의 겨울을 물리쳤음에도……. 내게 남은 건 아델라 너밖에는 없었기 때문이지. 그래서…….”
깊은 숨을 내쉰 아덴은 억지로 웃어보였다.
“차마, 너마저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순 없었단다.”
말을 모두 끝낸 아덴은 감쌌던 손을 뗐다. 아덴은 아델라가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할지 한참을 기다렸지만. 아델라는 가만히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아덴에겐 영원보다 긴 10초.
아델라는 대답 대신 엉뚱한 이름을 거론했다.
“……벨벳을 아십니까?”
“보고는 들었단다. 그…….”
“첫 만남은 알이었습니다. 제가 한 건 그 아이를 품는 일이었죠.”
신유성이 자신을 만나러 온 그 순간을 떠올리며 천천히 아델라는 기억을 더듬었다.
“냉기를 불어 넣으며. 뜨거운 알을 껴안고 있으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무척 신기했습니다.”
조금씩 말이 빨라지는 아델라의 모습은 어딘가 기뻐 보였다.
“그 때문에 알을 깨고 벨벳이 태어난 날은 조금…… 아쉬움마저 느꼈습니다.”
“네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니?”
아델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벨벳은 제 품을 기억하고, 제 마나를 받은 걸 기억한다며…… 저를 가족이라 말해주었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소중함을 느끼고.
애착을 느끼고. 가족의 빈자리를 찾아냈다니. 만약 자신의 앞에 아델라가 없었다면 아덴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리고 싶었다.
“그렇구나. 아델라……. 정말이지 기뻤겠구나.”
끄덕끄덕.
아덴의 말에 평범한 소녀처럼 고개를 끄덕이는 아델라는 기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벨벳은 정말 똑똑한 아이입니다. 착하고 귀엽고 예쁘고……. 그리고 정말이지 말랑말랑한 볼을 가졌습니다.”
아델라는 벨벳의 볼이 그리운 듯 허공을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딸밖에 모르는 아델라의 팔불출 짓은 이제 시작이었다.
“머리카락도 윤기가 흘러서 찰랑찰랑. 이렇게 쓰다듬고 있으면…… 무척 기분 좋은 향기가 납니다.”
벨벳을 떠올리는 아델라는 정말 행복해보였다. 아델라에게 늦은 동생이 있다면 분명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려 보이지만. 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얼마나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아델라는 드래곤인 벨벳을 자신의 아이라고 불렀다. 벨벳은 아덴조차 고쳐주지 못한, 아델라의 마음의 병을 고친 존재.
“아, 어쩌면 ……당연하겠죠. 벨벳은 신유성 그 사람과…… 엄청 닮아 있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
역시 루인 성의 파트너로 신유성을 선택한 건 아덴에게 신의 한 수였다.
‘유성아……. 내 절대 너의 도움을 잊지 않으마.’
아덴은 감동의 눈물을 참으며 진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무엇이 그리 닮았더냐?”
“루인 성에 간 날. 그 사람은 절 안아주었습니다. 툭하면 안기는 건 벨벳의 버릇이기도 합니다.”
김석한이었다면 당장이라도 신유성을 찾아와 소란을 피웠을 터이지만 아덴은 오히려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또 닮은 점이 있더냐?”
“벨벳과 그 사람을 껴안고 있으면 무척 가슴이 뛰었습니다.”
아델라는 신유성에게선 두근거림을. 벨벳에게선 따뜻한 안정을 느꼈다. 이건 전투가 아니어도 아델라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증거.
“어쩌면, 아니 분명 목숨을 건 전투보다도 더…….”
확신마저 느껴지는 아델라의 대답에 아덴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아덴에게 신유성이 가지는 의미는 유원학의 제자나 유망한 헌터 정도가 아니었다.
아덴에게 신유성이란 그야말로 아델라를 치유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어떻게든 아델라의 곁에서 가까이 두고 싶었다.
“아델라. 너는……. 유성이와 벨벳의 곁에 있고 싶으냐?”
아덴의 물음에 아델라는 짧은 고민조차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즉답했다.
“그 사람에게 전력으로 맞서고 이 경기가 끝나면……. 전 가온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아델라는 눈을 감고 신유성을 떠올렸다. 루인성에서 자신을 안아준 따뜻했던 품. 그리고 말랑했던 벨벳의 볼과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그곳이 제가 있을 장소입니다.”
이젠 강한 확신마저 보이는 아델라의 대답에 아덴은 너무나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쭉 곁에 있고 싶다는 말이니?”
입을 여는 대신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는 아델라. 아덴은 마치 현역 시절에나 볼법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미간을 좁혔다.
‘……우리 아델라를 위해서라도. 유성이만큼은 절대로 뺏길 수 없지. 내게 두 번의 실수는 없다.’
마음을 다잡는 아덴에게선 목숨을 건 결의마저 느껴졌다.
지금 아덴은 8급 헌터가 아닌 한 손녀의 할아버지로서 자신이 동원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아델라를 지원할 생각이었다.
* * *
어둠만이 짙게 깔린 고층 건물의 옥상. 검집을 쥔 류진은 칠흑 같은 공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시답지 않은 이야기라면 베겠다.”
류진의 도발에 칠흑 같은 공간에선 형광색의 빛이 뿜어져 나와 메시지를 남겼다.
[ㅋㅋㅋㅋㅋ]
팟-
“역시 너랑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넌 너무 재미가 없어. 놀릴 맛도 나지 않고. 이렇게까지 진지할 필요는 없잖아?”
번쩍이는 블링크와 함께 류진의 뒤에서 나타난 건 치트였다. 헌터들의 기준에서 전투력은 제로에 가깝기에 신유성의 일격에 박살이 났지만. 치트는 특기인 해킹을 통한 정보력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빌런이었다.
“난 말이지. 대장을 대신해서 불쌍한 너와 네 동생을 구제하러 온 거야. 이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팟-
류진의 앞에 나타난 치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헬멧을 벗더니 상어 같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잘 들어~”
밝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빠르게 말하던 아까와는 달리 헬멧을 벗은 치트의 목소리는 꽤나 늘어졌다.
“검신 그 욕심 많은 그 양반이. 몇 년이면…… 널 놓아줄까? 그 사람이 말하는…… 검술의 어쩌고~ 그게 뭔지…… 넌 정확히 알아?”
헬멧을 벗은 치트는 하마처럼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픽 웃었다.
“네가 강해진다고…… 그 사람이 만족을 할까? 네 귀여운 동생을~ 치료할 아티팩트를~ 정말 줄까?”
치트의 말은 하나하나가 류진의 정곡을 찔렀다.
“알고 있잖아? 검신은~ 네 동생으로 네 고삐를 잡고 있다는 걸. 자신의 욕심을 채울 때까지…… 그 고삐를 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도. 응?”
핏- 하고 치트는 힘없이 웃었다.
류진은 쯧- 하고 혀를 찼지만 동생이 연루된 일인 만큼 냉정히 생각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걸 보니. 대충은 알고 있었나 보네. 그렇게…… 머리가 꽃밭은 아닌가 봐?”
치트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후후- 하고 웃으며 서류뭉치를 류진에게 건넸다.
“잘 생각해. 설령 잘 풀려서 검신 그 양반의 욕심을 이뤄줬다고 해도…… 그때 네 동생이 몇 살일까? 응?”
류진은 치트의 이야기에 무엇 하나 반박할 수 없었다. 기세를 잡은 치트는 빙그르르- 돌더니 류진의 뒤편에서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툭툭- 처박으며 중얼거렸다.
“대체~ 그 중요하고 아까운 시간을 몇 년이나…… 병실에서 보내게 할 거냐고? 아픈 사람을 두고 말이야. 으응~? 더럽고 치사한 녀석들…….”
류진의 앞으로 돌아온 치트는 혀를 내밀며 스윽- 검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우리도 그런 짓은 안 해. 차라리 한 번에 죽여 버리지. 이렇게 둘 거면 차라리 죽여~”
스릉.
“……입조심 해.”
참다못한 류진이 칼집에서 검을 꺼내자. 치트는 장난이라며 양손을 올렸다.
“대장도 너도 같은 피해자야. 똑같은 처지끼리 이러지 말자고~”
그리곤 킥킥- 웃으며 블링크의 빛 함께 사라지는 치트.
‘……류밍.’
서류뭉치를 받은 류진은 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