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6화 (186/434)

제186화

어머니인 김윤하의 강력한 추천으로. 김은아는 중학생 때부터 꾸준한 필라테스로 자기관리를 해왔다.

거기다 요가까지 겸한 김은아에겐 남들에겐 고난도 스트레칭조차 너무나 익숙한 운동이었다.

“헉, 헉. 은아야. 난 그만할래. 이러다 나 쥬거…….”

하지만 통나무 같은 유연성을 가진 에이미에게 이런 운동은 고문과도 같은 일. 덕분에 유산소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에이미는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이제 30분인데 뭘 그만해?”

“이 정도면 운동은 됐어. 난, 난 부실로 돌아갈래……. 달달한 마실 것도 먹고 싶어……. 스미레가 만들어주는 과일우유 같은 거!”

얼마나 힘든지 얼굴까지 붉어진 에이미가 투정을 부렸지만 김은아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신오가문한테 복수도 해주고……. 탑도 9층까지 깨고……. 다 끝냈는데 대체 왜 안 오는데!?’

그럴 만도 한 게 김은아는 이미 신유성의 메시지에 꽂혀 있었다.

[신유성:모두 미안. 조금 더 이탈리아에 머물러야 할 거 같아.]

신유성이 사도닉스 공략을 해낸 소식은 이미 가온은 물론 한국 전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니 김은아는 당장 내일이라도 신유성이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신유성은 아직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았다.

‘이탈리아가 ……그렇게 재밌나.’

김은아는 못마땅했다.

자신은 하루를 꼬박 신유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신유성은 공략을 끝냈음에도 좀 더 이탈리아에 머무르겠다니.

‘파티원들이 보고 싶지도 않나.’

김은아는 여러 가지로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은 엄청 보고 싶은데.’

쫘악-

김은아는 유연하게 한쪽 다리를 올리더니 팔을 뒤로 보내 원통처럼 만들어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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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괜찮은 척하지만 못마땅함이 담긴 김은아의 표정.

‘진짜 오기만 해라.’

며칠이나 신유성을 못 본 김은아는 잔뜩 삐져 있었다.

*     *      *

볼테라의 한 카페.

아덴은 나무 의자에 앉아 홍차를 마시며 씁쓸하게 웃었다.

‘……너무 늦은 것인가. 너무 빠른 것인가.’

겨울의 마녀 루이스.

볼테라의 재앙이었던 그녀는 사라졌지만 루인 성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협회의 입장에선 없애지 않은 게 이상한 일이었다. 루인 성은 볼테라와 협회에게 치욕의 상징. 던전에 불과한 성을 없애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지만 루인 성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고, 아덴은 그 이유를 아델라에게 숨겨왔다.

시간이 지나면 잊을 것이라고.

어린 시절의 상처도 점차 회복될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건 나의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내가 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설령 상처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 아이에게 숨겨선 안 될 일이지.’

하지만 아덴에게는 절대로 꺾지 않을 마지막 고집이 있었다.

아델라가 맞이할 어느 순간에서.

아덴은 아델라가 혼자 있지 않길 바랐다. 볼테라의 겨울을 홀로 거닐던 그 순간처럼 아델라가 외롭게 있는 모습은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그건 아덴의 찢어진 마음을 두 번 헤집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아이가 있다.’

아덴이 본 누구보다도 상냥하고. 올곧은 마음을 가진 헌터. 아델라가 유일하게 인정한 헌터. 그렇기에 아덴은 아델라의 곁에 신유성을 두고 싶었다.

[방법을 알려 줄 테니. 나도 신유성 학생에게 부탁이 있다네.]

[탑의 10층을 클리어 할 때, 아델라도 함께 데려가 줄 수 있겠는가?]

[알에 냉기를 불어넣고, 루인 성이란 곳에서 냉매를 구하려면 아델라의 힘이 필요할 테니. 무리한 부탁은 아닐 걸세.]

아델라의 특성과 탑까지 들먹이며 신유성을 아델라에게 붙여두려고 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부디 그 아이가 더 이상. 상처받지 말기를.’

이건 전설의 헌터가 아닌.

‘……부디. 힘들었던 시간만큼 더욱 행복해지기를.’

무능했던 할아버지로서의 소원.

아덴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머나먼 창가의 풍경을 씁쓸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      *

“일반인은 입장불가 지역이지만. 이곳은 루이스 공략에 참여한 헌터들의 유가족과 일부 관리자에게는 입장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짧은 설명을 끝낸 관계자는 아델라가 입장할 수 있는 이유가 ‘오르텐시아’의 성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델라는 물을 먹은 솜처럼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 걸음.

두 걸음.

바닥에서 발을 떼어낼 때마다 정체 모를 늪이 자신의 발을 조금씩 삼키는 기분이었다.

“아델라. 곧 나올 거야.”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신유성의 목소리. 아델라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창백해진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전해야 할 사람은 내 쪽인걸?”

신유성은 아델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델라는 혹여나 알의 열기가 강해질까, 드래곤의 알을 껴안은 채로 냉기를 부여하고 있었다.

쉽게 보이지만 마나와 정신력이 소모되는 작업. 그런데도 아델라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 정도는 저에게 간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에겐 탑의 10층을 공략할 때 도움을 받기로 했으니까요.”

저벅. 저벅.

얼마나 걸었을까.

볼테라의 깊은 숲속.

초목의 생명이 가득한 이 땅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풍경이 보였다.

얼어붙은 호수.

그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얼음성.

비현실적으로 새하얀 풍경 속에서 아델라는 신음을 흘렸다.

“정말…….”

드래곤의 알을 껴안고 있던 아델라는 자신도 모르게 팔에 힘을 주었다. 알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아델라가 몸을 움찔거리자. 신유성은 아델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들어갈 수 있겠어?”

어딘가 의미심장한 신유성의 물음.

아델라는 여전히 얼음성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당신. 알고 있군요?”

“조금은.”

이탈리아의 볼테라.

5살이었던 아델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루이스가 만들어낸 이 얼음성이 아델라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덴 님에게 들었거든.”

신유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델라. 내 질문은 배려가 아니야. 난 네 선택을 직접 듣고 싶었어.”

이런 풍경을 마주하게 했으면서 이제 와서 선택을 하라니. 너무나 신유성다운 이야기에 아델라는 옅게 웃었다.

“……그렇군요.”

그리곤 아델라는 껴안고 있던 알을 포켓에 넣었다.

“전, 들어가겠습니다.”

저벅저벅.

약간의 심호흡과 함께 천천히 얼음성을 향해 나아가는 아델라.

끼이이익.

거대한 문이 열리고 얼음성에서 푸른빛이 쏟아졌다. 겉으로는 세공품처럼 아름다웠던 얼음성의 실체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메두사의 얼굴을 보고 석상이 되어버린 용사들처럼. 루이스의 냉기에 얼어 붙어버린 헌터들의 동상이 아델라의 눈에 보였다.

“……이건.”

동상 앞에는 이젠 얼어붙은 꽃이 놓여 있었고.

[벨리탄 안젤론]

[나의 자랑스러운 선배. 볼테라의 별이 된 나의 영웅.]

볼테라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용기를 잊지 않은 자들의 추모가 새겨져 있었다.

쿵.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

아델라의 발이 멈춰버렸다.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지만 아델라는 뿌리를 내린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델라의 머릿속에선 하나씩 의문이 해결되어가고 있었다.

볼테라에겐 치욕의 상징인 이 얼음성이 왜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을까?

그건 잊지 않기 위해서였다.

볼테라를 해방하기 위한 그들의 희생과 피해를 반복할 순 없으니까.

협회가 이 얼음성을 철거하지 않은 건, 그들의 정신을 기억하고 이어가겠다는 추모의 의미.

그렇다면 아덴은.

자신의 할아버지는 왜 루인 성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는가?

아델라는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직감했고. 몸이 얼어붙었다. 더는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 아델라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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