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216화 (216/434)

제216화

국가대항전에서 패배한 이후.

잇신은 혼자 사색에 잠기는 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그 사색의 시간들은 잇신에게 몇 가지 깨달음을 줬다. 쵸텐의 최강이라 자부했던 자신의 실력도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사실과.

[서걱!]

적어도 검을 휘두르는 순간만큼은 잡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잇신은 어느 때보다 오직 수련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처음은 눈앞의 것을 베어냈고.

그 다음은 자신의 사색을.

이젠 돌이키고 싶은 과거를 베어냈다.

잇신은 그렇게 마음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베어낸 그날. 커다란 바위 앞에 섰다.

[스윽. 파앗-!]

발도술의 자세를 취한 잇신은 칼집에 손을 얹었고 곧 한 줄기 빛이 번쩍였다.

그야말로 신검합일(身劍合一).

가로로 그어진 균열과 함께 반으로 그어진 바위가 땅에 떨어진 그 순간. 잇신은 칼집에 검을 넣었다. 깨달음을 얻고 한 단계 나아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무엇도 베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깨달음을 얻은 지 겨우 하루 만에 잇신은 창백해진 얼굴로 변해 있었다.

“뀨우우!”

거대한 바위산을 껑충껑충 미친 속도로 뛰어 내려온 거대한 토끼.

“뀨뀨!”

그리고 그 토끼가 휘두르는 철퇴 같은 묵직한 앞발.

퍼억!

“크으으윽-!”

겨우 한 방에 몇 미터를 나가떨어진 잇신은 다급하게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둘렀다.

푹신!

하지만 카니나의 솜뭉치 같은 털은 금방 충격을 흡수해버렸다.

“하하하하! 아니 그런 이쑤시개 같은 검이 통하겠습니까?! 아까 전에는 잘도 쫓아 오더니! 이젠 도망만 가네요? 버프라도 걸어줄까요?”

아크만은 그런 잇신을 보며 신이 나서 도발을 했고 엘란은 안쓰럽다는 듯 잇신을 내려다보았다.

“검객이여. 카니나는 산의 주인. 이곳에서 카니나를 피해 도망치는 건 불가능하다.”

껑충!

토끼다운 엄청난 점프력.

퍼억!

너무나도 날쌘 앞발과 그에 어울리지 않는 묵직한 충격. 지금까지 수많은 보스를 상대한 잇신도 이런 상대는 처음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저 거대한 앞발이 보이지조차 않는다.’

[배리어가 파괴되셨습니다.]

[남은 배리어 32%]

스윽- 잇신이 흐르는 코피를 닦아내며 주춤주춤 일어났다.

‘이렇게 강력한 소환술을 사용했다는 건…… 분명히 그에 버금가는 제약이 있다.’

퍼억! 쾅-!

카니나는 다시 앞발을 휘둘렀지만 이번에는 잇신의 검이 앞발을 막아냈다. 충격으로 튄 흙먼지가 걷혔을 때 드러난 건 붉은 빛으로 휩싸인 잇신의 모습.

“무리한 소환술은 길게 유지할 수 없지. 결국 버텨내면 될 뿐이다!”

검을 쥐며 잇신이 크게 소리치자 더욱 붉어진 검기. S급 특성인 귀기(鬼氣)를 사용한 것이다.

“무리한 소환술?”

하지만 카니나의 머리에 매달린 아크만은 그런 잇신을 비웃듯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뭐어~ 원래라면 그렇죠. 정령족인 카니나의 강함은 5급 보스 중에서도 최상격. 평소라면 소환도 못 할 정령이니까.”

여유로운 대사였지만 카니나의 머리에 납작 엎드린 아크만의 모습은 멋이 나지 않았다.

콰앙! 쿵쿵쿵쿵-!

자세를 이족 보행으로 바꾸며 미친 듯이 연격을 쏟아내는 카니나.

“뀨뀨뀨뀨! 뀨우뀨-!”

잇신은 어떻게든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지만 산의 주인이 휘두르는 연격은 파괴적이었다.

“커헉, 큭-!”

결정적으로 잇신과 카니나는 상성이 좋지 않았다. S급 특성인 귀기는 상대를 처치하거나 베어낼수록 강해지지만. 푹신한 카니나의 털은 방어력이 너무 높았다.

귀기의 힘으로 잇신이 강해지는 걸 원천 봉쇄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잇신은 버텨내고 버텨냈다.

“뀨유유유! 뀨뀨! 뀨우!”

다다다다! 쿵쿵! 콰앙!

태산 같은 카니나의 앞발이 내려쳐도 어떻게든 공격을 피해내고.

쿠웅! 탕!

검의 옆면으로 막아냈다.

도망칠 수 없는 걸 자각한 이상. 최대한 시간을 끌어 소환술을 저지할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한계.

[남은 배리어 6%]

“후우, 하…….”

배리어의 잔량을 확인하며 잇신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버틸 수 있는 공격은 기껏해야 한두 번. 지금까지의 노력은 카니나의 시간을 끌었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아크만은 그런 잇신이 불쌍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당신. 그렇게 걸레짝이 되어도 버티는 게 설마 마나를 소비시킬 목적입니까?”

탓!

아크만은 카니나의 머리에서 점프를 하더니 사뿐하게 착지했다.

“정신력은 대단하지만. 잘못 짚었습니다. 저 사람은 소환술에 마나를 사용하고 있지 않아요.”

“……뭐?”

이렇게 강력한 소환물을 부르는데 아무런 마나도 사용하고 있지 않다니. 잇신으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사실이다.”

하지만 입을 닫고 있던 엘란은 모든 의문을 일축했다.

“내가 카니나의 힘을 빌릴 수 있는 건 모두 아티팩트의 힘이지.”

파앗!

그 말과 함께 엘란이 쥐었던 손을 폈다. 거기 놓인 건 초록빛을 내뿜는 네잎 클로버 형태의 보석.

“너의 투지는 잘 보았다. 이 아티팩트의 도움이 없었다면 패배하는 건 우리 쪽일지도 몰랐겠군.”

엘란은 누구보다 잇신의 실력을 인정해주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잇신에게 중요한 건 지금까지의 전투가 모두 헛수고였다는 사실.

“-크윽!”

결국 잇신은 이를 꽉 깨물며 무방비한 아크만에게 달려들었다. 카니나를 이길 수 없으니 아크만이라도 탈락시킬 셈이었지만.

퉁!

거대한 솜뭉치가 잇신의 검을 막아섰다.

“뀨우-!”

그 다음 이어진 콤비네이션으로 이어진 카니나의 내려치기.

콰아앙-!

[배리어가 모두 파괴되셨습니다.]

[남은 배리어 0%]

그걸로 쵸텐의 에이스인 잇신의 탈락이 확정되었다.

잇신의 몸이 홀로그램 입자가 되어 흩어지자. 아크만은 한숨 돌렸다며 기지개를 폈다.

“저 사람은 아쉽게 됐네요. 아무리 전투를 잘해도 역시 사기템은 못 이기죠.”

“그래. 1학년 중에서 산의 주인 카니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가락에 꼽을 거다.”

“뭐, 기껏해야 가온의 신유성. 마천루의 류진. 비앙카의 아델라. 그리고 우리 파티장님 정도겠죠?”

“스미레라는 사령술사도 의외의 전력이지만. 언데드는 네가 억제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전투력이 급상승한 스미레는 모든 이가 견제하는 엄청난 전력이지만. 아일랜드의 블린 아카데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의 파티에는 엄청난 신성력을 가진 존재가 있었으니까.

“당연하죠. 사령의 힘을 멸하는 건 사제의 본분이니까.”

바로, 청의 사제 아크만이 소속된 덕이었다.

“그리고 신유성. 그 사람은 걱정 마세요. 저희가 나머지 파티원을 다 탈락시키면 자기가 별수 있겠어요?”

“맞는 말이군. ……그럼 일단 가온의 사령술사부터 탈락시켜보도록 하지.”

아일랜드는 사령술사인 스미레는 아크만의 신성력으로 억제할 생각이었지만. 비정상적으로 전투력이 높은 신유성은 나머지 팀원을 탈락시켜 힘을 억제할 생각이었다.

그야말로 맞춤형 전략을 들고 나온 블린 아카데미였다.

후우-

엘란이 허공에 마나와 함께 숨결을 불어 넣자. 마나는 보라색 나비로 변해 하늘을 날았다.

펄럭이는 날개가 아름다운 보랏빛 나비는 그들을 스미레가 있는 곳으로 이끌어줄 인도자였다.

*     *      *

행운 토끼 카니나의 대 활약으로 잇신이 탈락해버린 상황. 방송을 지켜보던 신유성은 심각한 얼굴로 생각에 빠졌다.

‘시작 장소는 랜덤으로 정해지는데도 정령사와 사제가 제일 먼저 합류하다니…….’

아일랜드 파티인 아크만과 엘란은 팀플레이의 합은 물론이고 특성의 상성까지도 좋을 수밖에 없었다.

‘사제의 신성 능력은 스미레의 언데드는 억제하고. 정령사의 소환물은 강화시킬 거야.’

그 차이를 무마하려면 스미레는 상성을 뛰어넘을 전략이나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다. 보통의 학생들이라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스미레는 두 가지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신유성은 스미레를 신뢰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스미레가 늪에서 나오지 않고 자신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는 건 운을 배제한 가장 높은 승률의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이젠 그 효용을 스미레가 증명하기만 하면 되는 일.

‘변수가 있다면 언제 스미레와 아일랜드 팀이 격돌하는지인가?’

아직 이시우와 사쿠라가 독일팀과 마주치지 않은 걸 보면 전투의 양상은 장기전이었다. 아직까진 사령술사인 스미레에게 유리하게 흐르는 셈.

“흐음…….”

신유성이 파티장으로서 고민 중인 그 순간. 누군가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똑똑.

파티원 중 스미레와 이시우는 이미 경기에 참전한 상태였고, 김은아라면 노크를 할 리가 없었다.

“들어가도 될까?”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

“네. 들어오세요.”

신유성의 허락이 떨어지자 밖의 남자는 문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이네. 유성아.”

남자는 마치 오랜 인연인 듯, 익숙하게 신유성을 불렀지만.

“당신은…….”

상대의 얼굴을 본 신유성은 표정이 굳었다. 마지막 만남이 10여 년도 전임에도 혈연의 탓일까?

신유성은 얼굴을 마주한 것만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무작정 찾아와서 미안해. 그래도…… 이야기를 하기에 너무 좋은 기회라서 말이야. 네가 워낙 바쁘잖아?”

남자의 이름은 유월.

27세의 나이로 6급 헌터가 된 실력자였다. 하지만 신유성이 유월의 이름을 알고 있는 건,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저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 어머니의 부탁인가요?”

유월의 출신은 신오가문과 버금가는 권력을 소유한 유수가문이었고. 유수가문은 신유성의 어머니인 7급 헌터 유민서의 출신이었다. 신유성에게 유월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친척이었다.

“음…… 그렇다고 말하면. 나도 미움을 받게 되는 걸까?”

유월이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멋쩍게 웃었다.

“반쯤은 맞아. 하윤이가 이야기해줬겠지만 가문에선 네가 돌아오길 원하거든. 민서 누나도. 신강윤 가주님도 말이야.”

유월은 조심스럽게 신유성의 표정을 살피더니 장난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네게만 하는 말인데. 참 염치없는 사람들이야 그렇지?”

그리고 익숙하게 지어 보이는 부드러운 미소. 신유성은 인자하기만 한 유월의 표정에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럼…… 나머지 반은?”

“내가 널 만나고 싶었거든. 조사를 한 건 아니지만. 세간에 너에 관한 소문이 무성하잖아? 예를 들어…….”

유월은 여전히 미소를 유지한 채, 기억을 더듬는 듯 보였다.

“아, 그래! 그 골칫거리인 리벨리온의 멤버도 잡았었잖아? 대단한 활약이야.”

그리곤 유월은 짧은 감탄과 함께 기억이 떠오른 듯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자연스러움 속에 감춰진 이질감.

부드러움 속에 감춰진 날카로움.

신유성은 유월과의 짧은 대화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은 위험해.’

지금은 그저 감에 불과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신유성의 촉은 틀린 적이 없었다. 이건 유월이 유수가문 출신이기에 생기는 거부감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직감.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신유성이 차가운 어투로 묻자.

유월은 그런 신유성의 기분을 읽은 듯, 눈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나는 그저 묻고 싶었을 뿐이니까.”

파스스-

유월이 검지에 마나의 불꽃을 피웠다. 푸른색으로 시작했던 마나는 흰색으로 변하더니 곧 칠흑처럼 새까만 마나로 불타고 있었다.

파슷!

곧 강렬하게 타오른 불이 힘을 다하고 꺼지자 손가락 사이에 트럼프의 조커 카드가 끼워져 있었다.

“……네가 신하윤이 꾸미고 있는 일을 알고 있는지 말이야.”

유월은 그렇게 충격적인 말을 했음에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까처럼 눈웃음을 지어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