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스미레는 마지막으로 봤던 라플라스의 성을 기억했다. 그때 본 성의 모습은 화려하긴 했지만 절대로 이 정도의 규모는 아니었다.
“와아…….”
투명한 다이아로 번쩍이는 화려한 샹들리에와 고성에 어울리는 엔틱한 가구들.
그리고 무엇보다 신기한 건.
“환영합니다. 스미레 님. 라플라스 님은 외곽의 방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괜찮으시면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엘프처럼 귀가 큰 집사와 성을 청소하고 있는 하인들의 존재였다.
“아, 네!”
저벅저벅.
스미레는 집사를 따라가던 와중 또 새로운 점을 발견했다. 성의 규모가 더욱 커진 탓인지 이전엔 보지 못한 창문의 존재였다.
‘창밖에 숲과 호수가…….’
이곳은 스미레처럼 허락받은 자들이 아니라면 들어 올 수 없는 라플라스의 심상세계였다.
그러니 이 세계가 넓어진다는 건 그만큼 라플라스의 힘이 강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성 밖의 세상까지 구현하실 정도라니…… 라플라스 님은 얼마나 강해지신 걸까?’
사실, 라플라스의 힘이 강해진 가장 큰 이유에는 계약자인 스미레가 성장한 것이 컸다.
지금의 라플라스는 본체가 아닌, 그녀의 기억이 담긴 조각이자 편린. 성장의 폭이 큰 건 계약자인 스미레 쪽이었다.
“라플라스 님이 계신 방은 이곳입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십시오.”
끼이익.
집사의 인도에 따라 도착한 방문이 열리고.
- 후훗, 어서 오거라. 내 너를 목이 빠져라 기다렸단다.
테이블과 의자를 준비해 둔 채 여유롭게 차를 마시며 웃고 있는 라플라스.
“라플라스 님!”
스미레는 그런 라플라스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어쩐지 라플라스는 서운한 표정이었다.
- 가끔은 내 성에 들려도 좋으련만. 이러다 아주 얼굴마저 잊을 지경이구나.
“헤헤…….”
그러나 멋쩍어 하는 스미레의 표정에 라플라스는 투정을 거두고.
스윽.
라플라스가 이 심상 세계에서 직접 끓인 찻잔을 내밀며 스미레에게 물었다.
- 너는 사령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네? 그건…….”
하지만 스미레는 이런 거창한 주제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지금처럼 당황하는 것도 당연한 이치. 라플라스는 그런 스미레의 모습마저 귀여운 듯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그리 허둥댈 거 없다. 정답은 없으니 다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사령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료’에 대한 이해라고.
툭. 흔들흔들-
라플라스는 찻잔에 담긴 티백을 흔들며 웃었다.
“……재료에 대한 이해라면. 드래곤의 뼈에 대한 말씀이신가요?”
- 흐음, 그것보단…… 좀 더 원론적인 이야기란다. 예를 들어 이 찻잎을 보거라. 처음에는 그저 떫게 느껴지지만 입 안에 남는 고소한 맛과 은은하게 감도는 잎의 향기가 일품이지.
라플라스는 손바닥으로 찻잔을 가렸다. 그리고 다시 손을 떼자 찻잔은 마술처럼 두 개로 늘어났다.
사악-
-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찻잎에 따라. 조절해야 할 물의 온도와 시간이 다르단다. 물이 뜨거울수록 차의 농도는 진해지고. 차가울수록 단맛과 향이 살아나지.
라플라스가 손바닥으로 찻잔을 감추자. 이번에는 다시 찻잔이 사라졌다. 심상 세계의 모든 것은 라플라스의 마음대로 움직인다. 이건 마술 따위가 아닌 이 세상의 규칙 같은 것.
- 이 작은 찻잔에도 이렇게 깊은 묘리가 있건만. 사령술이라고 어찌 다르겠느냐? 사령술의 근본이 되는 소환물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절대로 유능한 사령술사가 될 수 없지.
1타 강사인 라플라스의 강의에 스미레는 존경심이 담긴 표정으로 진지하게 경청 중이었다.
“……역시 라플라스 님! 소환물에 대한 이해라니 전 지금까지 그런 부분은 생각조차…….”
- 어허, 이건 기본 중 기본이니라. 자, 드래곤 하트에 대해 말하기 전 먼저 드래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거라.
드래곤은 완벽한 종족이다.
- 드래곤은 수백 년. 길게는 수천 년에 한 번 알을 낳는다고 하더구나.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면서도 후손을 낳는 건 손에 꼽지.
긴 세월을 살고 어떤 세력에게도 밀려나지 않으며 생태계의 정점에 군림하는 존재다. 그러니 드래곤은 후손을 여럿이나 낳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 대신 그렇게 태어난 드래곤의 헤츨링은 너무나도 완벽하단다. 언어와 높은 지능은 물론이고 가늠할 수 없는 마나를 타고나지. 알을 깬 순간, 헤츨링이 가진 그릇의 크기는 이미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하단다.
라플라스의 말에 스미레는 벨벳을 떠올렸다. 스미레의 눈에 벨벳은 그저 귀여운 아이였지만 갓 태어났음에도 너무나도 똑똑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 자. 그럼 생각해보려무나. 데스나이트와 듀라한은 결국 몸을 움직일 근원. 그러니까 기사의 영혼이라는 ‘재료’가 필요하단다. 지능이 없어 인형이나 다름없는 구울에게는 마나가 담길 시체가 곧 재료이지.
라플라스는 스미레를 바라보았다.
- 그렇다면 본 드래곤의 재료인 드래곤 하트는 무슨 장치라고 생각하느냐?
사전의 지식이 없다면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이었지만 라플라스는 스미레를 의심하지 않았다.
라플라스의 얼굴에는 스미레가 이 문제의 정답을 맞힐 것이란 믿음이 담겨 있었다.
“그건…….”
이젠 스미레가 그 믿음에 응답할 차례. 스미레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조합해 차분히 생각했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상식에 의하면 드래곤에게 드래곤 하트가 필요한 이유는 거대한 마나를 변환하기 때문이다.
그건 강력한 펌프질로 혈액을 순환시키는 심장과 같았고, 마나의 성질을 순도 높게 변환해주는 필터와 같았다.
하지만 뼈로 이루어진 본 드래곤에게 심장은 필요하지 않았다.
드래곤처럼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고 거대한 몸체가 무기인 본 드래곤은 어디까지나 드래곤의 아류작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드래곤 하트가, 그에 걸 맞은 힘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꽈악.
생각을 마친 스미레는 주먹을 쥐고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저, 처음에는 드래곤 하트가 본 드래곤의 심장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 그렇구나. 그럼 이젠 생각이 달라졌느냐?
스미레의 대답에 라플라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녀의 표정은 이미 기대심으로 부풀어 있었다.
“네……. 심장은 드래곤에게 혈액이나 마찬가지인 마나를 몸 전체에 순환시켜주는 부품. 하지만…… 본 드래곤의 뼈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건 심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그래? 정말 재미있구나. 예를 들자면?
라플라스의 집요한 물음에도 이미 스미레는 생각을 마치고 확신을 가진 상태였다. 그렇기에 너무나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 할 수 있었다.
“계약자의 신호. ……그러니까 인간의 마나를 드래곤의 마나로 변환해줄 척수가 필요했던 게 분명해요. 아니면 드래곤 하트에 상응하는 힘. 그러니까 이미 드래곤 하트로 변환된 마나가 재료로 필요한 게…… 아닐까요?”
물론 멋지게 대답했음에도 말꼬리를 흐리는 건 너무나 평소의 스미레다웠다.
스윽.
라플라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스미레의 곁으로 다가갔다.
- 정말, 정말이지. 완벽하다! 역시 넌 내 아이가 분명하구나!
그리곤 화악- 하고 스미레를 자신의 품에 껴안았다. 척하면 척. 1타 강사와 우등생의 조합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라, 라플라스 님 숨이…….”
살인적인 포옹으로 압박하는 라플라스 탓에 스미레는 숨을 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라플라스의 모습에 기분이 좋았다.
- 후훗, 그럼 추론과 해설의 과정을 마쳤으니 이제 응용을 할 차례구나.
바로 고기를 잡아주는 게 아닌 그물을 던지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라플라스의 교육은 역시 사령술의 1타 강사였다.
- 너는 본 드래곤의 재료로 사용할 드래곤 하트는 없지만 드래곤 하트로 변환된 마나를 무한하게 만들어내는 존재가 있단다.
“네? 설마…….”
지금 스미레의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은 하나밖에 없었다. 라플라스는 그런 스미레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그래 그 드래곤 꼬마 말이다. 그릇이 보통 큰 게 아니니 반나절만 품에 껴안고 있어도. 본 드래곤의 소환은 어렵지 않을 게다.
정말이지.
해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 * *
방송을 하러 떠난 에이미.
여러 절차 준비로 바쁜 신유성.
라플라스를 만나러 간 스미레.
팀전 준비를 하러 떠난 이시우.
결국 팀전에서 빠진 김은아가 벨벳과 단 둘이 남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너 포켓을 잘도 사용한다?”
김은아는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되는 주제에 영상시청에서 웹서핑에 이르기까지 포켓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벨벳이 신기했다.
“응! 핑크머리 언니가 사줬어.”
하지만 그것보다 신기한 건 벨벳의 호칭에 관한 기준이었다.
“근데 너. 왜 나는 엄마라고 부르고 에이미는 엄마라고 안 부르는 거야?”
“캬항~ 엄마라고 불러도 되는 건 스미레 엄마! 김은아 엄마! 아델라 엄마뿐이야! 벨벳은 똑똑해서 그 정돈 알아.”
하지만 벨벳의 대답에 김은아는 더 의심스러워졌다. 처음에는 애가 뭘 알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벨벳은 가끔 너무 똑똑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 기준이 뭔데.”
“캬항~ 그런 건 몰라~”
“……흠.”
하지만 김은아도 당당하게 고개를 저어버리는 벨벳을 더 이상 캐물을 순 없었다.
거기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허걱, 엄마! 엄마! 이거 봐!”
벨벳과 김은아는 스미레가 자리를 비운 탓에 둘 다 식사를 거른 참이었다.
“엄청 마싯겠다…….”
그런데 벨벳이 포켓 속 음식을 보며 침을 흘리자 김은아는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먹고 싶으면 사줄까?”
“헉! 너무 조아!”
눈을 빛내는 벨벳의 반응에 결국 김은아는 한숨을 쉬며 카드를 꺼내려 했지만.
“아, 맞다 두고 왔지…….”
원래는 한 몸처럼 익숙한 카드가 지금 김은아에겐 없었다. 본래의 부유함 덕분에 지원금조차 받지 않은 탓에 지금 김은아가 가진 잔액은 0원.
“엄마 갠차나. 벨벳은 굶으면 대. 벨벳은 드래곤이라서 일주일 정도는 굶어도 살 수 이써…….”
배를 움켜쥔 벨벳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위로하자. 김은아는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
“대체 누가 굶긴대? 주방에 있는 걸로 만들어 먹으면 되지.”
“헉, 요, 요리!? 요리는 스미레 엄마만 할 수 있는 거 아니어써?
벨벳이 김은아의 말에 정말 충격을 받은 듯 바라보자. 김은아는 코웃음을 치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게 뭐 어렵다고? 귀찮아서 안 할 뿐이지. 따라와.”
마치 요리에 자신이 있는 것처럼 너무나 당당하게 냉장고를 여는 김은아.
“보자. 냉장고에……. 감자랑, 토마토. 당근……. 양파. 이건 무슨 고기지? 딱 봐도 닭은 아닌 거 같은데…….”
벨벳은 김은아의 중얼거림에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김은아의 요리는 분명 스미레와 다르다는 걸. 지금까지 먹었던 식사와는 다른 경험을 하게 될 거라는 걸. 물론 그 직감을 확신하게 만든 건.
“찐 감자랑 토마토 먹을래?”
이 수많은 재료 속에서 김은아가 결정한 빈약한 메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