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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7화 (217/434)

제217화

신하윤이 누구인가?

안목이면 안목.

실력이면 실력.

헌터에게 필요한 능력을 학생의 나이에 이미 모두 갖춘 역대 최고의 천재였다. 하지만 신유성은 알고 있었다. 그런 건 신하윤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걸.

“신하윤의 목표는 헌터부의 장악도, 가온의 학생회장 자리도, 신오가문의 가주조차도 아니야. 그런 건 모두 수단에 불과하지.”

그렇기에 신유성은 유월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거짓말. 근데 유성아. 상관없어. 네가 뭘 봤든……. 세상의 그 누구도 네 말을, 아니 내 힘은…… 믿지 않아.]

아니, 어떻게 잊겠는가?

신하윤은 신오가문의 가주조차 자신의 연기로 속이고 힘을 숨겼다. 마치 무언가에 대비라도 하듯 염동력을 연마했다.

그게 겨우 5살의 나이.

신유성보다 1살이 많았던 시기부터 지금의 그림을 조용히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5살의 아이라기엔 불가능한 일. 그걸 과연 재능이나 천재 같은 진부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래. 절대 인간이 아니었다. 신유성은 그날 본 신하윤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

‘무엇을 꾸미는진 모르지만.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건 확실해…….’

신유성이 유월의 말에 동의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자. 유월은 싱긋 웃었다.

“유성아. 이건 너에게만 하는 이야기야. 난 말이지. 포켓조차 없던 신하윤이 고대어로 적힌 서적을 읽는 걸 본 적이 있어.”

“……정말, 고대어를?”

‘고대어’는 현대인이라면 포켓이나 탑의 기록에 도움을 받지 않곤 읽을 수 없는 언어를 포괄적으로 뭉뚱그려 부르는 단어였다.

포탈이나 탑을 통해 다른 차원에서 온 언어인 만큼 일반인과는 거리가 먼 어려운 서적이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겠지. 포켓의 도움 없이 고대 서적을 읽는 건 역사학자들도 어려운 일이니까.”

설명을 하던 유월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아 물론. 어린아이가 어려운 책을 읽는 건 넘어갈 수 있는 일이지. 읽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니까.”

유월은 테이블에 조커 카드를 놓으며 결정적인 이야기를 던졌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탑의 기록에도 등록되지 않은 고대 서적을 가지고 있는 건. 전혀 다른 문제지.”

탑의 기록에 등록되지 않았다는 건 협회의 헌터나 역사학자가 찾아낸 서적이 아니라는 것. 유월의 이야기를 듣자 신유성은 신하윤의 정체가 더욱 의문스러워졌다.

“내가 소속된 조직은 특별한 곳이야. 그곳의 대장은 나보다도 신하윤에게 관심이 많지. 하지만 신하윤의 행보를 조사해도 이상하리만큼…… 정보가 없어서 말이야.”

턱을 괸 유월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신유성은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누나가 꾸미는 일을 알고 싶다는 건. 정말 단어 그대로의 의미였군요.”

“신하윤은 네게 접촉하고 싶어 하니까. 너라면 우리가 모르는 사실을 알아낼 수도 있을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유월은 신유성에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했다.

“신하윤의 그림이 무엇인진 모르지만. 적어도 너를 원한다는 건, 네 도움이 의미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 아닐까?”

하지만 신하윤이 신유성에게 손을 뻗는 건. 파티나 팀원 같은 동등한 관계를 원하는 게 아니었다.

“……도구로서 말인가요?”

헌터부의 부장이나 학생회장의 자리처럼 신하윤의 야망을 이루기 위한 아주 유능한 도구. 신하윤이 신유성에게 원하는 건, 아니 신하윤이 모두에게 원하는 건 딱 그 정도의 관계였다.

“아마, 그렇겠지.”

유월은 이해한다는 듯 짧은 웃음을 흘렸다. 그리곤 대기실을 걸어 나가며 마지막 당부를 덧붙였다.

“그럼 선택이 어느 쪽이든 연락만 줘. 우린 천천히 네 선택을 기다릴 테니까.”

*     *      *

유월이 대기실을 나와 복도를 건너 어두운 비상구 통로의 계단을 내려가자. 유월은 지루하다는 얼굴로 하품을 하는 소녀를 마주했다.

“에르제 님.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그래. 이미 알고 있다. 나도 좀 이야기를 엿들었거든.”

기껏해야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외모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소녀의 말투. 유월은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려보이는 에르제라는 소녀에게 존댓말과 예의를 갖추고 정중히 대했다.

“그나저나…… 의외구나. 그 꼬마를 네 편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을 줄 알았거늘. 꽤 정보를 숨기더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에르제의 추궁에도 유월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답하자. 에르제는 옅게 미간을 찌푸렸다.

“흥, 시치미를 떼긴.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의 절반도 말해주지 않은 걸. 내가 들었거늘. 그래 예를 들자면…….”

패밀리어를 소환해 이 건물 전체에 귀와 눈을 심어 둔 에르제를 속이는 건 불가능한 일. 에르제는 유월이 속이려던 사실들을 직접 하나하나 짚어주었다.

“신하윤이 읽었던 고서의 이름이라거나. 혹은 남들 몰래 악착같이 긁어모으던 아티팩트의 행방 같은 것 말이다. 그건 대장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더냐?”

그러나 추궁은 거기까지.

에르제는 곧 속셈을 드러냈다.

“뭐, 그런…… 사소한 건 나도 눈감아줄 테니. 내 하나만 부탁해도 되겠느냐?”

“또 그겁니까?”

유월의 눈에 살짝 경멸이 어렸지만 입맛을 다시는 에르제는 그런 사소한 반항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야기가 빠르니 좋군.”

스윽-

에르제는 유월의 몸을 자신을 향해 확- 잡아끌더니 달콤한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그래서…… 대답은?”

유월이 대답 대신 쯧- 하고 경멸 어린 표정으로 혀를 차자. 에르제는 기다렸다는 듯 송곳니를 드러내어 앙- 하고 유월의 목덜미를 물었다.

콱-

에르제는 송곳니로 피부를 뚫어 흡혈을 시작했다. [흡혈]이라는 특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작됐던 흡혈은 이제 그녀의 기호가 되고 말았다. 특히 유월 같은 짙은 농도의 마나를 가진 헌터의 피는 에르제에겐 극상품.

달콤한 향기를 맡으며 힘껏 피를 빨자, 어느새 갈색이었던 머리카락은 분홍빛으로 물들고 평범했던 눈 또한 핏빛으로 붉게 변모해 있었다.

에르제는 역시 리벨리온으로 온 건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극상의 맛…….’

좋은 곳에 힘을 쓰라느니 재미없는 녀석들의 설교는 듣고 싶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인간의 흡혈을 금지한 헌터 협회보다야 이쪽의 제안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스읍.

목덜미에서 입을 떼어낸 에르제는 생기 넘치는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게 유월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만족하셨습니까?”

“하, 물론. 극상의 맛이었다. 가능하다면…… 네 동생의 것도 맛보고 싶다만?”

“재미없는 농담이군요.”

“훗, 그건 두고 볼 일이지.”

에르제는 방금 전 흡혈이 만족스러웠는지 미소를 지으며 벽을 향해 걸어갔다.

사아아-

벽에 닿자마자 그림자로 변해 사라지는 에르제의 몸. 유월은 그제야 자신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인상을 썼다.

‘……지금은 참는 거다.’

유월을 제외하면 전원이 현상금이 걸린 빌런들로 이루어진 리벨리온의 멤버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들이었다.

유월이 그런 폭탄들의 중재자를 자처한 건 모두 실험번호 3017.

‘이런 건 수모도 아니야.’

네임리스를 위해서였다.

*     *      *

자신을 드래곤이라고 소개한 벨벳의 등장과 부모를 자처한 얼음 공주 아델라의 선언.

‘……정말. 관찰할 맛이 나는 조합이에요.’

상식인 포지션이던 레온이 자리를 비우자. 소피아는 아예 아델라와 벨벳의 곁에서 자리를 잡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래서 벨벳 님은 정말 알에서 태어나신 건가요?”

“맞아! 아델라가 엄마가 계속 품어줘써!”

수다스러운 벨벳과 탐구욕이 넘치는 소피아는 은근히 조합이 좋았다.

“이 뿔이며 꼬리…… 진짜 드래곤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정말 엄청난 경험입니다.”

소피아는 아델라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벨벳에게 물었다.

“혹시…… 가능하시면 꼬리랑 뿔을 만져 봐도 될까요?”

“캬항! 좋아! 벨벳의 꼬리랑 뿔을 만지는 걸 허락할게!”

그러나 벨벳은 흔쾌히 허락해주었지만 아델라는 소피아의 부탁이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아델라는 벨벳을 안은 채로 가만히 소피아를 바라보았다.

기분을 알 수 없는 무표정.

투명하고 깊은 붉은 눈.

살을 얼릴 듯 차가운 아델라의 분위기에 소피아는 그 자리에서 압도됐다.

‘어, 엄청난 위압감…….’

스스스-

그저 영문 모를 기척 때문일까?

착각일지 모르지만 소피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아델라가 이렇게 전하는 것 같았다.

[……만지는 건 안 됩니다.]

소피아가 이 선을 넘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몰랐다. 비록 아델라는 벨벳에겐 한없이 자비로워 보이지만. 소피아는 이미 선을 넘었던 레온의 최후를 똑똑히 보았다.

“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한 거 같아요.”

자신의 예감이 맞았던 걸까.

아델라는 그제야 인자한 얼굴로 벨벳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벨벳. 필요한 건 없습니까?”

“캬항! 그럼 벨벳은 간식이 먹고 시퍼!”

“그렇군요. 벨벳.”

비앙카 아카데미에서 귀빈 취급인 아델라가 직접 간식을 가져오려고 하자. 소피아는 손을 저었다.

“아, 아델라 님? 앉아 계시면 제가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소피아는 아델라의 반응이 신기했다. 아델라는 아덴을 뵐 때도 저렇게 행복해 보이진 않았다.

“벨벳은~ 캬흥~ 간식 중에서 벨벳 케이크가 제일 좋아!”

“……소피아. 벨벳 케이크로 부탁해도 괜찮겠습니까?”

“아, 네! 그럼요!”

이탈리아의 얼음 공주 아델라조차 자칭 딸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벨벳의 막강한 파괴력.

“끄으으~ 마시써~”

벨벳은 케이크를 먹으며 행복을 경험하고. 아델라는 그런 벨벳을 보며 행복을 느끼던 순간.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캬으으~ 이게 인생이야!”

하지만 벨벳은 여전히 케이크에 시선이 팔려 있고. 아델라는 그런 벨벳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곧 닥칠 재앙은 전혀 모르는 모양새.

한참이나 벨벳을 찾았던 김은아는 그 광경을 보자 어이가 없어진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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