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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6화 (206/434)

제206화

결전의 날.

결판을 내기로 한 점심시간에 앞서 김석한은 이른 아침부터 신유성을 불러냈다.

-짹! 짹짹!

머리 위를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파랑새들과 푸르른 풀잎이 가득한 아름다운 앞마당.

하지만 이곳은 그대로의 자연이 아닌 김석한의 입맛에 따라 꾸며진 인조적인 경관이었다. 푸른 깃털의 파랑새들은 사용인들이 직접 먹이를 주며 기른 새였고, 물을 머금은 풀잎이 아닌, 말라버린 앞마당의 인조 잔디 속에서 벌레 한 마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입맛에 따라 좋은 것은 남기고 싫어하는 것은 당연히 쳐낸 것이다.

그것이 사소하게는 저택 앞의 마당이라 하여도. 신성그룹이라는 왕국에서 김석한의 입김이 스며들지 않은 곳은 없었다.

“아침부터 불러내서 미안하군.”

오늘 기분에 따른 단 한 번의 식사를 위해 준비된 테이블에 앉아 김석한이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해해주길 바라네. 은아가 일어나기 전에 부를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늘의 김석한은 가족 식사에서 보았던 모습과 조금은 달랐다. 은아의 행동에 전전긍긍하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김석한은 정적이고 딱딱했다.

“괜찮습니다. 저에겐 이른 시간도 아니거든요.”

“그래? 다행이군.”

재계의 철혈이 녹아버리는 건 어디까지나 손녀의 앞. 신유성은 그에 해당하지 않는 듯 보였다.

“그나저나 아무리 은아의 일이라도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 부를 생각은 없었는데 말일세. 참, 고생이 많아.”

마치 배려해주는 듯 보이지만 이건 일종의 기선 제압. 방금 전 김석한의 말은 이번 이야기가 가족의 일이라며 선을 긋는 행위였다.

김석한을 비롯한 신성그룹의 일원들과 달리 신유성은 김은아의 가족이 아니었다. 그러니 김석한은 신유성이 방관자나 다름없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준혁이의 일은 고맙지만. 이 녀석은 이쯤에서 빠져주면 좋겠는데 말이지.’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신유성의 입지를 줄인다면 김은아를 꼬드기는 게 더 쉽다고 생각을 마친 상황. 결국 시간까지 내며 이른 아침에 불러냈지만…….

“괜찮습니다. 저와 관계없는 일이 아닌걸요. 다름 아닌 은아의 일이니까요.”

신유성은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치며 맞은편의 자리에 앉았다. 서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 그 속에서 김석한은 굳은 표정으로 입꼬리만을 올려 웃었다.

“그래? 아직 반년도 안 된 사이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아주 각별한 사이처럼 말하는 걸 보니. 우리 은아와 많이 친해진 모양이군.”

역시 이번에도 김석한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김석한은 김은아가 태어난 이후 계속 손녀 바보를 자처한 자신과 기껏해야 반년밖에 안 된 관계인 신유성은 크나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유성은 그런 김석한을 비웃듯 알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은아는 저에게 너무나 소중한 파티원입니다. 그리고 은아를 그렇게 여기는 건 저뿐만이 아닙니다.”

김석한은 그런 신유성의 태도에 더 이상은 여유를 유지할 수 없었는지 주먹을 움켜쥐며 노려보았다.

“그래? 가족인 우리보다 말인가?”

얼핏 감정적으로 상황이 변할 수 있는 순간. 신유성은 김석한을 차분히 파악했다.

“……그런 말은 섣부르게 뱉을 수 없습니다. 가족으로서, 그리고 신성그룹의 일원으로서 은아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런 신유성의 모습에 김석한은 일순간 분위기가 변한 느낌을 받았다.

‘이 녀석……. 항상 맹한 얼굴로 밥이나 잘 먹는 줄 알았더니.’

김석한의 생각보다 신유성은 제법 말주변이 있었다. 하지만 김석한은 기업가로서 수없이 자신을 증명한 철혈의 회장.

“그렇다면 이번 이야기는 자네들이 져 주는 게 맞겠군? 자네는 이미 내가 무엇을 부탁할지 알고 있지 않은가?”

김석한은 신유성의 기세에도 오히려 여유롭게 자신의 페이스로 이끌려고 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은아를 위해서라면 여러분들은 분명 목숨도 걸 수 있을 테니까요.”

마치, 자신이 한 발짝 물러서는 형국. 신유성은 올곧은 눈으로 담담하게 김석한을 바라보더니 어느 때보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습니다.”

“……왜지? 자네는 우리의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았나?”

설마 이제 와서 어린애처럼 억지를 쓸 거냐는 김석한의 물음. 신유성은 그런 김석한의 말에 정론으로 맞받아쳤다.

“비교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은아가 위험해진다면 목숨을 걸 수 있는 건, 저도 마찬가지기 때문입니다.”

신유성의 말에 김석한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목숨을 건다는 말을 참 쉽게 하는군? 아직 학생에 불과한 자네가 그 무게를 알고는 있는가?”

이건 김석한이 동요하고 있다는 증거. 신유성에겐 자신의 말에 김석한이 반응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은아의 할아버지께선 파티원과 가족들의 관계를 비교하는 걸 싫어하시는군.’

하지만 신유성은 그런 김석한의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점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은아의 가족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죠. 제가 목숨을 걸 수 있는 건, 소중한 동료를 잃는 것보다 무서운 건 없기 때문이고.”

철혈의 기업가인 김석한을 상대로 신유성은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부서지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 천천히 압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회장님께서도 저와 같은 마음이시지 않습니까?”

콕.

차분하지만 너무나도 강렬하게 신유성이 이야기의 방점을 찍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김석한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크허허……. 이 정도의 자리까지 오면 안목에 자신이 생기기 마련이거늘. 이번에는 내가 틀렸군.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

신성그룹의 회장인 자신을 상대로 밀리지 않는 패기. 상대를 분석하고 허점을 찌르는 날카로움. 신유성을 자신의 맞수로 인정한 김석한은 마주친 눈을 번뜩였다.

“상대를 설득하는 건 기술이다. 그것도 아주 정교한 기술이지. 하지만 너는 배운 적도 없는 기술을 어린 나이에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지. 멋진 재능이다. 솔직히 탐이 날 정도구나.”

그리고 그 기술은 김석한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리더의 재능.

“은아가 왜 너를 따르는지도 이해가 가는구나.”

김석한은 자신이 뱉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와 함께 흰 글자가 새겨진 검은색 종이를 내밀었다.

“내 명함이다. 네가 오늘 나에게 시간을 내준 정당한 대가지. 언젠가 내 도움이 필요하게 된다면 연락하여라. 나도 너를 위해 시간을 내주도록 할 테니.”

신유성은 그런 김석한의 명함을 받아들며 조금은 온화해진 김석한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아니, 감사할 것 없다. 나는 기본적으로 장사꾼이다. 너에게 보이는 호의적인 모습도 계산을 끝낸 결과지.”

하지만 그럼에도 차가운 척 굳이 나쁜 사람을 자처하는 김석한을 보며 신유성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은아가 너를 많이 따르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만. 은아는 나를 닮아 무뚝뚝한 아이다. 티를 내거나 잘 챙겨주진 않겠지만 자신의 편이라고 정한 소중한 사람은 끝까지 아끼는 아이다.”

어디서 느꼈나 했더니 김석한의 성격과 모습은 이미 본 적이 있었다. 그것도 꽤나 가까운 사람으로.

‘……많이 닮았어.’

“크흠…… 그러니 혹여 서운함이 드는 순간이 오더라도. 너무 노여워 말거라. 그게 그 아이의 진심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김석한은 이런 말을 하는 게 민망한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철혈이라 불리는 그가 가족은 끔찍이도 소중히 챙기는 걸 보며 신유성은 더욱 확신을 굳혔다.

‘……은아다. 회장님은 은아랑 닮았어.’

머리 한구석에 새하얗게 수 놓인 머리카락 말고도 닮은 곳이 있었다니 신유성은 진지한 김석한을 보며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걱정하시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그리고 은아는 걱정하시는 것과 달리 동료들에게 무척 다정하고 자상하니까요!”

신유성은 이야기가 좋게 흘러가 기쁜 얼굴로 웃어주고 있었지만 마주 앉은 김석한은 시원한 건지 찝찝한 건지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

“음, ……은아가 다정하고 자상하다고? 그건 참 잘 연상이 되질 않는군…….”

굳이 태클을 걸고 싶은 건 아니지만 김석한은 자신의 손녀와 다정다감이라는 단어가 잘 엮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신유성은 오히려 그런 김석한의 반응이 생경했다.

“그렇지만 은아는 은근히 물심양면으로 동료들을 챙겨주고, 세심하게 기념일도 챙겨주는걸요?”

최근 김은아의 행동이 어떠했는가? 온통 팀원들을, 특히 자신을 늘 상 챙겨주었다.

“예, 예를 들어?”

하지만 막상 꼽아보라는 김석한의 이야기에 신유성은 곰곰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음, 저는 알지도 못한 기념일에 은아가 직접 초콜릿을 만들어준 다거나…….”

“초, 초콜릿을 은아가 직접 만들었다고? 직접 사 온 게 아니라?”

대답 없이 싱글싱글 그저 웃는 신유성을 보며 김석한은 억지로 같이 웃어주며 다시 물었다.

“……그리고?”

“무도회에서 춤도 직접 하나하나 가르쳐 줬어요.”

“허허, 아, 그래?”

왜일까.

김석한은 신유성의 웃는 표정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은아가 춤을 가르쳐 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딸과 신유성이 손을 맞대고 합을 맞추는 모습이라니.

“가끔은 스미레가 식사를 준비하는 걸 도와주기도 하고요.”

‘스미레? 아, 그때 이수현 비서가 말했던 파티 멤버군.’

신유성의 파티에 유학 온 여학생이 있다는 이야기는 김석한도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걸리는 듯 신유성에게 찝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파티 멤버가 식사 준비를 해주다니 뭔가 특별한 날이었나 보군?”

“음? 보통 아침 식사는 매일…….”

그러나 당연하다는 듯 대답한 신유성의 이야기에 김석한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침마다 직접 여자애를 불러서 식사를 시킨다고?’

남녀가 유별하다는 고리타분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김석한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설마 우리 은아도 아침마다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니겠지?”

결국 혹시나 하는 마음에 김석한이 묻자 신유성은 당당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특별한 날은 보통 제가 찾아가는 편이에요.”

“아니! 으, 은아의 기숙사에 말인가?”

당황한 김석한이 무언가를 말하려 하자 신유성은 잠들어 있던 김은아를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은아는 아침잠이 많으니까요.”

소중한 누군가를 떠올리며 먼 곳을 바라보는 시선 처리. 도저히 사심이 있다곤 생각할 수 없는 순수한 웃음.

“크흠, 그건 그렇지……. 참 신기한 일이야. 은아는 그런 것마저도 나를 닮았다네.”

자신도 모르게 납득한 김석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유성은 맞장구를 쳤다.

“아, 저도 회장님과 은아가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가?”

“은아는 생각이 깊어지면 회장님처럼 이렇게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거든요.”

톡톡.

신유성이 김은아를 흉내 내며 테이블을 두드리자 김석한은 진심으로 웃고 말았다.

“하하! 맞지! 맞네! 용케 알아챘군! 하지만 난 일부러 말해주지 않는다네! 그걸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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