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신유성과 주힘찬이 2시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자. 용암지대가 서서히 걷히며 땅은 어느새 광물로 뒤덮인 수정동굴로 바뀌어 있었다.
탁.
수정동굴로 들어가기 직전.
“잠깐.”
주힘찬은 몸을 숙여 바닥에 손을 얹어보았다. 탁 트인 평야와 달리 밀폐된 동굴 안에서는 작은 움직임도 알아채기 쉽다. 또한 동굴 안에 드래곤이 있다면 커다란 덩치와 강대한 마나로 기운을 퍼트리기 마련이었다.
“흠. 아무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네요. 던전이 변이된 걸 보니 소한이 된 건 분명할 텐데…….”
하지만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지긴커녕 이상할 정도로 고요한 던전.
‘움직임이 없다고?’
이상하게 생각한 신유성이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초감각을 통해 주변을 스캔했지만 동굴에서 거대한 생명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거기다 유성 학생. 이 동굴 마치…… 미로 같지 않습니까?”
주힘찬은 아름다운 수정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언젠가 봤던 유원지에는 이런 미로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수정이 아니라 거울이었지만요.”
“……거울 미로?”
신유성이 궁금하다는 표정을 짓자. 주힘찬은 아! 하고 웃더니 친절하게 설명을 해줬다.
“온통 거울 투성이인 곳에서 길을 찾는 거죠. 보기엔 쉬워 보여도 미로에 들어가면 제 모습까지 반사하는 거울 때문에 쉽게 길을 잃었죠.”
주힘찬은 멋쩍게 웃더니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굴의 안으로 들어갈수록 통로는 점점 좁아졌고, 광물의 형태로 흩어져 있던 수정은 이제 기둥처럼 잘 세공되어 드문드문 놓여 있었다.
스으으.
수정 광산에서 퍼져 나오는 음산한 기운. 경계를 놓치지 않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가자. 마치 신유성과 주힘찬을 기다린 것처럼 2개의 통로가 나왔다.
“이건…… 결계군요.”
먼저 반응한 건 신유성.
대항전에서 로렐라이의 결계를 겪어보았기에 알 수 있었다. 마나의 질은 다르지만 강대한 마나를 조밀하게 조합하는 방식은 영락없는 결계였다.
“드래곤의 결계라……. 전 이런 쪽을 상대하는 건 영 꽝인데 말이죠.”
주힘찬은 결계를 상대하는 것보단 차라리 입을 벌리고 달려드는 드래곤과 전투하는 쪽이 더 편했다.
그러나 드래곤의 결계는 마나 공명을 익힌 신유성도 파훼할 수 없는 고차원의 마법. 크루페오스를 잡기 위해선 결계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상대는 사도닉스의 화신 중 하나. 이 정도는 각오했던 바. 신유성 학생도 결계에 들어가시겠습니까?”
주힘찬이 힘찬 목소리로 소리치자. 신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방법은 없겠지.’
통로를 통해 걸어가자.
투명한 수정에서 신유성을 향해 푸른빛이 쏟아졌다. 절로 시선이 빼앗기는 몽환적인 분위기. 수정은 신유성의 모습을 비추는 경우나, 제각기 다른 오색의 빛을 뿜어내는 경우로 나뉘었다.
- 화신을 공략하는 데도 이렇게 손이 많이 가다니. 서로 위험을 알아챌 수 있게 목소리를 내며 걷도록 하죠.
주힘찬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리며 들려왔다. 상대의 결계에 들어온 이상 이미 신유성과 주힘찬의 위치는 밝혀진 상황. 서로의 위치를 공유하며 걷는 건 좋은 아이디어였다.
“좋습니다.”
신유성이 짤막하게 대답하자.
주힘찬은 무슨 말을 할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 신유성 학생은 왜 사도닉스가 자신을 화신체로 나누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레드 일족 최강의 드래곤이었던 사도닉스가 자신의 화신체를 만든 이유. 주힘찬이나 헌터들이 알 수 있는 건 그냥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했다. 헌터들이 알 수 있는 건 탑의 기록에 적힌 간략한 몇 줄에 불과했으니까.
신유성은 수정에 가로막혀 주힘찬이 보이지 않음에도 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사도닉스가 유희를 좋아한다고 들었습니다.”
유희.
인간으로 따지면 영생에 가까운 시간을 사는 드래곤이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레어를 나와 인간계를 여행 다니는 행위.
- 그렇죠. 탑의 기록에는 더 많은 유희를 즐기기 위해 사도닉스는 자신의 인격을 나누었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인간들과 보낸 시간이 즐거웠던 걸까? 하지만 탑의 기록에 사도닉스의 끝은 좋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도닉스는 이성을 잃고 폭주했으며 인간계를 마음대로 헤집은 드래곤이다.
책임감을 가진 레드 일족의 드래곤들이 막아보려 했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 갑자기 궁금하더군요. 인간들을 만나기 위해 자신의 영혼까지 쪼개버린 드래곤이. 왜 인간계에서 미쳐 날뛰었는지.
그러나 탑의 기록에 적혀 있는 건 거기까지.
[폭주한 사도닉스는 인간계를 침공했고, 용사와 레드 일족에게 결국 봉인 당한다.]
기록에 적혀 있는 건 이 짤막한 구절이 전부다. 아무리 이유가 궁금해도 이 정도 정보로는 모두 추론에서 끝나고 만다.
- 하하! 물론 공략해야 할 보스몹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가지는 건 바보 같은 일이지만요.
주힘찬의 이야기가 끝나자 무엇이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틀렸어.”
어디서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가 주힘찬의 이야기를 반박했다. 너무나도 힘없이 슬픈 감정이 묻어 있는 목소리.
쩌저적!
신유성 주위를 감싼 수정들에 금이 가며 동굴 바닥에 엄청난 크기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사아아!
이건 영락없는 결계식의 작동.
어느 정도는 각오한 바였지만 역시 상대는 드래곤. 수정동굴 전체를 감쌀 정도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결계의 규모가 너무 컸다.
파아앗!
눈앞이 점멸하며 신유성은 어딘가로 전이됐다.
‘……텔레포트?’
헌터들이 특성을 다룬다면 드래곤은 마법을 다룬다. 물론 마법 중에서도 이런 대규모 텔레포트는 최상위 격의 마법.
신유성은 긴장을 유지한 채 주변을 살폈다.
바닥은 투명한 수정이었고.
주변에는 은은한 푸른빛의 조명과 안개가 흘러넘쳤으며. 시야의 뻥 뚫린 맞은편에서는 캄캄한 암흑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저건, ……틀린 이야기야.”
저벅저벅.
맞은편의 어둠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상대는 밤바다에 별이 뿌려진 듯 신비한 머리칼을 가진 소녀였다.
“……사도닉스가 우리들을 만든 건 그런 이유가 아니야.”
소녀는 신유성을 공격할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소녀의 차분한 목소리는 마치 상대를 설득하고 싶은 듯이 보였다.
“……네가 크루페오스?”
자세를 잡으며 던지는 신유성의 질문에 소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내가 바로 사도닉스의 두 번째 화신. 그녀의 온화함이 담긴 두 번째 영혼의 조각. ……그래서 알 수 있어.”
헌터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크루페오스는 사도닉스가 자신의 온화한 성격을 담아내 만들어낸 화신이었다.
그저 탑의 기록에 남아 있는 건 크루페오스가 사도닉스의 화신 중 2번째로 강하다는 정보뿐.
크루페오스가 신유성에게 무작정 공격을 가하지 않는 것도 그때 받은 온화한 성격의 발현이었다.
“사도닉스가 영혼을 쪼개 우리들을 만든 이유는…….”
크루페오스는 바닥에 손을 올렸다.
퐁당.
마치 강물에 빗방울이 떨어진 것처럼 마나가 바닥에 울려 퍼졌고. 어두웠던 공간은 마치 영화장의 스크린처럼 영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가 맺은 약속 때문이야.”
사아아.
점점 어두웠던 공간이 밝아지며 아름다운 초록의 숲이 보였다.
짹짹.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크루페오스가 마법으로 만들어낸 영상은 신기하게도 소리까지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햇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숲에서 보이는 건, 잠에 빠진 갈색 머리의 소년.
“야, 타루!”
멀리서 붉은 머리의 소녀가 갈색머리 소년을 불렀다.
“얼른 일어나! 헤인다 아주머니가 빨리 밥 먹으러 오래! 이번 스프는 고기도 많다고 빨리 오라고 했어.”
“으웅, 레피나…….”
레피나라는 소녀는 타루라는 소년을 챙기는 듯 보였다.
툭.
갑자기 꺼져버리는 영상.
크루페오스는 레피나라는 소녀를 슬픈 얼굴로 바라보며 말했다.
“처음은 변덕이었습니다. 드래곤에게 주어진 긴 시간에 사도닉스는 지루함을 느꼈고…… 인간들의 삶을 부러워했거든요.”
방금 보았던 강렬한 붉은색 머리카락과 눈. 신유성은 레피나가 사도닉스라고 확신했다.
크루페오스는 그런 신유성의 생각을 읽어버렸다.
“당신은 눈썰미가 좋군요. 맞아요. 그녀가 사도닉스랍니다. 인간을 부러워한 나머지. 사도닉스는 인간과 똑같은 삶을 살기로 결심했거든요. 그것도 아주 평범한 인간을…….”
사아아.
다시 영상이 켜졌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타루는 14살 정도의 나이로 자라 있었다. 어린 시절의 예쁘장했던 얼굴은 이제 눈부실 정도의 미모를 자랑했다.
“……레피나.”
소년병으로 징집이 되어 마을을 떠나게 된 타루. 붉게 물든 저녁의 노을 앞에서 레피나는 쓸쓸한 얼굴로 답했다.
“응.”
“돌아올게.”
타루가 짤막한 인사를 남기고 떠나려 할 때, 레피나는 타루의 손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진짜 ‘약속’한 거다? 돌아오기로. 나에게 ……맹세한 거야. 알겠지?”
둘이 맺은 약속은 여느 소년병과 시골의 소녀가 맺은 평범한 맹세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약속이 아니었다. 지금 어떤 모습으로 폴리모프를 했던 상대는 레드 일족의 수장. 사도닉스.
“응. 레피나. 맹세할게.”
타루가 대답한 순간.
주변의 세상이 옅게 빛났다.
사도닉스가 언령으로 약속을 맺은 것이다. 드래곤이 가진 언약의 힘은 소국의 전장은 판도를 바꿀 만큼 강대하다. 그런데 언약의 주인은 무려 사도닉스. 타루의 목숨을 지키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팟.
언약과 함께 스크린이 꺼졌다.
크루페오스는 신유성을 보았다.
“하지만 변수가 있었습니다. 처음 해본 사랑은…… 지루했던 드래곤에겐 너무 강렬한 경험이었거든요.”
크루페오스는 조금씩 신유성을 설득하고 있었다. 사도닉스의 서사를 들려주며 왜 그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해명하고 있었다.
사아아.
다시 어둠 속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전쟁에서 귀국한 타루는 17살이 됐고, 마을은 전쟁영웅의 귀환을 반겼다.
“타루가 돌아왔다!”
“얼른 이리 오게! 짐은 뭐가 이리 많은지!”
“어허, 이 사람들! 타루는 이제 귀족 신분이란 말일세! 존칭을 붙여서 깍듯하게 모셔 드려야지!”
“하긴, 영주님까지 자네에게 관심을 보였다면서? 주변에서 아주 난리더군.”
“공적도 공적이지만 적국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들었던가?”
“렌델의 장군 중에는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있다고 하더라니까?”
“하하! 우리 타루의 미모 하며 실력이면 그런 의심을 받아도 싸지!”
말에서 내린 타루는 수많은 마을 사람들을 제치고 천천히 누군가에게 걸어갔다.
스윽.
그리고 천천히 투구를 벗었다.
“레피나.”
맹세했던 3년이 지나고.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타루는 레피나를 바라보며 너무나도 익숙한 소년의 미소로 웃어주었다.
“돌아왔어.”
자그마치 드래곤을 반하게 만든 마성의 남자. 17살이 된 타루의 얼굴은 놀라울 정도로 신유성과 닮아 있었다.
사도닉스가 뒤늦은 첫사랑에 빠진 것도 이해가 될 미모.
어딘가 바람이 불었고.
크루페오스의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렸다.
“인간은 짧지만 불처럼 타오르는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타루와 지낸 첫 유희는…… 그녀에겐 너무 강렬한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네요.”
크루페오스의 손을 타고 흩뿌려진 빛은 어둠에 새겨져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만들었다.
“……타루.”
“긴 시간. 계속 내 곁을 지켜줘서 고마워……. 레피나.”
70년.
인간에게는 인생의 전부이자. 드래곤에겐 찰나에 불과한 시간. 세월이 지나며 타루는 나이가 들었지만 레피나는 여전히 20대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 모습이 바로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증거.
“아니. ……사도닉스라고 불러야 할까? 내가 없으면……. 넌 훌쩍 떠나고 말 테니 말이야……. 정말 고마웠어. 레피나.”
타루는 자신의 끝을 지켜준 레피나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이 시작할 그녀의 유희를 기도로 축복했다.
하지만 사도닉스는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인간의 70년은.
드래곤인 사도닉스에겐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녀는 타루를 떠나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아니. 떠나지 않아. 난…… 널 찾을 거야.”
사도닉스는 단호했다.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을 뱉어내며 타루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맹세할게. 렌델의 사람들은 환생을 한다지?”
사도닉스는 타루의 손을 붙잡았다.
잔인하게도 맞잡은 손에서 생명의 온기가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그러니 서둘러 입을 열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나든. 어떤 모습이든. 타루……. 난 널 찾아낼 거야.”
이젠 희미해진 그 순간처럼.
주변의 풍경이.
세상이 빛났다.
사도닉스는 또 한 번 드래곤의 언령으로. 타루와 언약을 맺은 것이다.
“내가 몇 번의 유희를 반복해서라도. 꼭…….”
타루가 해줬던 약속처럼 레피나는 웃으며 맹세했다.
“찾아갈게.”
타루의 불꽃이 꺼졌다.
잿더미가 되어버린 불은 다시금 타오르기 위해 언약의 힘과 함께 밤하늘로 흩어졌다.
언약의 힘은 절대적이니 분명 빛은 새로운 불꽃이 되어 타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의 끝이 모두 해피엔딩을 맞이할 순 없는 법.
사도닉스는 수백 수천 번의 유희를 거듭했고, 자신의 영혼까지 쪼개며 타루의 환생을 찾으려 했지만.
결국 타루를 찾아내지 못했다.
언약을 어겨버린 것이다.
크루페오스는 무감하지만 쓸쓸한 얼굴로 신유성을 바라보았다.
“……언약을 맺은 드래곤이 강하면 강할수록 만큼, 언약의 힘은 절대적입니다. 저를 만들어낸 사도닉스라면 더욱 그랬겠죠.”
크루페오스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신유성은 모든 내용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왜 사도닉스가 화신까지 만들며 유희를 거듭했는지. 결국엔 폭주했는지. 모두 알 수 있었다.
“이곳이 어디든. 소환된 이상. 화신들은 타루를 찾을 겁니다. 그게 그녀의 바람이니까. 그런데……”
크루페오스는 푸른색의 마나가 일렁이는 공간에서 신유성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찾은 것 같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