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자신에게 도전하는 인간들을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버린 겨울의 마녀 루이스.
대륙 전체에 죽음을 몰고 온 7대 사도. 역병의 마녀 라플라스.
그리고…….
‘나의 전생.’
깨지 않는 꿈의 주인. 몽환의 마녀 모르간.
[마법의 힘을 이런 식으로 사용하다니! 당신 자매들은…… 모두!]
신하윤은 자신의 앞에서 울부짖는 기사가 보였다.
[용감한걸. 당신에겐 죽음에 대한 두려움조차 없는 거야?]
이건 모르간의 기억.
아니, 자신의 기억.
모르간은 천천히 기사에게 다가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하지만 사실 죽음은 자비로운 선택지야. 나의 꿈속 세계는 그리 자비롭지 않거든. 깨지 않는 꿈에서 300년. 아니 100년 정도만 방황하다 보면…….]
사아아-
공포 어린 기사의 얼굴.
[용서를 빌며 제발 다들 죽여 달라고 말해. 그러니 너희들이 말하는 숭고한 가치라는 건 말이지. 일시적인 기분 같은 거야. 영원한 건 힘뿐이란다?]
그의 이마에 모르간이 뿜어낸 분홍빛 마나가 탄환처럼 직격했다.
타앙!
그와 동시에 마치 꿈에 빠지듯 스르륵 감기는 기사의 눈동자. 신하윤의 기억 속에서 모르간은 무엇이 즐거운지 소리높여 웃었다.
‘왜 이제야 깨달았지? 나는…… 신하윤이자. 몽환의 마녀 모르간.’
신하윤에겐 지금까지 살았던 5살의 기억 따윈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주 방대한 정보들이 물 밀려오듯 들어오고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이 끝났을 때, 신하윤에게 벌어진 현상은 놀라웠다.
5살에 불과한 신하윤은 몽환의 마녀 모르간의 기억과 지식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마나의 조작법. 마나의 근원. 마법의 비밀. 지금의 나는…… 모두 알고 있어. 그러니…….’
신하윤은 몽환의 마녀인 자신의 힘을 되찾고 싶었다. 이번 생에서는 마녀가 아닌 인간이었지만. 그녀는 힘을 되찾을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내 힘부터 되찾는다.’
신하윤의 다짐은 사실 기억을 되찾은 순간 정해진 미래였다.
신하윤으로서의 인생을 살든.
제2의 모르간으로서 인간들을 상대로 군림하든. 힘을 되찾는다는 선택지는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모르간의 힘을 되찾기 위해선 ‘마나의 성질’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그에 필요한 아티팩트만 십여 개가 넘는 상황.
5살이었던 신하윤은 그저 때를 기다렸다.
힘을 되찾고.
자신이 타고난 염동력의 힘과 모르간의 마나 성질을 모두 개화하기를.
하지만.
이젠 이야기가 달라졌다.
신하윤에겐 모르간의 자매였던 라플라스의 편린이 나타났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재회한 자매의 모습에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공간 결계. 역병의 땅.”
라플라스의 편린인 스미레가 손을 뻗자. 화장실에 불과했던 주위의 풍경이 변했다.
바닥에 깔렸던 대리석은 죽음의 냄새가 나는 흙으로 변했고. 신오가문의 거대한 저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가짜 주제에…… 제법 그럴싸하게 흉내 내는걸?”
역병의 땅.
라플라스가 자신의 주 무대인 이 곳으로 신하윤을 불러냈다는 건 전력을 다하겠다는 소리였다.
쿠구궁!
땅에서 거대한 손이 솟아.
화악!
엄청난 속도로 신하윤을 덮쳤다.
탕! 지직- 지지직!
초록색 스파크를 튀기며 염동력으로 손을 막아낸 신하윤.
“구겨져라.”
그녀의 한 마디에 골렘의 거대한 손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런 장난감은 너나 가져!”
부웅!
신하윤은 일그러트린 골렘의 손을 라플라스에게 던졌다.
“베어라. 사신의 낫.”
하지만 라플라스가 읊조리자.
거적을 입은 해골 사신이 그 팔을 낫으로 잘라버렸다.
“나에 관해서 꽤 많이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너……. 마녀의 편린이라도 얻은 것이냐?”
“과연, 어떨까?”
한마디 말을 주고받은 신하윤과 라플라스는 다시 대치했다.
부웅!
신하윤은 자신의 목 앞까지 다가온 사신의 낫을.
까득!
염동력으로 간단히 붙잡았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군. 너의 마나에선…… 누구의 존재도 느껴지지 않거늘.”
단순히 마나만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었다. 라플라스가 본 신하윤은 외면의 모습도. 염동력을 사용하는 전투방식도. 마나의 성질도. 자신이 알고 있는 마녀 중 누구도 닮아 있지 않았다.
“그렇지. 난 새롭게 태어났거든. 반면에 너는 왕좌를 꺼내지도 관을 쓰지도 않다니……. 역시 가짜에 불과한 건가?”
싱긋.
여유롭게 웃은 신하윤은 검지를 회오리 모양으로 흔들었다.
휘이.
처음은 염동력이 휘저은 공간에 인위적인 산들바람이 부는 정도였지만.
휘이잉-
손가락이 계속해서 허공을 휘젓자. 산들바람은 어느새 돌풍으로 변했고.
휘이이이익-!
이젠 태풍으로 진화해 신하윤을 제외한 모든 걸 삼키려 했다.
그득- 붕-
회오리는 역병의 땅에 심겨진 나무를 뽑고. 흙먼지를 삼켜 더욱 덩치를 불리며. 땅에서 일어난 언데드들을 염동력의 힘으로 으스러뜨려 분쇄했다.
하지만.
라플라스는 엄청난 폭풍의 힘에도 옷깃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이건 그저 소모전에 불과한 싸움.
‘……공간 결계를 전개하면서 왕좌와 관을 사용하는 건 무리군. 아직 이 아이의 그릇이 버티지 못하는 건가.’
스미레의 몸은 아직 라플라스의 힘을 버틸 그릇이 아니었다. 반면 신하윤은 마녀의 힘은 없지만 헌터로서의 능력치가 스미레보다 몇 배나 높았다.
마녀의 기억을 가진 신하윤과 마녀의 편린을 가진 스미레의 싸움에 승자가 정해지지 않은 건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아직 내 힘의 일부를 받아들이기에도 무리인 것인가. 대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
판단을 마친 전개 했던 공간 결계를 거둬들이자. 눈앞에 펼쳐졌던 역병의 땅은 유리조각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쨍그랑!
그렇게 다시 돌아온 화장실은 지금까지의 전투가 꿈이었던 것처럼 잠잠했다.
다만 이 전과 차이가 있다면.
신하윤의 목에는 사신의 낫이 겨눠져 있었고. 라플라스의 목 주변에는 초록색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재밌는 구경도 했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어때?”
신하윤은 라플라스에게 웃으며 휴전을 제안했다. 결국 라플라스는 사신을 거두고, 신하윤은 염동력의 힘을 거두었다.
“그리고 회의는 참석해도 좋아. 이 정도의 강자는 나도 친하게 지내고 싶거든.”
끝까지 멋대로의 이야기를 하며 유유히 사라지는 신하윤. 라플라스는 그런 신하윤의 뒷모습을 심각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후우…….”
자신의 계약자인 스미레도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마녀의 기억을 가진 신하윤은 궤가 달랐다. 라플라스가 빙의할 수 없을 땐 스미레가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분명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구나. 아이야.”
그 말을 끝으로 마치 뾰족한 다이아몬드 같았던 라플라스의 동공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
라플라스의 정신은 휴식을 위해 내면세계로 돌아가고. 스미레의 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 * *
가온의 부실.
김은아는 소파에 누워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이렇게 지루한 주말은 처음이네.’
이번 주말은 평소처럼 저택에 돌아가 호화로운 휴식을 즐긴 것도 아니었고. 카드가 없어 가방이 가득 차도록 쇼핑을 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유성이랑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 신유성까지 없으니 김은아는 심통이 날 만도 했다. 그래도 혼자 있는 것보단 위안이 있다면.
“캬항~ 아기 드래곤~ 뚜루루~”
자신의 옆에서 동요를 따라 부르며 놀고 있는 벨벳의 존재였다.
‘……누가 가르쳐 주는 건지. 점점 포켓에 익숙해진단 말이지.’
저렇게 가까이서 포켓만 보면 눈이 나빠질 텐데…….
‘아니지…….’
김은아는 시력이 나쁜 드래곤이나 안경을 쓴 드래곤의 이야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드래곤이라 상관없나?’
심심한 김은아가 별에 별 잡생각을 하고 있을 때.
“미쳐써…….”
벨벳은 포켓을 보며 감동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은아 엄마! 이, 이거 바바!”
[황금빛 튀김옷!]
[한 마리에 다리가 4개!]
[사줘, 사줘, 사족보행 치킨!]
벨벳이 보여준 건 영상 사이트의 평범한 광고였다.
“……이런 게. 먹고 싶다고?”
“응! 엄청!”
“으음…….”
김은아는 포켓으로 잔고를 확인했다.
[총 예금 잔액 : 0원]
예금 같은 걸 한 적이 없는 김은아의 잔액은 깔끔한 0원. 이걸로는 배달 음식은커녕 물 한 잔도 사마실 수가 없었다.
“어, 그러지 말고…… 차라리 토마토나 감자 어때?”
하지만 벨벳의 종족은 드래곤. 단 음식이 아닌 이상, 무조건적으로 육식을 사랑했다.
“캬우음……, 토마토……. 감자?”
물론 착한 벨벳은 반항은 하지 않았다.
“응, 괜찮아. 벨벳은 은아 엄마가 만들어 주는 건 다 좋아…….”
하지만 누가봐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에 김은아는 으음-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면 요리 해줄까?”
너무나도 극단적인 김은아의 제안에 벨벳은 퍼뜩-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어…… 벨벳 배불러졌어!”
돈을 물처럼 쓰던 김은아는 겨우 지폐 몇 장이 없어 벨벳에게 맛있는 걸 사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의 김은아라면 상상조차 못할 굴욕.
“내가 카드만 있었어도…….”
김은아가 분한 듯 중얼거리자. 벨벳은 김은아에게 물었다.
“캬항? 카드? 카드가 뭐야?”
“어떤 물건이든. 이렇게 얇고 네모 모양으로 생겼는데 뭐든 살 수 있는 거야.”
벨벳은 뒤뚱거리며 장난감이 있던 곳으로 걸어가더니 한참을 뒤적거렸다.
뒤적- 뒤적-
그리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포켓을 보고 있는 김은아에게 벨벳은 무언가를 내밀었다.
스윽-
벨벳이 내민 건 카드였다.
정말 김은아의 말처럼 네모나고.
너무나도 얇고.
검은색…….
‘검은색?’
벨벳에게 카드를 받아든 김은아는 뒷면을 확인했다. 그곳에 적힌 건 다름 아닌 김은아의 서명.
[KimSilverA]
“너 이거 어디서 났어!?”
놀란 김은아가 다급하게 묻자. 벨벳은 자랑스럽게 답했다.
“이거! 아빠가 줬어! 필요하면 은아 엄마랑 같이 쓰라고 해써!”
“뭐어? 유성이가!?”
이건 이전부터 김은아가 쓰던 ‘블랙 카드’. 아무래도 가족들의 성화에 신유성이 어쩔 수 없이 받아온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독립한다고 그렇게 큰소리 떵떵 쳤는데…….’
하지만 김은아는 자존심이 있지 그렇게 당당하게 말을 해놓고 덜컥 카드를 쓰고 싶진 않았다.
‘으음…….’
그렇게 김은아가 카드를 쓸지 말지 깊은 고민에 빠지자.
퐁-
악마 옷을 입은 미니 김은아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 큰돈도 아니고 좀 쓸 수도 있지? 나중에 채우면 되잖아?
그 말에 김은아는 벨벳을 흘겼다. 도대체 얼마나 치킨이 먹고 싶은 건지 벨벳은 또 영상을 돌려보며 노래까지 따라 부르고 있었다.
“사줘요~ 사줘~♪ 사족보행 치킨~♬”
크으음-
‘……벨벳이. 저렇게까지 먹고 싶어 하는데.’
김은아가 여전히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고민에 빠지자.
퐁-
이번에는 천사 옷을 입은 미니 김은아가 나타났다.
- 이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벨벳을 위한 일이잖아요? 얼마나 한다고 좀 쓸 수도 있죠.
대체 내 머릿속은 어떻게 되었기에 악마며 천사며 말리는 법이 없을까?
‘그래. 벨벳을 위해서라면…….’
카드를 쥔 김은아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이 묵직하고도. 서늘한 감각……. 일주일만인가?’
카드를 쥔 김은아는 사족 보행 치킨에 주문을 넣었다. 기나긴 모멸과 가난을 벗어나.
[주문이 완료 되었습니다.]
KimSilverA로 돌아갈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