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귀가 얼얼할 정도로 쏟아지는 관객들의 함성. 경기장의 열기가 더해가는 순간 진행자는 하하- 하고 웃었다.
- 정말 엄청난 열기입니다! 이번 경기는 함성이 유독 큰 것 같은데요?
이번 경기가 국가대항전 중에서도 이렇게 주목을 받게 된 건 신유성의 공이 컸다.
무패의 전적.
권왕의 제자라는 타이틀.
그리고 사도닉스 레이드를 비롯한 외부 활동으로 신유성의 명성은 소문이 자자했다.
거기다 독일과 아일랜드는 EU연합 소속들 중에서도 에이스로 꼽히는 전력. 엄청난 관심이 쏟아지는 것도 당연했다.
- 참가 선수의 탈락과 관련된 룰을 제외한다면 보시다시피 서브 게임의 세부적인 규칙은 이전의 경기들과 동일합니다!
파앗!
[A팀]
[참가자]
가온(한국) : 이시우 / 스미레
쵸텐(일본) : 사쿠라 / 잇신
[B팀]
[참가자]
뮌헨(독일) : 라키온 / 베르단디
블린(아일랜드) : 엘란 / 아크만
스크린에 참가 학생들의 이름들이 떠오르며 포탈이 작동을 시작했다.
위이잉!
- 그럼 참가 선수들은 포탈 앞으로 이동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스미레는 파도처럼 마나가 일렁이는 포탈을 바라보자. 괜히 긴장이 됐다.
‘……이제 곧 시작이구나.’
하지만 걸어 왔던 길을 돌아보고 자신을 바라보는 신유성의 얼굴을 마주하자. 스미레는 긴장을 풀고 꽈악- 주먹을 움켜쥘 수 있었다.
‘난……. 꼭 이길 거야!’
* * *
[- 늪 -]
너무나 심플한 한 글자.
부스럭 부스럭.
스미레의 시작 장소는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는 음습한 늪이었다.
“여기는……. 산속?”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해도 보이는 거라곤 듬성듬성 자라난 나무와 습지 뿐. 시야가 막혀 있어 알 수 있는 정보가 적었다.
보통의 헌터에겐 최악의 장소였지만 스미레는 이야기가 달랐다.
‘시야가 좁아 정보를 얻기엔 나쁜 장소지만…….’
스미레는 화악- 몸을 숙였다.
이번 시작장소인 늪은 주변에 부서진 나무와 물풀이 높게 자라 은폐와 엄폐가 자유로웠다.
특히 시야가 제한되어 있다는 특성은 어떻게 보면 단점이지만 일부러 들어오지 않는 이상, 바깥에서 안 쪽을 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몸을 숨기기엔 최고의 장소야!’
본체의 전투력이 낮은 스미레에게 이보다 더한 환경은 없었다.
슬금슬금!
스미레는 썩어서 텅 비어버린 나무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리 안전을 추구하더라도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좀, 창피하지만…….’
스미레는 굴속에 숨어버린 너구리처럼 조용히 몸을 웅크렸다. 누군가는 이 플레이를 보고 비겁하다거나 겁쟁이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스미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속닥속닥.
“……사역마. 소환.”
사아아악-!
스미레의 말 한마디에 주변의 마나가 검은색 기운으로 변해 요동쳤다. 흩날리는 칠흑의 마나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는 두 쌍의 날개.
파악!
스미레의 부름대로 재림한 릴리스는 오랜만의 등장에 신이 났는지 날개를 펼치며 크게 소리쳤다.
“아아! 이 충만함……. 주인님이 나를 부르셨다! 모두 마녀의 재림을 경배…….”
평소처럼 잔뜩 겉멋이 든 대사와 함께 등장하는 릴리스.
“헉! 리, 릴리스 씨! 쉿-!”
하지만 오늘만큼은 스미레도 다급하게 조용히 하라는 액션을 취했다.
“무, 무슨 일 있으십니까?”
막상 소환된 릴리스의 입장에선 황당할 노릇. 하지만 스미레는 그런 릴리스에게 귓속말로 소곤소곤 직접 설명해주었다.
“……지금, 상대 팀에 성속성의 사제분이 있어요.”
“저런, 하필!”
사제가 있다는 이야기에 더러운 것이라도 본 듯 인상을 찌푸리는 릴리스.
“그, 그렇습니까? 그럼 주인님께서 이곳에 숨으신 건…….”
“저, 해골이랑 구울을 잔뜩 소환해서 ……이 늪 주변에 몰래 숨겨둘 생각이에요.”
스미레가 마치 특급 비밀이라는 듯 조심스럽게 작전을 말해주자. 릴리스는 감탄한 얼굴로 짝! 소리를 내며 박수쳤다.
“이렇게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선 음기가 강해지고 신성력이 약해지는 법! 매복이라니 역시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릴리스는 스미레의 말이라면 당장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충신. 비록 상대를 피해 누추한 곳에서 숨어 있지만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처해서 스미레의 옆에 쭈그려 앉을 정도였다.
“저 릴리스! 언제까지나 주인님의 옆을 지키겠습니다!”
그럼 이제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제대로 언데드 공장을 가동할 시간이었다.
스윽-
“……어둠은.”
손을 올린 스미레는 너무나도 조용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태양을 가려라.”
절망의 암운(Skill) - 검은 구름으로 태양을 가리고, 구름 아래에 언데드를 강화한다.
절망의 암운은 스미레가 소환의식을 할 땐 꼭 사용하는 아티팩트 스킬. 물론 평소라면 거창하게 검은색 구름이 하늘 높이 퍼져나갔겠지만 이번에는 낮은 고도에서 힘없이 퍼져나갔다.
[마녀의 흑마술이 사역마 소환의 효과를 강화합니다.]
[마녀의 흑마술이 절망의 암운을 강화합니다.]
과연 늪지대의 바깥에선 이 은밀한 장소에서 언데드 공장이 가동 중이라는 걸 상상이나 할까?
“그럼 일단 구울부터 10마리!”
스미레는 아예 자리까지 잡고 생산 라인을 가동해 언데드들을 뽑아내고 있었다.
“그르르륵…….”
“갸륵?”
물론 그렇게 생산된 언데드를 출품하는 건 릴리스의 몫이었다.
“그럼 주인님. 이 녀석들의 매복 위치는 제가 직접 일러두고 오겠습니다!”
릴리스는 스미레가 오롯이 언데드를 소환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역마와 사령술사 간의 분업으로 만들어낸 너무나도 효율적인 일처리.
그렇게 통솔해야할 언데드의 말릿수가 많아지자 스미레는 상급 사역마를 하나 더 불러냈다.
사아아!
“사역마 소환.”
스미레는 통솔해야할 언데드의 마릿수가 많아지자. 상급 사역마를 하나 더 소환했다.
“부르셨습니까? 저 데런. 주인님의 명이시라면 언제든 출격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유창한 말솜씨를 자랑하는 건 데스나이트에서 듀라한으로 상격한 데런이었다.
‘역시 저 모습은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가…….’
하지만 스미레는 그런 데런을 향해 떨떠름하게 웃어줄 뿐이었다. 데스나이트 일 땐 몰랐지만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듀라한은 스미레에게도 좀 공포스러웠다.
특히 잘린 금발의 머리가 너무나도 유창하게 말을 하는 모습은 더욱 그랬다.
“저, 그, 그럼 데런 씨는 여기서 동쪽 지역의 구울과 해골 전사들의 통솔을 맡아주세요!”
덕분에 데스나이트였을 때와 달리 시선을 피하며 듀라한에게 명령을 내리는 스미레.
데런의 잘린 머리는 그 사실도 모른 채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네! 맡겨만 주십시오!”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데런까지 해골마를 타고 늪을 떠나자. 스미레는 평평한 땅을 손으로 짚었다.
천천히 시간을 투자한 덕분에 스미레의 언데드 왕국은 안전하게 완성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본 게임이 남아 있었다.
‘긴장하지 말자……. 이 정도 크기의 땅이면 충분해! 충분히 소환 할 수 있어!’
어떻게든 자신을 안정시키며 스미레는 가볍게 심호흡을 했다. 이 소환식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기에 적이 공격해오면 큰일이었지만 스미레의 주변에는 언데드들이 깔려 있었다.
“……마나의 주인이여.”
스미레는 느릿한 목소리로 영창을 시작하며 세밀하게 몸 안의 마나를 느꼈다.
“안식에서 깨어나.”
자신의 몸에는 평소에 자신이 품고 있던 마나가 아닌, 다른 차원의 마나가 느껴졌다. 이건 드래곤 하트로 변환 된 마나. 벨벳이 선물해준 소중한 기회였다.
스미레가 눈을 감았다.
“죽음의 숨결로…….”
고차원의 소환식에 마나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은. 마치 하나의 이끌림 같았다. 그래 이끌림.
하급 사령술사였던 스미레는 이 모든 것이 운명 같았다. 자신이 신유성을 만났던 것도, 라플라스의 편린을 얻었던 것도, 수많은 선택지들 중 지금의 결과에 도달한 건 절대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새롭게 깨어나라!”
화아악!
스미레의 마음속 파문은 잠잠해지고, 마나는 파동이 되어 땅속으로 퍼져나갔다.
“보, 본 드래곤!”
정말 소환에 성공한 건지 아직 결과는 알 수 없었다.
구그그그-
하지만 스미레의 부름에 주변의 땅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너무나도 다급한 숨소리.
힘이 빠졌는지 엇박자로 달리는 발소리. 블린 아카데미의 아크만은 교복이 아닌 청의를 입고 죽어라 전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헉, 허억! 아아악! 진짜! 왜 하필 시작부터!”
휘이익!
아크만이 고개를 돌린 찰나.
뺨을 스쳐 지나간 검기가 바위를 박살냈다.
퍼엉!
아크만을 추격하며 검기를 날린 주인공은 다름 아닌 잇신.
스윽.
다시 검집에 검을 넣은 잇신은 계속 도망만 가는 아크만을 바라보며 한심하다는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다.
“……싸우지 않는 건가?”
“저는 데우스님의 사제입니다. 사제는 당신처럼 무식하게 칼질하지 않거든요? 알겠습니까?”
아크만은 계속 도망만 치는 주제에 혀가 길었다.
“잘 봐요. 우리가 어떻게 싸우는 지 보여줄 테니까.”
화악!
도망만 치던 아크만은 순식간에 몸을 회전하더니 잇신과 대면했다. 그러나 아크만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건 다름 아닌 한 권의 책.
촤르르-!
아크만이 쥔 책은 엄청난 속도로 종잇장이 넘어가더니 어떤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
“보이십니까? 이게 제 특성. 축복의 페이지입니다. 제가 싸우는 방식이죠.”
번쩍!
책에서 초록의 빛이 뿜어져 나오자 아크만의 몸은 금방 빛에 휩싸였다.
“훗, 큭! 당신 운이 나쁘군요!”
아크만은 이게 웬 횡재냐며 잇신을 앞에 두고 호탕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미친 건가?”
잇신이 발도 자세를 취하며 검집에 손을 올렸음에도 아크만은 검지를 까딱까딱- 움직이며 여유를 보였다.
“그렇게 서두를 것 없습니다. 방금 제게 내린 축복은 [바람의 날다람쥐]. 이름처럼 몸이 가벼워지고 재빨라지는 축복이죠.”
아크만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자세를 잡았다. 눈까지 이글거리는 그 모습은 투지가 넘쳐 흘렀지만 덩치가 작은 탓에 위협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바로 지금! 데우스님의 바람이 나를 인도한다! 과연 당신이 따라 잡을 수 있을까아아아-!”
타악! 탁! 탁탁탁!
아크만은 그 단말마를 끝으로.
사족 보행을 하더니 마치 날다람쥐 같은 날쌘 점프로 바위를 타고 등반을 시작했다. 아무리 잇신이라도 차마 쫓을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하! 어때! 이 무식한 놈아! 이건 못 따라오겠지!?”
그렇게 엄청난 속도로 자랑스럽게 바위를 타고 오르던 아크만은 산의 정상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뭐야! 당신 여기 있었어요?”
산의 정상에서 아크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 명상을 취하고 있는 엘란이었다.
“생각보다 이른 만남이군. 운명의 바람이 널 이끈 것인가?”
“지금 헛소리 할 때가 아니에요! 밑에서 쵸텐 아카데미가…….”
“이미 알고 있다. 네가 오는 것도. 그자가 오는 것도. 바위의 정령이 내게 일러주었지.”
그 말을 끝으로 엘란이 명상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아크만은 든든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라도 2대1은 이기겠지!’
팟!
아크만은 진지한 얼굴로 자세를 잡더니 자신이 타고 올라온 암벽을 가리켰다.
“잘 됐네요! 그럼 버프 걸어 줄 테니까 같이 패요!”
잇신은 암벽을 올라오느라 지쳐 있을 테니 둘이서 합공을 한다면 타이밍은 완벽했다.
“아니. 그럴 것 없다.”
하지만 엘란은 아크만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팔짱을 낀 채 저음의 목소리로 읊조렸다.
“마침.”
쏴아아-!
“그분이 오셨거든.”
아크만은 갑자기 땅이 솟는 느낌과 함께 하늘을 향해 승천했다.
“우오오오오- 어어어!?”
이리저리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을 짚는 아크만. 하지만 아크만의 손에 닿은 건, 땅이 아닌 푹신한 흰색 털이었다.
“뀨- 뀨뀨?”
언젠가 들었던 토끼의 울음소리에 아크만은 전율했다. 반쯤 나갔던 영혼이 돌아오자 흥분한 얼굴로 크게 소리쳤다.
“미, 미쳤다-! 진짜! 진짜! 소환했어!”
반면에 당연하다는 듯 자신감에 찬 엘란의 얼굴.
“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