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그래.
저렇게 먹고 싶어 하는데.
그냥 딱 벨벳이 원하는 음식 정도만 사주는 거야!
“벨벳 준비 됐지!”
“캬항-! 사줘- 사줘! 사족 보행 치킨!”
“다른 먹고 싶었던 것도 있으면 지금 말해. 전부 사줄 테니까.”
리미트가 해제되어 당당하게 카드를 사용하는 김은아와 호기심 덩어리인 벨벳은 환상의 조합이었다.
“허걱! 그럼 나! 이거도 먹고 시퍼써!”
“좋아 시켜버리자!”
“지, 진짜!? 그럼 이거랑 요거랑 요거도?”
“다 시켜!”
주문한 금액만 이미 세 자릿수.
김은아와 벨벳은 순식간에 부실 전원을 먹이고도 남을 만한 음식을 주문해버렸다.
‘……그래 음식 몇 개. 시키는 정도야.’
제법 금액이 됐지만 김은아는 이게 ‘음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두 면죄부를 주어버린 모양이었다.
“캬항! 카드라는 거 정말 대다내! 근데 은아 엄마는 이러케 좋은 걸 왜 안 쓰려고 했던 거야?”
김은아는 순진한 얼굴로 물어오는 벨벳의 질문에 헛기침을 했다.
“……크흠, 그건 말이지. 내가 카드의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가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야.”
끄덕끄덕.
김은아의 말을 경청하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벨벳.
“하지만- 벨벳의 눈에 은아 엄마는 이미 대단한 사람이야!”
김은아를 올려다본 벨벳이 너무나도 진지하게 말을 하자. 김은아는 풋- 하고 웃으며 물었다.
“그래? 왜?”
“은아 엄마는, 그렇게 카드를 안 쓰는 게 중요한 건데도! 벨벳을 위해서 카드를 썼어!”
어디서 연설이나 말의 기술이라도 배운 걸까? 이런 기회가 오면 벨벳은 평소보다 묘하게 말을 잘했다.
“스미레 엄마가 말했어! 남을 위할 수 있는 사람은 상냥한 사람이고! 강한 사람이라고! 은아 엄마는 이미 대단한 거야!”
나름의 논리는 물론이고.
평소보다 말까지 또박또박 잘하는 벨벳의 일장연설에 김은아는 민망한지 볼이 붉어졌다.
“됐어. 뭘…… 이런 거 가지고 대단하긴.”
그렇게 말한 벨벳은 힐끔.
김은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 은아 엄마는 그거 알고 이써?”
“응? 뭘?”
벨벳은 김은아의 대답에도 힐끔힐끔 눈치만 살폈다. 마치, 자신이 이런 말을 꺼내는 게 엄청난 죄인 것처럼 퍼뜩 고개까지 저었다. 물론 그렇다고 말을 꺼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니야. 그냥! 포켓에서 봤는데. 우비라는 옷이 있으면 비가 오는 날에도 놀 수 있대…… 물론 벨벳은 없지만…….”
김은아는 그 말을 끝으로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벨벳의 모습에 생각이 깊어졌다.
‘……그러고 보니. 최근 쭉 장마였지?’
김은아는 벨벳의 쓸쓸한 표정을 본 것만으로 우비가 없어서 밖에도 나가지 못하는 벨벳의 모습이 그려졌다.
벨벳은 심심한 날에는 종종 부실을 나가 드넓은 가온의 부지를 돌아다녔다. 근데 그까짓 우비가 뭐라고 벨벳에겐 그런 외출조차 허락되지 않다니.
‘……이깟 우비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벨벳을 위해 김은아는 말없이 포켓으로 우비를 주문하려고 했다.
“벨벳은 노랑색……. 잘 보여서 위험하지 않고. 오리 모양이 제일 귀여운 거 같아…….”
물론 그 와중에 착실하게 취향을 어필하는 벨벳.
스윽-
자세를 낮춰 마주 본 김은아는 진지한 얼굴로 벨벳에게 말했다.
“그렇게 기죽을 거 없어. 우비도 주문했어. 그까짓 우비가 얼마라고.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다 말해.”
“캬, 캬항…… 은아 엄마!”
재계 1위의 손녀와 드래곤 헤츨링의 감동적인 신파극. 하지만 가지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니 그건 너무 위험한 발언이었다.
드래곤에게 가장 어울리는 단어 중 하나는 ‘탐욕’ 드래곤에게 멋진 물건과 보물을 모아 레어를 꾸미는 건 태생적인 본능이었다.
“지, 진짜? 으, 음식 말고…… 다른 거도 다 갠차나?”
아직도 벨벳이 걱정 어린 얼굴로 묻자. 김은아는 어른이라도 된 듯 하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네 나이 때는 돈 걱정하는 거 아니야. 지금 좀 써도 나중에 채워 넣고 갚으면 되지. 얼른 말해봐.”
김은아의 상냥한 목소리에 벨벳은 그제야 용기를 냈다.
“캬, 캬항! 지, 진짜? 그럼…….”
벨벳은 뒤적- 뒤적- 장난감 더미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작은 수첩을 하나 꺼냈다.
벨벳은 도저히 끝이 보이지 않도록 빼곡히 적혀 있는 리스트 중에 하나를 꼽았다.
“벨벳은…… 이거!”
[어린이도 쉽게 입문! 초보자용 낚시 세트! - 259,200원]
벨벳이 고민 끝에 리스트에서 고른 건 뜬금없는 낚시 세트였다.
“어엉? 이건 왜?”
장마가 길었으니 우비는 이해가 되지만 갑자기 낚시 세트라니. 도통 알 수 없는 벨벳의 취향에 김은아가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벨벳. 포켓으로 봤어! 이것만 있으면 저기 호수에서 맛있는 생선을 잔뜩 잡을 수 있어!”
벨벳은 자랑스럽게 낚시로 생선을 낚겠다고 선포했다.
‘혼자 있을 땐 벨벳도 심심할 테니. 취미를 가지는 것도…… 좋으려나?’
꾸욱-
그렇게 김은아가 정체불명의 낚시 세트를 추가로 주문하자. 벨벳은 감동한 얼굴로 눈을 빛냈다.
김은아는 그런 벨벳의 눈을 바라보자 뭔가 해주고 싶은 게 많아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가지고 싶은 건 이게 끝이야? 더 골라도 되는데.”
그래 이까짓 푼돈.
벨벳이 이렇게나 원하는데 그까짓 자존심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얼른. 괜찮으니까.”
꼬임에 넘어간 김은아가 정신을 못 차리는 그 순간. 벨벳은 스미레가 사고 싶어 했던 물품들의 리스트까지 꺼내 들었다.
“지, 진짜? 그러어엄…… 벨벳 스미레 엄마가 갖고 싶어 한 물건도 적어 뒀어!”
“좋아 보여줘.”
김은아는 벨벳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밥을 해주며 고생한 스미레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큰돈도 아깝지 않았다.
[상급자용 베이킹 쿠킹 세트! - 59,000원]
[벚꽃 그릇 4종- 152,000원]
[브라보 스테인리스 증류기 - 131,970원]
[프리미엄 테이블 스푼 10인 세트 - 320,000원]
[리온 특제…….]
[…….]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쇼핑이 끝난 벨벳과 김은아. 벨벳은 그렇게나 원했던 치킨의 다리를 양손에 하나씩 잡고 뜯으며 신나서 흥얼거렸다.
“벨벳은 행복해. 정말 행복한 드래곤이야…….”
드드드드-
한편 안마기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듣고 있던 에이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드래곤이란 거, 무섭군. 무서워~ 정말 무서워~ 그 은아를 저렇게 바보로 만들어 버리다니~’
* * *
신성그룹의 지부장.
그리고 김은아의 어머니인 김윤하는 이번 분기의 매출이 정리된 중요한 파일들을 검토 중이었다.
“……같은 국가라도 특정 지역만 매출이 많이 올랐네요?”
“아무래도 땅이 넓어. 문화권이 다르다 보니 차이가 생긴 것 같습니다.”
“확. 실. 히. 마케팅의 문제는 아니라는 거죠? 좋아요. 몇 개 더 질문이 있긴 한데. 검토하면서 하나씩 묻겠습니다.”
같은 임원급임에도 확연한 입지의 차이. 그렇게 김윤하가 평소처럼 일을 해 나가고 있을 때, 노크를 한 이수현이 조심스럽게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그게…….”
이수현은 임원조차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인지 김윤하의 귓가에 속닥속닥- 비밀스럽게 소식을 전하자.
“……일단 검토는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도대체 무슨 이야기였는지.
김윤하는 진행 중이던 검토조차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급하게 모였음에도 회의실에선 화목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혹시 전달이 안 된 건지 걱정이 많았는데. 잘됐네요.”
김은아의 오빠인 김준혁은 뭐가 그리 기쁜지 싱긋 웃었고. 아버지인 김성한은 흐뭇하게 웃었다.
“하하, 당신. 내가 말했잖아. 딱 일주일도 가지 못할 거라고.”
“휴, 그러네요. 정말 잘됐어요. 무리하는 게 아닌지 엄청 걱정했는데……. 그래도 우리 은아 대단하지 않아요? 카드도 없이 무려 일주일이나 버티다니?”
일주일이라는 기록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진심으로 흐뭇해하는 김윤하의 얼굴. 김준혁은 이 기쁨을 같이 나눴다.
“그 전에 있던 최고 기록이 3일하고 12시간이니. 일주일이면 신기록이긴 하네요.”
벌컥!
체면도 잊은 채 급하게 회의실에 문을 연 김석한은 모여 있는 가족들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이야기 들었다! 우리 은아가 카드를 사용했다고!? 그럼 그렇지! 우리 은아가 어떤 아이인데!”
김석한은 그렇게 자랑 아닌 자랑을 하며 모여 있던 가족들을 둘러보았다.
“그래서 너희들은 은아가 일주일 만에 사용한 카드로 뭘 샀는지 확인했더냐?”
“후훗, 마침 그걸 확인하려던 참이에요 아버님. 어디 보자…….”
주르르륵-
김윤하의 클릭에 포켓의 홀로그램은 길게 이어진 카드내역을 띄우자.
“기껏해야 100? 은아가 그리 많이 쓰진 않았네요? 근데 이거 구매 내역이 좀…….”
내역을 읽던 김준혁은 점점 의아하다는 얼굴로 변했다.
“일단, ……음, 치킨 2마리? 도넛츠 12개에 아이스크림 케이크. 거기다 돈까스 덮밥? 이게 대체 무슨…….”
김준혁이 떨떠름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자. 김성한은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했다.
“……은아가 배가 많이 고팠나?”
“아뇨. 아무리 배가 고파도 이건 아니죠.”
단호하게 말한 김윤하는 더욱 스크롤을 내렸다. 하지만 그 뒤에 펼쳐진 구매 목록은 더욱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상급자용 베이킹 쿠킹 세트! - 59,000원]
[벚꽃 그릇 4종- 152,000원]
[브라보 스테인리스 증류기 - 131,970원]
[프리미엄 테이블 스푼 10인 세트 - 320,000원]
갑자기 우르르 구매하는 이 식기들은 뭘까?
“……우리 은아. 새살림이라도 차리는 걸까요?”
정말 농담으로 끝날지.
아니면 진실인지 모를 김윤하의 이야기에 김석한은 치를 떨며 부정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절대! 절대에에에에- 내 그 꼴은…….”
하지만 그 밑에 있는 구매 내역은 더욱 가관이었다.
[어린이용 오리 우비(노란색)- 30,000원]
아버지인 김성한은 우비의 디자인과 그 우비를 입은 김은아를 번갈아 떠올리더니.
“어, 으음…….”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김은아가 먹었다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메뉴와 엄청난 양의 배달 음식. 거기다 새살림이라도 차리는 건지 아니면 집들이 선물이라도 산건지 뜬금없는 식기 세트. 뜬금없는 노란색 우비의 조합이라니?
하지만 구매 내역을 확인하는 김은아의 가족들에겐 회심의 일격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어린이도 쉽게 입문! 초보자용 낚시 세트! - 259,200원]
습기가 많은 곳.
특히 강과 연못이라면 질색을 하는 김은아가 구매한 초보자용 낚시 세트?
“어…….”
구매 내역을 보다 못한 김준혁은 결국 소신 발언을 했다.
“……이거 은아가 쓴 거 아닌 거 같은데요.”
그 말에 김윤하는 자신도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고해야겠네요. 이거 다른 사람이 주워서 쓴 게 분명해요.”
적어도 김윤하가 기억하는 자신의 딸은 이런 물건을 살 아이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