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3화
“너 못 먹어 봤지? 토마토랑 감자도 소금 뿌리면 맛있어. ……아니지 설탕이었나?”
뒤적뒤적.
김은아는 그 말과 함께 냉장고를 살폈다.
‘……가, 감자랑 토마토!’
역시 벨벳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김은아는 주방에 들어갔을 때부터 뭔가 심상치 않았다. 냉장고를 확인하는 솜씨도 어설펐고, 주방의 구조를 모르는 게 티가 났다.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게써!’
벨벳은 심각한 표정으로 냉장고와 주방을 살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식사시간에 찐 감자와 생 토마토만 먹어야 한다니? 무슨 일이 있어도 벨벳은 그 참사를 막아내야 했다.
지잉- 파파팟!
벨벳은 드래곤의 지성을 이용해 두뇌를 100% 회전시켰다. 짧은 기억들을 회상하며 최선의 해답을 떠올리려 애썼다.
‘캬항! 떠올렸다!’
하지만 해답을 말하기 전에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은아 엄마의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는 것!’
그 짧은 시간 동안 자존심이 강한 김은아의 성격까지 모두 파악을 끝내다니. 역시 벨벳은 무서운 아이였다.
“……그, 그것보다 벨벳은 카레! 스미레 엄마가 만드는 거 본 적 있어! 여기 있는 재료 다 들어가!”
“어? 카, 카레?”
물론 기껏해야 토마토를 썰고 감자를 쪄줄 생각이었던 김은아는 당황한 내색이 역력했다.
스미레에게 카레는 별거 아닌 요리였지만 귀하게 자란 김은아는 계란도 직접 삶아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카레라니?
“응! 벨벳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 스미레 엄마가 만드는 거 봤어! 도와줄 수 이써!”
하지만 영리한 벨벳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찐 감자와 생 토마토에 소금과 설탕을 반찬 삼아 식사를 해야 했다.
“……카레가 먹고 싶다는 거지.”
김은아는 벨벳의 부탁에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하더니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좋아 만들어줄게! 레시피를 보면 되니까.”
“캬항! 벨벳도 도울 거야!”
“야, 다치면 어쩌려고? 절대 안 되니까 구경만 해.”
하지만 자신감을 내비치는 벨벳의 모습에도 김은아는 요리에 참가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
“조아! 아라써! 벨벳은 착한 드래곤이라 말 잘 들어! 조용히 구경만 할 거야!”
벨벳은 주방이 잘 보이는 상석에 의자를 가져와 김은아의 요리를 옆에서 지켜볼 모양이었다.
“보자. 일단 재료 손질부터…….”
그러나 김은아가 중얼거리며 주방을 서성이자. 벨벳은 슬그머니 냉장고에서 스미레가 손질해둔 양파를 꺼냈다.
“허걱! 어, 엄마! 이거 바바! 여기 껍질을 깐 양파가 있어! 스미레 엄마가 손질해 뒀나바!”
마치 우연인 듯 와앗-! 하고 과장되게 놀라는 벨벳. 김은아는 속아 넘어갔는지 냉큼 봉투를 받아들었다.
“진짜네. 잘 됐다. 스미레도 카레를 만들려고 했던 건가? 그럼 보자. 레시피에는 양파부터…….”
김은아가 확인한 레시피는 버터로 볶은 캐러멜라이즈 된 양파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건 양파를 뒤섞어주며 고도의 온도 조절까지 해야 하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불 올리고. 팬에 버터 올리고. 그리고 양파 넣고……. 한동안 이렇게 두면 되나?”
김은아는 레시피를 보면서도 확신이 생기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지금까진 순서가 맞는지 너무나 편안해 보이는 벨벳의 얼굴.
“캬항-!”
하지만 김은아가 한동안 양파볶음을 방치하자. 점점 벨벳의 표정이 아주 심각해졌다.
‘크, 큰일 나써…….’
캐러멜라이즈가 생명인 양파볶음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팬의 열을 고루 전달하는 것. 하지만 양파를 뒤적이지 않으면 캐러멜라이즈가 진행되기 전에 양파는 타버리고 만다.
‘이, 이대로는 양파가 검게 타버릴 거야!’
하지만 지금 충고를 던지는 건 김은아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 벨벳은 어머니인 김은아의 자존심을 지켜줄 의무가 있었다.
“……흐응, 카레에 당근이 이렇게 많이 들어가?”
그렇기에 김은아가 시선을 당근으로 돌린 사이 벨벳은 조심스럽게 양파 곁으로 다가갔다.
살금살금.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조용히 다가간 벨벳은 온도를 몰래 낮춰버렸다.
‘……다행이야! 이 온도라면 한동안은 타지 않아.’
1분 3분. 5분.
스미레가 10초면 끝내버릴 당근 손질을 하루종일 씨름하던 김은아는 뒤늦게 소리쳤다.
“어, 아! 맞다! 양파!”
레시피와 달리 너무 늦게 뒤적였지만 다행히 타버린 양파는 없었다. 이건 모두 천재 드래곤 벨벳의 손길이 닿았기 때문!
‘휴 다행이야!’
하지만 뿌듯해하긴 일렀다.
벨벳의 고난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준비해둔 재료 넣는 걸 깜빡한 김은아 대신.
스윽.
몰래 접시에 담긴 당근을 털어 넣어버리고 호다닥- 자리에 돌아와 시치미를 떼는가 하면.
“이거 통째로 하나인가?”
김은아가 레시피보다 2배나 많은 고체 카레를 넣으려고 하자. 한눈 판 사이 고체 카레를 반으로 쪼개 놓았다. 그야말로 벨벳의 보이지 않는 손.
“뭐지…….”
김은아는 갑자기 이질감이 느껴질 때면 벨벳을 바라봤지만. 벨벳은 그럴 때마다 딴청을 피웠다.
“캬항! 이 공룡! 분명 드래곤의 친구야!”
지금까지 실수를 합치면 10개가 넘어감에도 너무나 술술 풀리는 김은아의 카레 조리.
“자. 이 정도 끓이면 됐겠다.”
우여곡절 끝에 카레를 완성한 김은아는 국자로 한술 떠 맛을 보았다.
“……어?”
탄성이 나올 거란 벨벳의 예상과 달리 김은아의 표정은 너무나 심각했다.
“……뭐지?”
김은아는 이게 맞는지 의심이 간다는 얼굴로 한 숟갈 더 카레를 맛보더니. 뒤늦게 중얼거렸다.
“……나 요리에 재능 있나?”
아무래도 김은아는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었다. 정작 요리를 성공시킨 벨벳은 기진맥진해진 얼굴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역시 은아 엄마는 대다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