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0화
책상에 놓인 푸른색 수정구슬.
그곳에 비친 건 다름 아닌 손을 잡고 있는 신유성과 아델라의 모습이었다. 신유성과 아델라 일행의 마녀 아리스는 수정구슬을 바라보며 웃었다.
‘좋을 때긴 하지.’
마치 자신의 자식을 보는 듯 흐뭇함이 감도는 미소. 아리스는 어느새 시선을 아덴에게 옮기며 물었다.
“아덴. 손녀의 미소를 본 기분이 어때?”
그러나 아덴은 아리스의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조용히 감정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그렇게 반응하니. 나만 당황스럽잖아. 나이가 들더니 눈물만 많아져선…….”
조용히 다가와 그런 아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리스. 겉으로 보기엔 아버지와 딸처럼 보이지만 아덴과 아리스는 어디까지나 친구였다.
“주책을 보였군 아리스. 분명 늘어버린 나이 탓일 테지……. 그래도 12년, 딱 12년만일세. 저 아이의 미소를 보는 것이…….”
아덴의 진솔한 이야기에 아리스는 더 이상 장난스럽게 굴 수 없었다.
“……아덴. 예전에는 말이지. 참, 신기하게 생각했어. 마냥 바람둥이 같던 네가 반려를 만나 가족을 만들었다는 게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았거든.”
아리스는 주름이 진 아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료들 중 누구보다 행복했던 아덴이었기에 그가 맞이한 슬픔은 더욱 컸다.
“하지만 네가 가족들과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금방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을 바꿨지. 세상을 구한 너라면 응당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니까.”
아리스는 조용해진 아덴을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더 이상, 가족을 구하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마.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신이 있다면 그자가 너무 잔인했을 뿐이지. 넌 언제나 최선을 다 했어.”
조곤조곤 말을 읊조린 아리스는 자신의 옛 동료에게 마지막으로 진심을 담아 말을 덧붙였다.
“이제 그만 널 용서해줘.”
아리스의 이야기가 끝났지만 아덴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저 아무 것도 비추지 않는 수정 구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라보아도 수정구슬은 원하는 풍경을 비춰주지 않았다. 이미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수 없듯이 수정구슬은 과거를 비출 수 없었다.
“지옥 같은 시간이었지……. 깨어 있는 온종일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네. 내가 있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테니까.”
아덴은 커다란 손바닥으로 수정 구슬을 가렸다.
“내가 그토록 아델라의 미소를 보고 싶었던 건, 그 아이를 위해서가 아닌……. 스스로 구원 받기 위함일지도 모르겠군.”
그리곤 아덴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흘렸다.
“넌 안 어울리게 생각이 너무 많아서 문제야. 그렇게 예쁜 손녀가 있는데. 웃는 모습이 보고 싶을 수도 있지. 안 그러니?”
하지만 다시금 장난스럽게 구는 아리스의 모습에 아덴은 자신의 턱을 만지며 장난스럽게 맞받아쳤다.
“참으로 미스테리하단 말이지. 이렇게 예쁘고 착한 아리스를 차버리다니. 정말이지…… 유원학 녀석의 속을 모르겠어.”
아덴의 이야기를 들은 아리스는 가까스로 체통을 지켰다. 하지만 입가가 삐죽거리는 걸 보니 보통 화가 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머~ 누가 차였다는 걸까? 그 뇌까지 근육이 들어찬 녀석은 난 트럭에 한가득 채워서 줘도 안 받을 건데?”
“유원학이 가득한 트럭이라니. 그건 상상만으로 무섭군……. 그런 트럭이라면 탑의 정상을 공략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겠어.”
아덴은 농담을 일부러 심각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좀처럼 볼 수 없는 그의 장난에도 아리스는 아직 ‘차였다.’라는 단어에 꽂혀 있었다.
“오해가 있는 거 같아서. 다시 정정하는데. 난 그 녀석한테 고백한 적도 없고. 차인 적도 없어.”
“하하! 말이 그렇단 이야기일세. 자네가 고백하는 모습을 언젠가 본거 같아서 말이지.”
아리스의 역린을 건드린 아덴.
아리스는 웃으며 아덴의 목에 지팡이를 겨눴다.
“내 기억에 그런 일은 없었어. 절대로.”
“그, 그렇군. 어, 없었던 거 같네.”
하지만 단호했던 말과 달리 아리스는 갑자기 떠오른 과거의 기억에 침음을 흘리고 있었다.
[유원학. 오늘 시간 있어?]
[아니. 오늘은 산행수련이다.]
[그, 그래…… 그럼 됐고.]
생각해보면 20대 때도.
[……일주일 만에 공략이 끝났네. 오늘은 같이 돌아갈까? 일본 쪽은 내가 정해둔 숙소가 있어.]
[아니. 오늘은 산행수련이다.]
30대 때도.
유원학은 지나치게 목석같은 남자였다.
‘물론 그 덕분인지, 나중에는 손가락으로 바위를 부수질 않나. 괴물로 변해버렸지만…….’
아리스는 유원학이 소식도 없이 갑자기 산속으로 틀어박혔을 때 진심으로 상심했다.
‘유원학 밑에서 그런 멀쩡한 제자가 만들어진 게 신기하다니까…….’
물론 수정구슬로 본 아델라와 신유성의 데이트를 보니. 어딘가 닮은 구석은 있었다.
‘뭐, 그래도…… 여자 맘을 모르는 건 스승이나 제자나 똑같긴 하네.’
물론 그런 남자에게 반해버린 것도 아리스와 로렐라이의 사제지간에 공통점이었다.
* * *
밖은 평범한 학교지만 안은 대리석이 깔리고 클래식이 흐르는 너무나도 호화로운 부실.
~♪ ~♬
하지만 평화로웠던 부실은 신유성의 복귀와 함께 평소와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흐, 흐익……. 분명 날 빙수로 만들 거야…….”
누군가를 보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에이미.
“……이건 또 뭐야.”
누군가를 보며 못 마땅한 얼굴의 김은아.
“아, 안녕하세요……. 혹시 식사를 못 하셨으면 점심에 만든 카레라도…….”
누군가를 보며 아까해둔 밥을 내어주려는 스미레. 3명의 시선 끝에는 파티장인 신유성과 부실에는 어울리지 않는 뉴페이스가 앉아있었다.
“괜찮습니다.”
아델라 오르텐시아.
가온의 이전 학년 랭킹 1위이자. 현재는 이탈리아의 비앙카 아카데미에 대표를 맡게 된 1학년의 대표.
자신이 아델라의 라이벌이라고 박박 우겼던 김은아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얼굴이었다.
“아델라 네가 여긴 웬일이야? 그것도…… 유성이랑 같이?”
파지직.
김은아의 눈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드래곤을 공략하러 갔던 신유성이 예정일보다 한참 늦게 돌아오고, 이젠 옆에 아델라까지 끼워져 있는 상황. 김은아는 한 가지 가능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설마…… 너, 너희 계속 같이 있던 건…….”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이곳에 온 건, 이 아티팩트 때문입니다.”
톡. 사아아!
아델라가 포켓을 건드리자. 푸른색의 입자가 모여 무릎 위에 붉은 색 알이 생겨났다. 마치 거대한 파충류의 알과 같은 신기한 생김새에 스미레는 탄성을 터트렸다.
“이건, 혹시?”
“사도닉스를 공략하고 얻은 아티팩트야. 아마 드래곤의 알이겠지.”
학생이 드래곤의 알을 보상으로 받아오다니. 너무나도 충격적인 이야기를 신유성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알을 지키기 위해선 아델라의 냉기가 필요했어.”
“그래? 그건 고맙지만. ……흐음, 이게 드래곤의 알이구나…….”
김은아는 신기하다는 얼굴로 알을 콕콕 찔러보더니 이내 팟! 하고 정신을 차렸다.
“그럼 유성이랑 계속 같이 있었다는 거잖아! 그리고 스킬만 사용했으면 부실에 같이 올 필요도 없고!”
직접 상대해본 김은아는 아델라의 냉기가 얼마나 지속되는지 알았다.
아델라가 마음만 먹는다면 적어도 한달. 한번 스킬을 사용해서 냉기를 부여했다면 적어도 부실에 같이 올 필요는 없었다.
“대체 너 무슨 속셈인데!”
생각보다 김은아의 지적은 날카로웠다. 실제로 알을 보호한다고 말했지만 아델라에게 그건 명목일 뿐, 실상은 신유성과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은 기분 때문이었다.
“그건…….”
하지만 상황이 불리하게 흐르자 아델라는 시선을 피해 김은아를 무시해버렸다. 그리곤 말없이 볼을 붉히는 아델라.
“볼은 왜 붉혀!
그런 아델라의 반응에 김은아는 털을 곤두세운 고양이처럼 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 그리고 탑의 10층은 인원수 제한이 있으니. 아델라와 함께 깨기로 했어.”
하지만 이런 부분에선 눈치가 없는 신유성은 김은아의 반응에 더욱 기름을 붓고 있었다.
“뭔가, 뭔가 이상해. 잘못 되고 있어…….”
마음을 엄습하는 불길한 직감에 김은아는 찜찜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희. ……설마 같은 숙소는 아니었지?”
가늘어진 눈하며 팔짱을 낀 자세하며 어딘가 무서운 김은아의 태도에도 아델라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글쎄요?”
전 가온의 1위와 2위가 긴장감 넘치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와중에 신유성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숙소는 달랐어. 숙소를 같이 쓴 건 스미레뿐이니까.”
신유성의 충격 발언에 스미레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 맞다! 물을 올려둔 걸, 잊었어요오오…….”
어색한 말과 함께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다.
“가긴 어딜 가!”
하지만 김은아는 그런 스미레를 재빨리 낚아챘다.
“넌 나중이야!”
김은아의 손에 잡혀 얌전히 옆에 앉은 스미레. 한편 소파 구석에 틀어박힌 에이미는 아델라의 등장에 트라우마 스위치가 켜진 상태였다.
“아델라……. 얼음은 차가워. 흐으흐흐, 빙수가 되긴 싫어…….”
에이미에겐 아델라와의 대련 2초 만에 꽁꽁 얼어붙은 기억이 뇌리에 강력하게 새겨져 있었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상황. 김은아는 나름 정리를 시작했다.
“일단. 유성이는 레이드에서 알을 얻었고, 아델라는 알을 지키기 위해 냉기를 부여해줬다는 거지?”
끄덕끄덕.
신유성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김은아는 가늘어진 눈으로 말을 덧 붙였다.
“친해진 김에 겸사겸사 탑도 같이 가는 거고?”
“응. 그렇지.”
신유성의 흔쾌한 대답에 김은아는 스미레를 흘겨보았다. 둘의 성격상 무슨 일이 벌어졌으리라고 의심하진 않지만 뭔가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들이. 나만 빼고.’
물론 일본에서 보냈던 시간을 합치면 스미레의 데이트 횟수는 2번을 넘는 상황.
‘……오, 오늘의 은아 씨 무서워.’
스미레는 김은아가 이 사실을 모르는 걸 다행으로 여겼다.
스미레는 신유성이 빈자리로 점점 난폭해지는 김은아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본 산증인. 무서워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부실에 닥친 충격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지이잉.
갑자기 부실의 자동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한 건.
“다들 오, 오랜만이야.”
왜인지 얼굴까지 붉히며 부끄러워하는 얼굴의 이시우와.
“한국에서 보는 건 처음이네?”
그런 이시우에게 착 달라붙어 팔짱을 낀 사쿠라였다. 이젠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김은아는 짧게 중얼거렸다.
“개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