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182화 (182/434)

제182화

머리로 분류되는 최강의 화신.

이그니스의 능력은 한 가지로 축약 할 수 있다.

[사도닉스의 꺼지지 않는 불꽃]

이그니스의 공략이 어려운 이유는 원본인 사도닉스에 버금가는 브레스를 사용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화르르륵!

이그니스에게서 내뿜어진 불이 던전의 모든 필드를 불태웠다.

헌터들의 마나배리어도 통하지 않는 드래곤의 브레스.

하지만 로쟈는 화염 브레스의 대처법을 이미 준비해두었다.

‘……귀하신 몸을 데려오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로쟈는 씨익- 웃으며 양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즈즈저저적!!

푸른색 마법진이 빛을 내며 억지로 공간을 찢어버리자. 마법진에선 항공기가 이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즈으으윽!

거창한 마법진에서 기어 나온 건 흰색의 구렁이. 그러나 무려 길이가 이그니스에 버금가는 크기였다.

“쇄액, 쇄애애액!”

흰색 구렁이의 정체는 운사(雲師).

압록강 지역에서 머물고 있던 비를 관장하는 수호신격 정령이었다.

하급 정령들과 달리 계약의 난이도가 높기에. 드루이드라 불리는 로쟈도 1달에 가까운 시간을 압록강 유역을 걸어 다니며 친밀도를 쌓았다.

물론 계약 단계가 어렵지.

힘을 사용하는 법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운사가 소환에 응한 순간 그 힘은 계약자인 로쟈의 것이기도 했다.

“가자 운사! 동굴 도마뱀 놈에게 진짜 폭우를 보여주자!”

우르릉. 쿠르르릉.

여긴 던전의 안.

하지만 천장에선 번개를 품은 먹구름의 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던전의 천장이 무너졌다. 천장에서 쏟아진 돌은 이그니스를 맞췄고, 이윽고 뻥 뚫린 천장을 통해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쏴아아아아-!

마치 던전을 물세례로 잠식 시킬 듯 쏟아지는 엄청난 양의 폭우.

수호신인 운사의 힘은 물을 만들어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카스텔라나 동굴 주변의 기후를 바꾸어버렸다.

화르르륵!

이그니스는 물을 증발시키기 위해 다시 불을 뿜어냈지만 그건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지금 내리는 건 운사의 신력이 담긴 비. 단순히 온도와 마나로 증발시킬 수 있는 물이 아니었다.

거기다 로쟈는 숨겨둔 비장의 카드를 하나 더 꺼냈다.

‘아벤티노가 끝낼 때까지 묶어두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팟!

로쟈가 다시 양손을 뻗자.

이번에는 초록색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졌다. 이번에도 마법진이 공간을 찢으며 들려오는 엄청난 소리.

쿠웅! 쿵! 쿵!

마법진에서 나온 건 녹색의 털을 가진 거대한 사슴이었다.

두라스로르(Duraþrór)

세계수의 잎을 뜯어먹으며 자랐다는 4마리의 신화 속 사슴. 두라스로르는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자연의 힘을 가진 존재였다.

물론 운사처럼 정식적인 경로로 맺은 계약은 아니었다.

두라스로르는 로쟈가 던전에서 얻은 세계수의 잎이라는 아티팩트로 소환해낸 존재.

두라스로르의 소환은 기회가 단 1번뿐이기에 중요한 일을 위해 지금까지 아껴두었다.

‘……하지만 이그니스가 상대라면 꺼낼 만한 카드지.’

쿵!

두라스로르가 뿔로 땅을 내려치자. 굵은 초록색의 줄기가 꿈틀거리며 생겨나더니 이그니스에게 쏘아졌다.

“크르으윽!”

줄기를 끊어내려 이그니스는 몸을 비틀었지만 그럴수록 나무줄기는 더욱 앞발을 옭아맸다.

“아벤티노!”

로쟈가 모든 사전 작업을 끝내자.

아벤티노는 그제야 이그니스에게 달려 나갔다.

파앗!

아벤티노가 포켓에서 꺼낸 무기는 평소의 온화한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대검.

아벤티노는 공중에서 생성된 대검의 무게를 실어 그대로 이그니스의 앞발을 내리쳤다.

파아악!

강철처럼 단단하다는 드래곤의 피육이 흩어지고. 이그니스가 고통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그러나 아벤티노는 붉게 물든 눈을 한 채, 조용히 읊조렸다.

“……심판은 이제 시작입니다.”

묶여 있는 이그니스를 향한 무차별적 난도질.

콰아악!

이그니스의 피육을 베어나갈수록 아벤티노에게선 살기 어린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청의 사도 아벤티노. 그의 또 다른 이명은 광전사(Berserker).

“아벤티노! 심장을! 심장을 노려!”

로쟈가 외치는 목소리도 광기에 휩싸인 아벤티노에게 닿을지는 미지수였다. 어떻게 보면 이건 아벤티노가 가진 [광기의 폭주]의 단점.

신체 능력과 마나가 엄청나게 증폭되지만 지금처럼 이성을 잃으니 상대에게 제압을 당하기 쉬웠다.

하지만 아벤티노의 곁에는 로쟈가 있었다. 불길을 막기 힘든 아벤티노를 위해 운사의 비를 내려 주었고, 두라스로르의 나무줄기로 이그니스의 움직임을 봉쇄해주었다.

지금 아벤티노는 그야말로 무적.

나머지 공략대원을 모두 합쳐도 로쟈와 아벤티노의 시너지를 이길 순 없었다.

쿠웅! 쿵!

앞발을 묶여 뒷걸음질 치던 이그니스는 결국 줄기를 풀기 위해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사아아.

폴리모프를 사용한 것이다.

“하찮은…… 하찮은 인간 놈들이! 나를……. 사도닉스의 화신인 날!”

소녀의 모습으로 변한 이그니스가 분노에 휩싸여 소리치자. 금빛 눈이 도마뱀처럼 번뜩였다.

그러나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쏴아아아-

잿빛의 하늘에선 비가 내렸고.

“쉬이익-!”

던전의 입구에선 압록강의 수호신인 운사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가장 큰 무기인 불을 봉인 당한 지금. 이그니스는 로쟈의 말처럼 덩치 큰 도마뱀이었다.

마법과 마나에 정통한 사도닉스와 달리. 화신인 이그니스는 그저 사도닉스의 ‘조각’에 불과 했으니까.

“──!”

두라스로르가 고개를 들고 신비한 울음소리를 내자. 바닥에서 솟아오른 나무줄기가 다시금 옭아맸다.

용암으로 끓어오르던 던전은 이미 운사의 비로 차갑게 식어 하늘처럼 잿빛의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저벅. 저벅.

대검을 든 심판자가 단죄를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쏴아아아-

이그니스는 매섭게 쏟아지는 빗속에서 고개를 들었다.

“모든 화신이 사라지면. 사도닉스가…… 그녀가. 깨어난다. 알고 있겠지?”

이그니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벤티노는 포켓에서 고대의 언어가 새겨진 날카로운 단검을 꺼냈다.

“이게 무슨 단검인지 알고 있으십니까?”

아벤티노의 질문에 이그니스는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몰라.”

“드래곤인 당신도 모르는 게 있나보군요. 하긴…… 그럴 만도 합니다. 이건 탑에서 얻은 다른 차원의 물건이니까.”

아벤티노는 이그니스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평소의 아벤티노와는 묘하게 다른 말투.

“원래는 사도닉스에게 사용하려 했습니다만……. 역시 보는 눈이 많아지면 작전의 성공률이 낮아지니까요.”

아벤티노는 난데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더니 단검으로 이그니스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컥! 흐악!”

심장을 꿰뚫린 고통이 아닌, 다른 차원의 통증 때문에 이그니스는 숨을 들이켰다.

마치 단검을 기점으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기분.

그그그극!!!

단검에 찔린 상처는 하나의 점이 되어 이그니스를 빨아들였다.

통.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경쾌한 소리. 단검에 찔린 이그니스는 보석으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벤티노! 끝났어? 뭐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이그니스가 사라지자 정령들을 역소환시키고 달려오는 로쟈. 아벤티노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로쟈. 새로운 무기를 사용해보느라…….”

“……아, 아티팩트라던 그 단검?”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잠시. 보석을 확인한 로쟈는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이, 이건 드래곤 하트잖아!?”

로쟈가 보석을 주워들자. 아벤티노는 그런 로쟈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큭! 시작부터 운이 좋은데?”

저벅. 저벅.

빗물을 튀기며 기뻐하는 로쟈의 등 뒤로 다가가는 아벤티노.

“이 단검은 원래는 빛을 모아주는 용도라고 합니다. 별과 관련된 주술을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더군요.”

“그게 문제야? 드래곤 하트라고 드래곤 하트! 공략금 말고는 기대도 안 했는데…….”

보석을 쥔 로쟈가 눈을 빛내며 기뻐하자. 아벤티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빛을 모아주는 대신. 마나를 모으는 단검으로 개량이 되었죠.”

방대한 드래곤의 마나를 모아 응축시킨다. 그렇게 아티팩트로 만들어낸 ‘결정’은 드래곤 하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로쟈는 아벤티노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런 지루한 말은…….”

하지만.

푸욱!

“……어?”

아벤티노의 단검이 로쟈의 배를 찌르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멍한 눈으로 배에서 튀어나온 단검을 바라보는 로쟈. 그녀는 전투의 프로페셔널이었지만 파트너였던 아벤티노의 배신은 사고를 멈추게 만들었다.

“어, 어째서?”

16594425707538.jpg 

당황한 로쟈가 단검을 보며 중얼거리자. 아벤티노는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역시 한 번밖에는 사용되지 않는 군요. 아쉬운 일입니다. 당신이라면 분명 좋은 촉매제가 되었을 텐데.”

퍼억!

배에서 단검을 뽑아내자 로쟈는 힘없이 쓰러졌다.

“아, 아벤티노? 어…… 어째서?”

아벤티노는 대답 대신 손을 자신의 얼굴에 가져다댔다. 마나의 영향을 받자 점점 일그러지더니 다른 누군가로 바뀌는 얼굴.

7급 헌터인 로쟈는 단번에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당신까지 죽이고 싶진 않습니다. 전 이 물건을 회수하러 왔을 뿐이니까요.”

리벨리온의 단장. 네임리스.

갈색머리의 남자가 바닥에 떨어진 보석을 주워들자. 로쟈는 괴로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넌! 하지만……. 변장을 했다고 어떻게 아벤티노의 특성을…….”

네임리스는 얼이 나간 로쟈를 보며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로쟈? 그것보단……. 곧 나타날 사도닉스를 처치할 방법이나 생각해보시죠.”

쨍그랑.

네임리스는 바닥에 로쟈를 찔렀던 단검을 떨어트리더니 검은색 포탈을 열고 사라졌다.

완벽하게 이그니스를 공략했다고 생각했지만 2명의 7급 전력을 잃어버린 상황.

로쟈는 빗물에 몸을 처박은 채 절망과 분노가 뒤얽힌 목소리로 이를 갈며 소리쳤다.

“……리벨리온!”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