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4화 (184/434)

제184화

울트라는 전투를 위해 슈트까지 입으며 만반의 준비를 했었다.

‘……호오. 사도닉스가 한국의 학생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전투는커녕 서로를 껴안고 있는 신유성과 사도닉스의 모습. 2명의 7급 헌터가 리타이어 되며 절망적이었던 사도닉스 레이드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건 좋은 징조군.’

공략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는 건 울트라만이 아니었다.

‘……시간만 끌어도 이득이다!’

쇼이치는 검을 집어넣으며 뒤로 물러났다. 사도닉스 공략을 위해 죽음까지 불사할 생각이었지만 아무런 희생 없이 시간을 끌 수 있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건?’

아델라는 혹여나 사도닉스가 신유성을 공격하지 않을까, 긴장하고 있었지만 엘리자는 그런 아델라의 어깨를 잡으며 명령했다.

“아델라. 일단 물러나세요.”

지금은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지만 감정이 격해진 사도닉스가 뿜어내는 흉흉한 마나는 6급 헌터들도 피부가 따끔 거릴 정도였다.

‘……마나만으로 열기가 전달될 정도라니. 7급은 이정도란 말인가?’

엘리자는 아델라를 붙잡고 긴장한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

이번 사도닉스 공략의 핵심은.

압록강의 수호신. 운사(雲師)

세계수의 잎을 먹고 자란 사슴 중 하나 두라스로르(Duraþrór)

‘로쟈님이 없는 이상, 사도닉스가 브레스라도 뿜어내면 최악의 경우에는 전멸까지 각오해야한다.’

그러니 무슨 상황인지는 몰라도 엘리자는 지금은 신유성에게 기회를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타루……. 직접, 직접 날 찾아 온 거야?”

사도닉스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입에서 불을 뿜어내는 대신 달콤한 목소리로 신유성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나에게 그런 기억은 없어.’

신유성에겐 타루의 기억이 없었다. 정말 사도닉스의 바람처럼 신유성이 시공을 초월한 타루의 환생인지도 알 수 없었다. 무엇도 증명할 수 없는 지금. 신유성과 타루는 그저 닮은 사람일뿐.

- 오직 당신만이 사도닉스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크루페오스는 신유성에게 타루의 대역을 강요하고 있었다.

- 사도닉스. 그녀가 눈을 뜬 이상. 화신인 저의 목소리는 이제 곧 사라질 것입니다.

- 그러니 마지막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녀를 구해주세요

신유성에게 주어진, 선택의 갈림길.

이번 공략의 열쇠는 리타이어한 7급 헌터들도, 멘토를 자처한 6급 헌터들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신유성이 쥐고 있었다.

심각해진 신유성의 표정에 사도닉스가 되물었다.

“……타루?”

그녀는 고결한 드래곤이 아닌, 한 사람의 파트너로서 오직 신유성의 대답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응.”

잠깐의 고민 끝에 꺼낸 신유성의 짧은 대답. 신유성은 생각했다.

길었던 드래곤의 수명 동안, 특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신유성은 크루페오스의 회상을 통해 사도닉스가 지냈던 레피나의 삶을 지켜보았다.

타루의 삶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레피나의 삶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사도닉스가 아닌, 레피나가 어떤 대답을 기다렸을지 정도는 유추할 수 있었다.

“……레피나.”

오직 사도닉스의 유희 시절을 지켜본 사람만 알고 있는 이름.

기쁨과 슬픔.

멍해졌던 사도닉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화아악!

사도닉스의 주변으로 마나가 뿜어져나가며 그녀의 심상이 구현됐다. 주변은 숲으로 변했고, 유희를 지냈던 레피나의 모습으로 변한 사도닉스. 이 심상의 세계에는 신유성과 사도닉스를 제외한 누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기다 계절은 나무에서 꽃이 떨어지는 봄. 그건 타루가 가장 좋아했던 계절이었다.

“타루. 타루…….”

타루에 관한 것이라면 사도닉스는 사소한 것조차 잊지 않았다는 증거. 생기가 넘치는 봄의 숲에서 사도닉스는 울부짖듯 소리쳤다.

“……미안, 늦었지? 나, 그대로 계속, 계속…… 찾았어. 우린 약속했으니까.”

어떤 시간. 어떤 공간. 어떤 모습이더라도 꼭 찾아내겠다는 가혹한 맹약을 지키기 위해 사도닉스는 혼자서 싸워왔다.

신유성은 생각했다.

사도닉스가 그토록 타루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보고 싶었어. 무척.”

“응. 나도. 나도 정말. 정말…….”

사도닉스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존엄한 드래곤도 이런 부분에선 결국 인간과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결국 인간처럼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외로움을 탄다.

치유 받지도 위로 받지도 못한 채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홀로이 버티며 살아간다.

신유성은 생각했다.

어쩌면 타루는 사도닉스에겐 득보단 독이 된 존재가 아닐까?

타루가 느끼게 해줬던 따뜻함은 추위를 몰랐던 사도닉스를 영원한 겨울 속에 떨게 만든 게 아닐까?

‘……바보 같은 생각이었군.’

하지만 신유성은 자신의 생각을 금방 접어버렸다.

[……어떠냐, 날 따라 오겠느냐?]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던 날. 신유성은 스승님이 뻗어준 따뜻한 손을 기억했다.

사도닉스와 과정이나 결과가 다를지언정, 자신도 이미 겪었던 일이었다. 추위 속에서 건네진 따뜻함을 잊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모래사장 속 바늘과 같았던 희박한 확률 속에서 상대를 찾았던 사도닉스의 이유는 결국 거창한 게 아닐 것이다.

“레피나. 포기하지 않아줘서. 약속을 지켜줘서. ……고마워.”

크루페오스의 말이 맞았다.

설령 타루가 아니더라도. 신유성은 사도닉스를 구원 할 수 있었다. 상대는 재앙이라 불리는 7급 보스가 아닌, 영원의 시간 동안 첫사랑을 찾아다닌 가여운 소녀였으니까.

“……타루.”

사도닉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더니 신유성에게 입을 맞췄다.

사도닉스의 감정에 따라 쏟아지는 밝은 햇살. 아름답게 휘날리는 꽃잎.

사도닉스는 마주 본 신유성을 향해 빙긋 웃어주었다.

“환생을 하면서 전부 잊은 거야? 괜찮아. 타루가 잊더라도. 내가 전부 기억하고 있으니까.”

사도닉스가 만든 심상의 세계에서 시간이란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곳에선 현실의 영원이 찰나가 될 수 있었고, 심상의 영원이 현실의 찰나가 될 수 있었다.

*     *      *

사도닉스의 심상 속에서 하루. 이틀. 약 일주일의 시간이 지났을 때, 산들바람이 부는 잔디 위에서 신유성은 크루페오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시군요.

그와 동시에. 사도닉스는 신유성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고마워. 타루.”

부드러우면서도 진지한 목소리.

“너는 참 상냥하구나.”

16594425782783.jpg 

사도닉스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의미심장한 말을 하더니 신유성에게 입을 맞추고 부드럽게 숨을 불어 넣었다.

‘……이건.’

그건 사도닉스의 마나이자.

생명이었고.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사도닉스의 편린-(사도닉스의 조각)을 얻으셨습니다.]

[크루페오스의 언약이 이루어졌습니다. 편린의 잠금이 해제됩니다.]

[화신 이그니스의 조각을 제외한 모든 편린을 얻으셨습니다.]

[사도닉스의 편린에 담긴 힘에 비례해 마나가 증가하고 신체 능력이 강화됩니다.]

‘……모든 편린을?’

사도닉스는 화신의 주인.

그녀의 조각이라면 자신이 모든 편린을 흡수하게 되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하지만 왜 지금일까?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신유성은 사도닉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었구나.”

“응.”

사도닉스는 그런 신유성을 보며 싱긋 웃었다.

“기억을 잃었어도. 날 위로해줄 수 있다니. 역시 타루는 상냥하구나.”

들판 위에서 부는 바람에 사도닉스의 몸이 흔들렸다.

“……난 알 수 있어. 이곳에 소환된 건, 내 욕심 때문이었나 봐.”

사도닉스는 타루를 찾아내겠다는 목표를 이루었고. 운명으로 연결된 맹약도 지켜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도닉스는 이 세계와 자신의 연결점이 사라진 걸 느끼게 됐다.

“내 마나라면. 억지를 부려서 1년 정도는 버티겠지만…….”

사도닉스는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상냥한 너에게 내 힘을 맡기고 싶었어. 아, 물론 이그니스의 조각은 되찾지 못했지만 말이야…….”

아마 그건 리벨리온 때문이겠지.

신유성은 담담한 얼굴로 사도닉스를 바라봤다.

“사도닉스. 넌 언약을 맺은 걸. 후회하지 않아?”

갑작스런 신유성의 질문에 사도닉스는 바보 같다는 얼굴로 싱긋 웃었다.

“응. 절대로…….”

환한 빛 속에서 손끝부터 천천히 입자로 변해 흩어지는 사도닉스의 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단언하며 미소를 짓는 사도닉스. 그 모습에 신유성이 같이 웃어주자. 신유성의 손등에 붉은 빛이 스며들었다.

‘……그렇군.’

이것도 스승님이 말했던 강한 헌터의 길일까? 헌터들의 공략일까?

제 각기 사람들의 목표가 다르듯.

어쩌면 정답은 없을지도 몰랐다.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이 남는지. ……인가.’

타루가 사도닉스에게 남긴 것.

사도닉스가 신유성에게 남긴 것.

그리고 스승인 권왕이 신유성에게 남긴 것. 이시우. 스미레. 김은아. 에이미. 자신의 소중한 파티원들에게 준 것과, 받은 것.

사아아아-

기분 좋은 바람의 느낌에 신유성은 고개를 들었다. 사도닉스가 없어진 세계는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건 떠난 자에겐 끝이었지만 남겨진 자들에겐 새로운 시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