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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8화 (228/434)

제228화

베르단의 주점은 탑의 1층.

번화한 중심지가 아닌 사람들의 발길이 드문 구석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너와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군.”

“20년? 아니…… 더 오래 되었겠네. 난 아덴이나 너와 달리 아직도 술이 어렵거든.”

권왕 유원학.

마녀 아리스.

인류 최초로 탑의 60층을 정복한 모든 헌터들의 전설. 하지만 지금 둘은 제자를 키우는 스승의 삶을 택했다.

쪼르르-

유원학이 거대한 손으로 술을 따르자 아리스는 싱긋 웃으며 잔을 받아들었다.

“……그래도 오늘은 너랑 진솔한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까. 역시 마셔야겠어.”

“너도 참 별나군.”

아리스가 잔에 입을 가져다대어 입술을 축이는 정도라면 유원학은 술병을 통째로 잡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참, 앉자마자 본론이라니.”

아리스는 한숨을 쉬었지만 이미 직선적인 유원학의 화법에는 통달할 정도로 익숙해진 상태였다.

“흐음, 그냥. 너에게는 잡설 같은 거지. 예를 들어 난 말이야……. 탑의 50층을 정복했을 때 이미 한계였어.”

모든 모험이, 그리고 모든 도전이 끝난 지금에야 들을 수 있는 아리스의 이야기에 유원학은 다시 술병을 들었다.

“겉으로 봤을 땐 멀쩡해 보였다만. 아니었나보군.”

“걱정 마. 너에게 그런 눈치는 바라지도 않았어. 다만, 60층을 공략했을 때 정말 느껴버렸거든. 지금의 인류에겐 이 정도가 한계라는 걸.”

말을 멈춘 아리스는 다시 잔을 들었다. 이런 힘이라도 빌리고 싶은 건지 쓰기만 했던 술은 오늘따라 유독 맛이 달았다.

“그래서…… 검신 녀석이 그런 몸이 되었을 때, 나는 속으로 정말 감사했어.”

아리스는 무표정했지만.

목소리의 끝이 흔들렸다. 이 세상에 몇 존재하지 않는 8급 헌터. 모든 인류가 동경하는 그녀가 감정의 동요를 보이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너흰 멈추지 않았을 거잖아? 누구 한 명이 죽지 않았다면……. 분명 끝까지 도전 했을 거야.”

“……그래. 분명 그랬겠지.”

벌컥벌컥- 유원학이 술병을 모두 비우자 주점의 주인은 말없이 또 한 병을 가져다 놓았다.

유원학과 아리스.

둘은 갓 헌터가 된 순간부터 동료로서 함께했음에도 이런 자리를 가지는 것이 처음이었다.

“비록 그 순간 우리의 시대는 멈춰버렸지만. 난 지금도 너희가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해…….”

후우-

말을 멈추고 숨을 내쉰 아리스는 빈 잔을 보더니 유원학처럼 병째로 술병을 잡았다.

그리곤 벌컥벌컥-

스윽 소매로 입가를 닦은 아리스는 붉어진 볼을 대가로 용기와 안정을 얻은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난 너와는 달리 그릇이 작은 거겠지. ……아무리 숭고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내가 가진 소중한 걸 내려놓을 용기는 없었으니까.”

유원학은 그런 아리스를 바라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리스 넌 정이 많아서 탈이군.”

“아니, 우리 파티에서 가장 정이 많은 건 맹세컨대 너야.”

볼이 붉어진 아리스는 다시 벌컥벌컥- 술을 들이키더니 한심하다는 얼굴로 유원학을 바라보았다.

“잘 생각해봐. 누구보다 탑의 끝을 보고 싶었던 네가……. 도전을 포기한 건. 뭐 때문이었는데?”

아리스의 질문에도 유원학이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아리스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건 역시 검신 때문이잖아? 그런 몸이 되고 그 녀석. 검술이 모두 망가졌으니까. 그런 상태로 탑을 올랐다면…….”

“누군가는 분명 죽었겠지.”

유원학이 닫았던 입을 열자 아리스의 목소리도 한풀 꺾여버렸다.

“……난 널 알아. 만약 혼자서라도 61층에 오를 수 있다면 넌 절대 멈추지 않았을 거야. 참, 탑에 인원수 제한이 있는 게 다행이었지.”

푹-

머리를 테이블에 처박은 아리스는 비스듬히 고개를 틀어 유원학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은 말이지……. 모두 자신에게 없는 걸 갈망해. 가령, 제자를 키운다고 하여도……. 검신 그 녀석이 지금 갈망하는 건 뭘까?”

검신은 지금까지 오직 자신의 검술만을. 천하패검을 갈고 닦았다. 그건 검을 처음 쥔 순간부터 바랐던 검술의 극의에 닿기 위함이었고.

스스로가 완성된 한 자루의 검이 되려 했다.

“정말 모르겠어?”

몽롱해진 눈으로 유원학을 올려다보던 아리스는 어느새 분위기가 변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 깃든 건 근원을 알 수 없는 예리함.

“그럼…… 말이야. 원학이 네가 원한 건 뭘까?”

아리스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넌 왜 지금까지 가족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을까? 그 아이처럼. 하지만 이제 와서…… 그 아이를 거두고 스승을 자처한 건 대체 왤까?”

“아리스. 취한 거 같군.”

“또 피하는 거니?”

스윽- 좀비처럼 힘없이 머리를 든 아리스는 다시 술병을 들었다.

벌컥벌컥- 타악! 쨍그랑!

아리스가 들이키던 술병을 놓치자 테이블에 부딪힌 술병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는 유원학.

“넌 그냥……, 더 이상 소중한 걸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런 게 생기면 발이 무거워지잖아?”

풋- 하고 소리 내어 웃은 아리스는 아직도 모르냐며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했잖아. 넌 정이 많다고. 그런 너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네 꿈과 도전을 이어줄 제자가 아니라……. 그냥…….”

말을 잇지도 못한 채 아리스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려고 하자. 유원학은 두꺼운 손으로 쓰러지는 아리스를 받쳤다.

“……내가 잡념이 많긴 했다만. 이런 걸 위로라고 하다니. 너도 참 글러먹었군.”

쓰담쓰담-

잔뜩 취해버린 아리스는 유원학의 팔을 문지르며 기쁜 얼굴로 말했다.

“……오, 눈치가 조금은 생겼네?”

“나이를 먹으면 변하기 마련이지. 넌 그 나이를 먹고도 응석이라니 참 여전하군.”

오늘만큼은 어리광을 받아주는 건지 기꺼이 아리스를 들쳐 메며 유원학은 아까 들었던 말을 곱씹었다.

[넌 그냥……, 더 이상 소중한 걸 만들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런 게 생기면 발이 무거워지잖아?]

‘소중한 것이라…….’

인류 최강의 헌터에게도.

아직 어려운 것은 있었다.

*     *      *

유민서.

신강윤

신하윤.

신유성.

이렇게 4명이 한 자리에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신유성이 5살이 되기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자리를 가진 적이 제법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건 12년이나 지나버린 이전의 일.

“후훗, 어서 오렴!”

유민서의 겉모습은 하나도 변한 게 없었지만 입구에서부터 자신을 반기는 유민서의 행동을 보며 신유성은 위화감을 느꼈다.

12년 전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이 달라진 건 무엇일까. 그게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토록 자신의 어머니를 달라지게 만들었을까?

저벅저벅.

하지만 유민서는 복잡한 생각에 빠진 신유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슬픈 표정으로 다가왔다.

“내 아이……. 네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쭉 너를 기다렸단다.”

그리곤 옆에 있는 스미레를 가볍게 무시한 채, 화악- 신유성을 안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신유성은 한 걸음 물러나는 걸로 그런 유민서를 가볍게 제지했다.

“오늘 신오가문을 찾은 건 이야기를 하기 위함입니다.”

아직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신유성의 행동. 유민서는 아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참, 감동적인 재회지?”

그렇게 말한 신하윤은 스미레를 보며 싱긋- 웃어더니 반갑다는 듯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까 전 까지만 해도 죽일 듯 굴었던 신하윤의 변한 태도.

아버지인 신강윤은 진중한 목소리로 신유성에게 부탁했다.

“……너에겐 사죄하고 싶은 것도 있으니 괜찮다면 우리에게 먼저 이야기 할 기회를 주면 좋겠구나.”

“우리도 네 빈자리를 보며 느낀 게 많거든.”

그 옆에서 신하윤까지 거들자. 신강윤은 준비했던 수를 띄웠다.

“우리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내가 준비한 게 있단다.”

팟-

신강윤이 홀로그램으로 신유성 앞에 띄운 건 한 장의 계약서였다.

“……이건?”

“네가 다시 신오가문으로 돌아온다면 얻게 될 것들이다. 하윤이와 마찬가지로 넌 유수 컴퍼니의 지분은 물론이고. 추후에는 신오 길드의 지분까지 얻게 되겠지.”

신강윤의 간략한 설명과 함께 유민서는 간절한 눈으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우리의 진실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니 좋게 생각해주렴…….”

“맞아 내 몫을 줄여서라도 기꺼이 양보할게. 특히. 유성이 넌 신성그룹의 후계자랑 사이가 좋으니. 유수컴퍼니를 가지고 있으면 아~주 좋은 기회가 많을걸?”

신하윤이 김은아를 언급하자. 신유성은 오히려 표정이 굳었다. 자신을 소중한 사람으로서 믿어주는 김은아의 호의를 그런 식으로 이용할 생각은 추후도 없었다.

“그냥 누구나 하는 실수일 뿐이야. 네가 이번 한 번만 잊어준다면 우린 돌아갈 수 있어. ……단란했던 가족으로.”

이젠 신유성의 감성을 건드릴 생각인지 유민서는 슬픈 얼굴로 입을 열었다.

“……떠올려주렴. 분명 우리에게도 좋은 순간은 있었을 거야.”

4살.

아직 특성을 각성하기 전.

유민서는 감기에 걸린 신유성을 극진하게 보살핀 적이 있었다.

[걱정하지 마렴. 인간에게 고통이란 건, 강해지기 위한 약 같은 거란다. 이런 시련은 전부…… 더 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야.]

비록.

유민서의 모든 행동들은 자신의 꿈을 대신할 인형을 키우기 위해서였지만 신유성은 그 행동에서 작은 안도를 느꼈다.

‘만일…….’

자신이 F급 특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머니인 유민서와 아버지인 신강윤의 기준을 만족 했다면 지금 신유성과 가족들은 어떤 관계였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신오가문의 일원들과 함께인 자신의 모습은 그려지지 않았다.

반면…….

꽈악-

신유성을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스미레를 바라보았다.

‘……유성 씨!’

눈빛만으로 절실하게 자신을 응원하는 스미레를 보니 웃음이 나올 거 같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는 관계. 스미레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자신을 그려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에게 가족은…….’

신유성은 자신의 스승 유원학을 떠올렸다. 언제나 표현은 투박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을 위한 진실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제가 이곳에 온 건…….”

신유성이 입을 열었다.

“두 분과 누나를. 그리고 12년 전의 자신을 마주하기 위함입니다.”

이건 신유성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신유성이 신오가문에 온 건 버려졌던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기 위함이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이 장소에서 두 분께 정중히 부탁드리고 싶었습니다.”

꽈악- 신유성은 스미레의 손을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스러운 행동에 유민서와 신강윤의 표정이 굳었지만 신유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는 5년의 시간보다, 더욱 긴 12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신유성은 꾸벅-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 시간 동안. 제게 있던 빈자리는 피를 나눈 사람들보다 더 소중한 사람들이 채워주었습니다.”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인 유민서와 신강윤은 진짜 가족일지언정. 신유성이 원한 가족은 아니었다.

“두 분의 말씀처럼. 저는 신오가문의 사람이 아닙니다.”

신유성이 생각하는 가족이란 이런 게 아니었다.

그래. 가족이란.

마치 스미레의 말처럼…….

“돌아가자. 스미레.”

“네? 네!”

자리에서 일어난 신유성이 돌아서자. 스미레는 기쁜 얼굴로 신유성을 따라나섰다.

“정말 후회하지 않겠니?”

그렇게 문을 나가려는 순간.

방금 전 살갑게 대하던 유민서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갑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대답 없이 신오가문을 나섰다.

저택을 나가 좀처럼 거리가 멀어져도 유민서의 말처럼 후회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된 속박에서 풀려난 듯 발걸음은 가볍고 기분은 자유로웠다.

“유성 씨! 같이 가요!”

신유성은 종종 걸음으로 다가와 손을 잡아주는 스미레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가족이란 건…….’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절대적인 나의 편. 그건 절대 신오가문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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