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5화
신하윤의 염동력에 목을 압박당하던 스미레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괜찮으십니까?”
걱정 어린 인큐버스의 물음에 천천히 몸을 일으킨 스미레에게 펼쳐진 건 현실이 아니었다.
“읏, 여긴…….”
라플라스의 취향인지 아기자기한 식기와 고풍스러운 가구들로 이루어진 이 곳은 스미레의 내면 세계.
라플라스의 성.
“계약자인 스미레 님이 정신을 잃으셨기에……. 라플라스 님은 지금 이 상황이 생명에 위협이 간다고 판단하셨고 결국 직접 나서기로 하셨습니다.”
정말 긴급하고 긴급한 상황에만 사용한다는 빙의 형식의 강제 강림.
하지만 스미레는 라플라스가 이런 형태의 빙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았다.
“아, 그렇군요. 라플라스 님이…….”
자신의 일로 또 이렇게 라플라스에게 피해를 끼치다니.
“우으…….”
결국 풀이 죽은 스미레의 어깨가 내려가자. 인큐버스는 싱긋 웃더니 스미레에게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스미레 님? 저어, 라플라스 님께서 ‘외출’을 나가시기 전 당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스윽- 팟!
그렇게 말한 인큐버스가 손을 올려 보랏빛 마나를 흘려 넣자 스크린이 켜졌다.
“이건?”
“혹시나 정신을 차린 스미레 님께서 세상을 잃은 얼굴로 한숨을 쉬고 있으면. 꼭 이 영상을 보여주라 말씀하셨습니다.”
“라, 라플라스 님께서요?”
놀란 스미레는 확- 하고 스크린으로 고개를 틀었다.
♪~ ♪~ ♬~
스피커로 울려 퍼지는 잔잔한 피아노 소리.
지직- 직!
그저 까맣기만 했던 검은 바탕의 스크린은 이내 라플라스의 얼굴이 비춰지고 있었다.
- 안녕 스미레?
슬픈 것일까.
기쁜 것일까.
반가운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무모한 스미레에게 화난 것일까. 라플라스의 표정은 도저히 기분을 알 수 없었다.
- 내가 직접 끓인 홍차라도 대접 했다면 좋았건만. 네가 이 편지를 읽을 때면……. 난 이미 이 성에 없겠구나.
스피커에선 잔잔하고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과 함께 라플라스의 진중한 목소리가 한자 한자 흘러 나왔다.
“라, 라플라스 님…….”
그런 라플라스의 영상 편지를 보며 놀란 스미레가 입을 벌리고 있자. 녹화된 영상의 라플라스는 그런 스미레의 모습조차 예측했는지 후훗- 하고 웃었다.
- 후후, 분명 내 영상편지를 본 너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겠지.
그제야 흡- 하고 입을 닫는 스미레. 하지만 영상 속의 라플라스는 스미레를 놀릴 생각은 아니었는지 한 결 온화해진 얼굴로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 알고 있느냐? 편린에 불과한 나에게……. 너를 만난 건 큰 행운이란다.
라플라스는 자신의 손바닥을 후우- 하고 불었다. 그러자 아름다운 보라색 제비꽃의 꽃잎이 스크린을 가득가릴 정도로 흩날렸다.
♩~ ♪~ ♬
그 때문일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오는 피아노의 연주도 조금은 슬픈 선율로 바뀌었다.
스크린을 가렸던 꽃잎들이 떨어지고 남아 있는 건 그저 어둡기만 한 칠흑의 공간이었다.
- 아무 것도 없는 무의 공간. 이곳이 바로 원래 내가 있던 세계란다. 얼마나 긴 시간을 이곳에서 홀로 보냈는지…….
스미레는 점점 넓어지던 자신의 내면세계와 아름답게 꾸며지던 라플라스의 성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곳에 꾸며진 삶은 칠흑 속에서 잠들어 있던 라플라스의 편린이 진정으로 꿈꾸던 모습일지도 몰랐다.
“라플라스 님은…… 저렇게나 외로운 곳에서…….”
아무 것도 없는 칠흑의 공간.
라플라스는 과연 그 고독한 공간 속에서 얼마의 시간을 보낸 걸까?
아무 것도 없는 칠흑의 공간에 홀로 남아 있는 라플라스를 보며 스미레는 꾸욱- 입술을 깨물었다.
- 흐음~ 알 거 같군. 너, 설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느냐?
물론 높은 동화율을 가진 라플라스는 그런 스미레의 모든 기분을 예측하고 있었다.
- 만약 이 영상을 보는 네가 나를 동정하고 있다면 그리 슬퍼할 필요는 없단다. 나에게 시간은 추상적이기 때문이지.
이 추상적인 감각을 설명하는 건 그녀도 어려운지. 라플라스는 턱을 괴며 고민했다.
- 분명히 흐름은 존재하지만…… 나는 어떤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단다. 흐음, 지금의 너에겐 좀 어려운 이야기일지도 모르겠구나.
지금은 이 정도의 설명이 최선.
라플라스는 과거야 아무래도 좋다며 손톱으로 칠흑의 공간을 부욱- 하고 조금 찢어버렸다.
- 후훗, 하지만 ‘가짜’에 불과한 나는 너를 만났지. 너는 나에겐 너무나도 빛이 나는 존재란다.
벌어진 틈 사이에서 천천히 새어나오는 환한 빛.
- 추상적인 나의 시간은.
라플라스가 말을 끊었다.
- 칠흑 같았던 나의 공간은.
스크린 속의 라플라스는 스미레와 눈을 맞추고 자신의 말을 강조했다.
- 실재하는 네 덕분에 새로이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었단다.
지금 라플라스는 고민하고 있었다. 가짜에 불과한 자신에게 스미레가 부여해준 ‘의미’의 감동을 어떻게 해야 생생이 전달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역시 말로 이 모든 감정을 어려운 일이었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네가 직접 보는 게 나을 거 같구나.
라플라스는 환한 빛이 쏟아지는 틈새를 향해 확- 하고 손을 집어넣었다.
“어, 어라!?”
틈새의 사이에서 라플라스가 잡은 건 다름 아닌 스미레의 손.
“지금 라플라스 님은 직접 현실에 강림하신 게 아닌가요?”
놀란 스미레는 인큐버스를 보며 질문을 던졌지만. 인큐버스는 고개를 저었다.
“내면세계는 스미레 님과 라플라스 님의 지배하에 만들어진 공간. 두 분께서 원하신다면 그 어떤 일도 불가능은 없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화악!
스크린 속의 라플라스가 손을 잡아당기자 스미레는 벌어진 틈새 사이로 어딘지 모를 공간에 끌려들어갔다.
지이잉!
스미레의 몸이 틈새 사이로 몸이 통과되자.
“와앗-!”
칠흑의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던 라플라스는 스미레를 보며 웃어주었다.
“후훗, 왔구나. 스미레. 역시 이 풍경만은 네가 직접 봐야 할 거 같아서 말이다.”
딱!
라플라스가 검지와 중지를 마주쳐 소리를 내자. 보랏빛의 폭풍은 주변을 휩쓸었다.
화아아악-!
덕분에 주위를 덮었던 칠흑은 색종이처럼 잘게 쪼개져 흩날리기 시작했다.
“읏!”
너무나도 강한 바람에 눈을 감은 스미레.
“됐다. 이제 눈을 떠 보거라.”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바람이 잠잠해지고 라플라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스미레는 느릿하게 눈을 떴다.
“라플라스 님. 여긴…….”
눈을 뜬 스미레의 앞에 펼쳐진 건. 더 이상 아무 것도 없는 외로운 칠흑의 공간이 아니었다.
사아아-
기분 좋은 봄바람.
연한 분홍빛으로 봄의 벚꽃이 가득 만개한 나무. 그 밑에 깔린 색색의 돗자리에 앉은 라플라스를 보며 스미레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건 어디선가 본적이 있었다.
절대 잊을 리가 없었다. 이건 스미레의 소중한 기억 중 하나였으니까.
[엄마! 스구하! 이거 좀 봐!]
[꺄악! 미쳤나봐! 엄마! 오빠가 스고로를 나무 위에 올렸어!]
기억을 떠올린 스미레는 주변을 둘러며 말했다.
“이건 제가 가족들과 소풍을 갔던 장소…….”
“그래. 이제 알겠느냐?”
툭.
라플라스는 스미레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나는 너와 동화됨으로써 새로운 기억. 새로운 세계.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의미. 모든 것을 부여받았단다. ……내게는 참으로 재밌고 신기한 일이었지.”
스윽- 툭-
그리곤 라플라스는 반대편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으며 말했다.
“물론 그 덕분에……. 너의 따뜻한 마음과. 네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들이. 내게도 소중해져 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탄생 된 자신은 과연 역병의 마녀 라플라스일까?
아니면 그 조각에 불과한 기억일까? 아니면 스미레와 편린의 조각 그 사이에서 태어난 무엇일까?
비록 지금은 진실을 알 수 없지만 라플라스는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이야. 너는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하단다.”
그건 라플라스에게 스미레가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
“그러니…… 널 상처 입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라플라스는 확 달라진 분위기로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나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 * *
신하윤의 특성 염동력은 좌표에 대한 계산과 마나의 투영만 빠르다면 힘의 구현까지 시간이 적고. 무형의 물리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염동력의 물리력에서 벗어나려면 단순한 힘이 아닌 마나의 역산이 필요한 것이다.
덕분에 신하윤은 지금까지 붙잡은 상대를 한 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사아아-
어딘가 달라진 눈빛과 분위기의 스미레가 손을 얹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보라색 불꽃이.
쨍그랑!
마치 유리창을 깨듯.
무형의 힘을 초록색 파편으로 형상화시켜 부숴버렸다. 지금까지 무력하게 당하던 스미레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실력.
“……너.”
놀란 신하윤이 주춤 뒤로 물러났지만 스미레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목을 만지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신하윤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느냐? 마나의 성질을 새로이 더해 형상을 만들고 부순 것이다. 구시대적 방법이지.”
무형의 힘인 염동력에 마나를 불어넣어 새로운 성질을 부여하고 그로 인해 부서지기 쉬운 형태로 만든다. 이건 말로는 쉽지만 실전에서는 아주 고도의 마나 컨트롤이 필요한 일이었다.
아직 전투 경험이 적은 스미레의 실력으론 절대로 불가능한 일.
하지만 신하윤이 놀란 건 단순히 스미레가 염동력을 파훼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너…….”
순식간에 변한 스미레의 분위기.
방금 스미레가 사용한 보라색 불꽃 형태의 마나 성질. 그리고 무엇보다…….
‘눈…….’
신하윤은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스미레의 눈빛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그래 마치…….’
하지만 스미레의 몸에 빙의한 라플라스는 기억을 더듬고 있는 신하윤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리 놀랄 필요 없느니라. 정말 놀라야 할 부분은 ……지금부터니 말이다.”
라플라스는 봉을 쥔 지휘자처럼 손을 올려 허공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팟- 파파파-
마치 원거리에서 마나를 다루는 건 신하윤만이 아니라는 듯, 허공에 생성되는 보랏빛 다이아몬드들.
이건 역병의 마녀 라플라스의 상징인 다크매터라 불리는 고유한 마나 성질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 속 무엇이 신하윤의 역린을 건드린 걸까. 신하윤은 라플라스의 다크매터를 바라보며 얼이 나간 눈으로 중얼거렸다.
“너 정말……. 정말로…….”
하지만.
“……마치 실성한 사람 같군. 미쳐버리기라도 한 게냐?”
라플라스는 차가운 시선과 함께 주변을 빼곡히 채운 다크매터를 일제히 발사했다.
쐐애애액!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다크매터를 피해 뒤로 물러나며 재빠르게 마나를 발현했다.
“너, 정말 재밌어!”
신하윤은 다크매터가 노린 공간들을 머릿속에서 점의 형태로 연산했고 마나를 발현했다.
주르르륵-
허공에 생긴 점과 함께 무형의 힘에 빨려 들어가는 다크매터. 신하윤은 염동력의 힘을 순식간에 연산시켜 다크매터를 압축시켜버렸다.
“……제법이구나. 그 재롱이 언제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다만.”
하지만 이건 신하윤이 단 한 번의 연산만 실패해도 패배하는 싸움. 공격을 퍼붓는 라플라스의 쪽이 너무나 유리한 양상이었다.
화아아악!
차갑게 일렁이는 보랏빛 불꽃.
라플라스는 이번 공격으로 신하윤을 끝내기 위해 수없이 다크매터를 만들어냈다.
어쩌면 신하윤에겐 처음으로 겪어보는 위기. 하지만 신하윤은 그런 상황에서도 즐거운 듯 웃으며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기억만 있는 가짜와. 조각만 남은 가짜인가? 재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