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산과 구름이 하늘에서 맞닿은 마치 무릉도원 같은 풍경. 하지만 사제복을 입은 남학생은 그런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겠다는 표정으로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 망할……. 경기를 하루 앞두고 이딴 곳에 처박혀 있어?”
팀전을 앞둔 1분 1초가 아까운 순간 이런 짓을 벌이다니.
“아 진짜 저 놈팽이를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아크만은 아일랜드의 블린 아카데미 소속이기 전에 창조신 데우스를 믿는 신실한 신도였다. 즉 급조된 파티원에 대한 이해보다는 자신의 사제복이 소중한 남자.
“씁……, 사제복이 넝마가 됐잖아. 이게 어떤 옷인데.”
아크만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사제복을 내려다보았다. 아크만이 입고 있는 사제복의 이름은.
靑衣(청의).
이건 교회 출신 중에서도 ‘청의 사도’로 선택된 자들에게만 내려지는 사제복이었다. 그리고 아크만은 겨우 17살의 나이에 역사상 최연소로 ‘청의 사도’가 됐다. 아크만은 그야말로 엘리트란 말에 가장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어이! 무시하기입니까?”
절대로 맨몸으로 이런 험준한 산을 등반하며 생고생을 할 남자가 아니었다.
“확 머리통을 후려 버리기 전에 사람이 왔으면 좀 쳐다봐요!”
정상에 도착한 아크만이 방방 뛰며 죽일 듯 소리치자,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던 은색 장발의 남자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넌……. 하으음……. 미안하군. 잠깐 잠든 모양이야. 근데 대체, 언제 여기까지…….”
은발의 장발남은 여전히 뻑뻑- 하품을 하는 걸 보면 잠이 덜 깬 모양이었다. 물론 아크만은 그 모습에 더욱 열불이 터졌다.
“아아악!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포켓도 다 처 꺼두고 여기서 뭐 하는데요?”
“그것이 궁금해서 여기까지 온 건가? ……재미있군. 네가 그리 나에게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다만.”
“하아…….”
아크만은 엘란이 참 신기했다.
이 남자는 뭔 말을 해도 사람 속을 긁어먹는 재주가 있었다.
“상. 식. 적. 으. 로. 그게 궁금해서 여기까지 왔겠습니까? 경기 앞두고 잠수 타니까 찾으러 왔지?”
아크만은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손을 짚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엘란을 노려보았다.
“가온의 그 괴물 못 봤어요? 디안 님이 우승하시려면 우리가 걔네 팀원이라도 탈락시켜줘야 할 거 아니에요. 예?”
주변인들에게 아크만은 전설이었다. 덕분에 그를 칭송하기 위해 붙은 호칭도 무려 ‘잔소리의 아크만.’
“그리고 우리가 EU 애들이랑 연합은 왜 맺었겠어요? 승률을 조금이라도 올려 보려는 건데 여기서 놀고 있으면 부끄럽지도 않아요?”
잔소리를 하며 아크만은 엘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렇게 거리가 좁혀지고 나서야 보이는 낚싯대.
“이건 또 뭐야……. 낚싯대를 왜 물고기도 없는 웅덩이에 던져 놔요? 아무것도 없는데…….”
아크만이 혹시 이 남자 미친 건가? 하는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엘란은 너무나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어리석은 이야기. 내가 낚고 있는 건 물고기가 아니라. 이곳의 주인이다.”
“……주인?”
아크만은 영문 모를 말을 하는 엘란을 보며 생각했다. 이 남자 미친 게 분명하다고. 애당초 경기를 앞두고 수련은 고사하고 이런 산에나 놀러 다니는 사람이다.
‘……머리가 멀쩡한 사람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아크만이 경멸에 찬 시선으로 노려보는 그 순간. 엘란은 갑자기 흠칫 몸을 떨었다.
“잠깐! 정말…… 찾아온 건가? 아무래도 이곳의 주인은 내가 아닌 네가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러니까 대체 무슨 소리에요? 빨리 지금이라도 가온을 분석하고 이길 준비나…….”
“아크만. 내가 이 산에 찾아온 건 우리가 승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이 산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말한 엘란이 일어섰다.
190이 넘는 엄청난 거구에 160을 조금 넘긴 아크만은 고개를 드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가, 가온을 이길…… 유일한 방법이요?”
아크만은 엘란의 말에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압도될 정도로 거대한 산과 정상에 맞닿은 아득한 구름들뿐.
하지만 엘란은 확신에 찬 얼굴로 소리쳤다.
“그래! 그렇다! 아크만! 날 믿고 눈을 감아라!”
“아 씨, 진짜…….”
아크만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눈을 감았다.
“아, 오고 있다! 그래. 이곳의 주인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어!”
“아, 미친 진짜…….”
아크만은 이제 곧 기도를 드릴 시간에 이런 싸이코와 산 정상에서 노닥거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엘란의 말대로 정말 눈을 감고 있으니 무언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마나’라는 차원을 뛰어넘은. 형상은 보이지 않지만 일종의 감이었다.
“아크만 느껴지는가! 우리에게 다가온 그것의 존재가? 너를 지켜보고 있는 그것의 시선이!?”
정신 나간 듯 소리치는 엘란의 목소리에 눈을 감은 아크만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느껴지는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무언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 시선이 느껴졌다. 그 뒤 찾아온 건 숨이 막혀올 정도로 강렬한 위압감.
“아크만.”
엘란이 아크만을 불렀다.
“눈을 떠라.”
작게 읊조린 엘란의 목소리에 아크만이 눈을 떴다.
화아악-!
거센 바람과 함께 구름들이 갈라졌고, 가려진 풍경이 햇빛에 비치며 위압감의 정체가 드러났다.
“……보이는가. 아크만?”
담담한 엘란의 목소리.
반면 아크만은 아연실색해진 표정으로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카니나다. 이 산의 진정한 주인이지.”
번뜩이는 붉은 눈.
윤기 있는 털과 새하얀 몸.
“이건…….”
산처럼 거대한 몸체의 카니나를 보며 아크만은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냥 엄청 큰 토끼잖아요…….”
“뀨- 뀨뀨?”
카니나(Kanína)
정령사 엘란이 말한 비밀 병기의 정체는 너무나도 거대한 토끼 정령이었다.
* * *
국가대항전 서브 게임.
팀전 경기 당일.
첫 주자가 된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단 하나의 탈락자도 없이 승리했다. 파티장인 아델라가 빠졌음에도 엄청난 기록.
“……쉽게 끝나서 다행입니다. 참고로 루마니아의 멤버들은 아티팩트를 공수해올 확률이 상당히 높다고 예측했었습니다. 다만 정치적인 이슈가 있어 파티장만 허가가…….”
“그 이야긴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 두 번이나 들었어요. 소피아.”
소피아의 말이 너무 많아지자 웃으며 제지하는 레온. 무안해진 소피아는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아, 제가 아델라 님께도 설명을 드렸었나요? 죄송합니다.”
소피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자.
레온은 힐끔-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레온과 소피아가 승전보를 알리고 왔음에도 아델라는 기뻐하는 일 없이 무감했다.
“……괜찮습니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
차가운 말투.
레온은 그런 아델라의 태도가 어렵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어렴풋이 아델라의 성격에 대한 갈피를 잡고 있긴 했다.
‘그냥 저분은 순수하게.’
정말 아무런 악의 없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거야.’
파티원에게 조금의 관심도 가지질 않았다. 어쩌면 전투의 결과마저도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레온과 소피아는 아델라에게 체스 말일 뿐. 정말 우승과 탈락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건 아델라였다.
그리고 그게 이번 EU연합에서 아델라가 수장으로 꼽힌 이유이기도 했다.
스윽.
레온은 싱글거리는 미소를 유지한 채 아델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처음에는 아직 친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거리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알 것만 같았다.
‘……이 사람은. 어딘가 고장 나 있어.’
그저 흔한 악담이 아니었다.
레온은 상대의 감정을 읽는 데 능숙했다. 상대가 무엇에 기뻐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를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의 호감을 사는 건 레온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델라는 알 수가 없었다.
당장 왜 변덕을 부리고 이탈리아로 귀환했는지, 왜 국가대항전에 참가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애초에 아델라의 감정을 읽어내는 건 물론이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캐치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니 기호를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지금까지 지낸 레온의 평가로선 아델라에게 그런 감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기쁨도 슬픔도 없는 무감한 인형처럼 보였다.
‘엄청난 미인이니. 웃으면 참 보기 좋을 텐데.’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
어쩌면 당연했다.
이탈리아에서 아덴의 손녀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끔찍한 조난을 당하고 멀쩡한 게 오히려 이상했다.
‘어찌 보면 불쌍한 사람인가…….’
아델라에 대한 평가를 감정이 없는 인형 정도로 결론을 내린 레온. 루인 성의 일을 겪기 전인 아델라라면 그게 정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소피아. 다음 경기 팀은 누구죠?”
“곧 방송에 잡힐 겁니다. 한국의 가온 아카데미와…….”
“가온?”
가온이라는 단어에 무표정했던 아델라가 갑자기 반응을 보였다.
[아, 참가 선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일본의 사쿠라 선수와 잇신 선수! 한국의 이시우 선수!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스미레 선수인데요!]
마침 방송에서도 가온을 비롯한 참가팀들을 보여주자. 아델라는 흥미로운 듯 무릎 위에 손까지 모으며 자세를 잡았다.
[근데 스미레 선수…… 옆에 있는 꼬마는 대체?]
하지만 그중에서도 레온을 무엇보다 충격받게 한 모습은 방송에 벨벳이 잡힌 순간.
“벨벳!”
평소에는 들은 적 없는 하이톤으로 벨벳을 부르는 아델라의 모습이었다.
파앗!
아델라가 갑작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당황해서 아델라를 바라보는 레온과 휙- 고개를 돌리는 소피아.
“저, 아델 라양. 무슨 일…… 있으신가요?”
레온이 갑작스러운 아델라의 기세에 놀란 얼굴로 말을 걸자. 아델라는 반가운 마음에 눈이 커지더니 자랑하듯 벨벳의 얼굴을 손짓으로 휙휙- 가리켰다.
“저 아이……. 제 딸입니다!”
“아, 아……. 그, 그렇군요.”
처음 보는 아델라의 반응.
갑작스러운 자녀 커밍아웃.
너무나도 충격적인 2가지 소식 중에서 레온은 어디서 놀라야 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더 어이가 없는 건.
“……잠시 기다리세요.”
라는 말을 끝으로 후다닥- 대기실을 나간 아델라가.
[무슨 일이죠!? 아델라 선수가 경기장에 난입했습니다!]
곧 방송에서 보이더니.
[아 스미레 선수 옆에 있던 아이를 끌어안았는데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경기 진행을 위해서인가요? 아델라 선수가 아이를 데리고 떠났습니다!]
끼익.
“캬항! 다들 안녕! 난 벨벳이야!”
정말 ‘자칭’ 자신의 딸을 데리고 대기실로 돌아온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