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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5화 (195/434)

제195화

언제부터일까.

뼛속까지 시리던 볼테르의 추위 속을 걸어 다녔을 때? 아니면 지독하게 맛없는 콩 통조림을 먹었을 때? 아니면 자신을 남겨두고 부모님이 떠났던 그때부터일까?

어느 순간부터 아델라에게 재밌는 일의 개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참 이상했다.

그렇게 좋아했던 곰 인형도 동화책도 모두 그대로인데. 왜 이리도 무감해진 것일까.

사랑했던 것은 사라지고.

좋아하는 것은 줄어드는 세상.

어쩌면 아델라가 전투에 매달린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몰랐다.

격렬한 긴장감 속에서 강한 상대와 전투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가슴이 뛴다고 느꼈으니까.

더 강한 사람과 더 강렬한 전투를 치르기 위해 계속 강해졌다.

그러나 아무리 전투를 거듭해도 아델라에겐 채워지지 않는 갈증만이 느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감정을 느끼기 위해서 계속 전투를 거듭하다니. 그건 이미 중독자의 삶.

이미 깨져버린 독에 물을 퍼부어도 결국 새어 나오고 마는 것처럼,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결코 충만해질 일은 없었다.

‘분명. 난 고장 나 있었던 건가.’

하지만.

부모님의 동상을 만나고.

루인 성을 나온 그 순간부터.

아델라는 작은 변화지만 명백하게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아! 맞다! 스미레! 나 어제 학원 도시에서 엄청 신기한 거 봤는데.”

“에이미 씨. 학교에 계신 게 아니었나요?”

전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던 타인의 이야기가 궁금하고.

“근데. 은아랑 유성이는 언제 들어오지?”

평소라면 무관심했을 이시우의 말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물론 더 정확히는 ‘신유성’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부분이 특히 신경 쓰였다.

하지만 아델라는 조금씩 다가오는 자신의 변화가 싫지 않았다.

이 변화는 7살에 얼어붙었던, 자신의 감정들이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구나.’

아델라는 기쁜지, 슬픈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힘들여 기억을 더듬지 않아도.

이제 그때 느꼈던 뼛속까지 시린 혹한의 냉기와 부모님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델라. 금방 돌아올게 알았지?]

이젠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누구보다 자신의 곁에 있고 싶었음에도 볼테라를 구하기 위해 떠난 용감한 사람이었고.

[딱, 3일만. 3일만 혼자서 기다리는 거야. 응?]

어머니는 누구보다 슬펐음에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억지로 웃어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라는 걸.

아델라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비치는 건 지옥 같았던 풍경이 아닌, 아늑한 저택이었다.

사이가 나쁜지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재미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에이미와 이시우가 보였고.

뭐가 그리 신기한지 테라스에서 화분을 구경하는 스미레가 보였다.

지금 아델라가 있는 곳은 볼테라의 지옥 같았던 겨울과 달리 너무나도 화목한 저택이었다.

‘내가 찾던 건, ……나에게 필요한 건 강한 상대가 아니었어.’

선발전에서 신유성과 함께 맞붙었던 가슴 뛰는 전투가 그립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란 건, 감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델라에게 신유성은 특별했다.

신유성은 7살에 멈춰버린 시계를 다시 돌려주었다. 자신의 곁을 지켜주었다.

‘난 역시 당신을…….’

아델라는 드디어 갈피를 잡은 듯 옅게 웃었다.

*     *      *

신성그룹의 대저택은 테라스조차 평범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식물원이 부럽지 않을 정도.

“이렇게 다양한 식물을 보는 건 처음이에요!”

스미레가 들뜬 얼굴로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뱉어내자. 라플라스의 못마땅한 목소리가 텔레파시를 통해 들려왔다.

- 이렇게 기쁜 얼굴이라니. 꽃에 직접 물을 주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더냐?

“그럼요! 제비꽃은 물론이고, 앵초와 나팔꽃까지. 전부 한 자리에 있는 걸요?”

- 그래. 네가 기쁘면 나도 그걸로 만족이구나.

라플라스는 스미레가 말하는 꽃의 종류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라플라스가 스미레를 향해 말을 걸어온 건 그런 시답잖은 주제 때문이 아니었다.

- 아이야. 탑에 입장하기 전에, 미리 말해두지만. 이번처럼 정신에 침범하는 페널티는 너에게 통하지 않는단다. 후훗, 어찌 보면 나와 계약한 덕분이라고 해야겠지.

라플라스가 말하는 ‘정신 침범’은 탑의 효과로 어려짐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유아퇴행을 말했다.

라플라스의 도움이 있다면 스미레는 페널티조차 무시할 수 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

“하지만 탑의 힘은 절대적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 물론 나라도 몸이 어려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한다. 어떤 존재도 탑의 법칙에 정면으로 거스를 순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라플라스는 숨을 고르곤 묘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덧붙였다.

- 예외는 있는 법이지. 나는 육체는 없지만 정신은 온전한 존재.

- 그러니 육체는 탑의 페널티를 벗어날 수 없지만. 정신에 대한 페널티는 ‘자아’가 있는 내가 상쇄할 수 있는 것이다.

- 그 페널티를 내가 대신 짊어지면 되는 일이거든. 생각해보면 간단한 이야기다.

라플라스의 자세한 설명에 스미레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탑의 페널티로 정신이 퇴화하게 된다면 그걸 라플라스가 대신 짊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군요. 그건 확실히…… 엄청난 도움이 되겠네요.”

도전자의 정신이 어려진다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스미레만큼은 17살의 기억을 유지하게 된다.

모두가 어린아이가 되어버리는 컨트롤 불가의 파티에 든든한 사령탑이 생기는 샘.

스미레는 오직 라플라스만이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항상 감사해요. 라플라스 님.”

- 새삼스럽게 그게 무슨 말이더냐. 너는 나의 편린을 가진 존재. 신경을 쓰는 게 당연하거늘.

라플라스의 다정한 목소리에 스미레는 대답 없이 웃었다.

“저, 가끔씩은 궁금해지곤 해요. 라플라스 님이 왜, 역병의 마녀로 불리셨는지.”

자신의 물음에도 라플라스가 대답이 없자. 스미레는 다급하게 손을 저었다.

“아! 라플라스 님을 탓하고 싶은 건 절대 아니에요! 그저……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스미레는 머쓱하게 웃더니 아까와 달리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라플라스 님과 제 동화율이 높았던 건……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에요.”

- ……예를 들어?

긴 침묵 끝에 라플라스가 입을 열자. 스미레는 묘한 미소와 함께 옅은 웃음을 지었다.

“저도 제 능력 때문에 누군가를 다치게 했지만……. 그건 제가 원했던 결과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라플라스 님도 실은 오해가 있지 않을까 하고…….”

- 아니, 그런 일은 없다. ……난 나의 의지로 역병을 퍼트렸다.

단호하지만 쓸쓸한 라플라스의 목소리.

-그러니 다시 그 순간이 오더라도. 분명 같은 선택을 할 생각이란다.

스미레는 무릎 위에 손을 모은 채 한동안 화분의 꽃을 바라보더니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라플라스 님은 달맞이꽃의 꽃말을 알고 계세요?”

항상 보호해줘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스미레의 변화는 놀라웠다.

이제는 자신이 직접 성큼성큼 라플라스의 곁으로 다가와 벽을 허물어 버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라플라스는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설령 원본의 조각일지언정, 그녀는 긍지 높은 마녀였다.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아이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차분하고도 상냥한 스미레의 목소리는 조금씩 조금씩.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이래요.”

그녀의 벽을 부숴버리고 있었다.

“라플라스님이 말씀해주시지 않아도. 저는 괜찮아요. 제 곁에 있어주시는 것만으로 기쁘니까요. 계속 기다릴 수 있어요.”

- 편린의 힘이 다하면. 나는 언젠가 사라질 존재다. 짧으면 1년, 길어도 3년을 버티지 못하겠지.

라플라스는 자신의 소멸을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어쩌면 당연했다. 그녀는 그저 라플라스가 남긴 기억의 조각. 애당초 주어진 삶이 없었기에 미련도 없었다.

하지만.

- 아이야. 더 이상 나에게 정을 주지 말거라.

계속 스미레가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다면.

- 이건 너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란다.

더 이상 가까워진다면.

- 네 따뜻함 때문에… 내가 너를 떠나 사라지는 날이 너무 슬퍼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라플라스는 언젠가 자신이 슬퍼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라플라스 님…….”

스미레는 라플라스의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스미레는 손등으로 눈가를 비비더니.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전 그 편이 더 좋아요! ……그때는 꼭, 펑펑 울어주셔야 해요?”

*     *      *

사아아아! 

기다리고 기다렸던 탑의 10층에 도전하는 결전의 날.

“아젠다에서 만든 헌터 용품은 신품이나 중고 가리지 않고 전량 매입합니다! 포켓으로 연락 주세요!”

“……그러니까. 자꾸 공략에 실패하는 거야.”

“그래. 원래 남 탓하는 건 쉽지! 넌 뭘 잘했는데!?”

역시 광장이나 다름없는 탑의 1층은 시끌벅적한 인산인해를 이룬 상태였다.

이미 9층까지 공략했던 김은아와 스미레와 에이미 우당탕탕 멤버 3인은 자연스럽게 데스크를 향해갔다.

스윽.

김은아는 워프석에 손을 얹더니 전문가처럼 의기양양하게 표현했다.

“여기 처음 오는 사람 없지? 혹시 모르면 물어봐. 참고로 이건 워프석이인데 포탈 비슷한 거라고~ 보면 돼.”

“흐응~ 우리 은아. 아주 전문가가 다 됐네?”

에이미가 뿌듯하다는 얼굴로 눈썹을 씰룩거리자. 김은아는 에이미의 아부에 은근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럼 설명도 끝났으니. 유성아?”

김은아가 파티장인 신유성에게 턴을 넘기자. 신유성은 천천히 워프석을 향해 손을 두었다.

“다들 명심해줘. 탑에 들어가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의 목표는 같다는 걸.”

진지한 목소리로 신유성이 이야기를 끝내자. 워프석을 향해 하나 둘 모두의 손이 얹어졌다.

사아아!

[10층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러자 곧 워프석 위로 푸른색 홀로그램이 비쳤다. 신유성은 워프석을 둘러싼 파티원 모두를 둘러보더니 이내 결단을 내렸다.

“이동하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워프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색의 빛무리는 파티원 전체를 삼켜버렸다.

*     *      *

알록달록한 블럭들로 만들어진 방.

주변의 모든 기물들이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작은 곰인형은 진지한 얼굴로 장난감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또 겁 없는 녀석들이 들어왔군.”

말을 하는 곰인형이라니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제법 우스운 모습이었다. 물론 실제로 토이킹의 위험도는 2급에서 3급으로. 현역 헌터들에게 어려운 보스는 아니었다.

인간으로 치면 10대 수준의 지능과 기껏해야 장난감에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이 전부였으니까.

그러나 도전자 전원이 ‘7살이 된다.’는 무시무시한 페널티가 있는 이곳 토이 왕국에선 이야기가 달랐다.

“어디 그럼…….”

토이킹은 노련하게 하나씩 사냥감들을 살폈다.

보라색 머리와 까칠해 보이는 꼬마가 동굴에 2명.

남자인데 예쁜 꼬마와 얼이 나간 은발 머리가 장난감 왕국에 2명.

그리고 인생 다 산 표정의 꼬마와 지나치게 활발해 보이는 꼬마가 디저트 숲에 2명.

토이킹은 곰돌이 인형에 딱 맞는 망토를 두르며 조용히 읊조렸다.

“사냥을 시작해 보자고.”

그리곤 토이킹은 끝이 보이지 않게 사열한 장난감 병사들을 향해 당당히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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