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탑의 기록에 접촉한 학생들은 대부분이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실패했습니다.”
잇신은 일본에선 1학년 전체에서 세이지와 함께 최상의 실력을 자랑했지만 드래곤을 베는데 실패했다.
드래곤을 베기 위해서 도전한 횟수는 52회. 그러나 잇신이 가진 상대를 벨수록 강해지는 백귀야행의 특성이 드래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그렇게 풀 죽을 거 없어. 탑의 기록이 정보를 공짜로 알려주진 않거든.”
당연하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거리는 로쟈. 콜트는 민망한 얼굴로 망설이더니 크흠-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저, 저도 실패했습니다.”
이미 2명 이상이 시험에 실패한 상황. 역시 자신만 탈락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자 웨이린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해요! 아무 것도 안 가르쳐주고. 일단 드래곤부터 때려 보라고 하던데요? 그게 말이 되나요?”
로쟈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웨이린을 비웃었다.
“자격이 있는 사람은 다 통과해. 그리고 이상할 건 없어. 드래곤은 최하가 6급 보스니까. 너희들이 실패하는 게 당연하지.”
로쟈는 핏- 하고 웃더니 아델라 쪽을 바라봤다. 아덴의 제자라 그런지 아델라는 거창한 이명이 많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아델라는 더더욱 로쟈가 기대를 많이 품고 있는 학생.
“어때 넌 탑의 기록에서 대답을 들었니?”
로쟈의 질문에 아델라는 담담하게 답했다.
“네.”
탑의 기록에게 대답을 들었다는 건 시험을 통과했다는 이야기.
“무슨, 말도 안 돼……. 그 괴물한테 데미지를 먹였다고?”
웨이린이 믿을 수 없다며 탄성을 터트릴 때, 로쟈는 흥미로운 얼굴로 물었다.
“평가 등급은?”
“B입니다.”
A등급이라면 드래곤의 언령에 관한 정보와 마나 실드를 부수기 위한 공략법을 들었을 점수.
“……5661넘버에서 B등급이라. 적어도 5급에서 6급의 실력이라는 건가. 넌 화신을 잡은 뒤, 사도닉스 공략에 참가할 자격이 있겠구나.”
로쟈의 충격 발언.
이번에는 다른 학생들이 놀란 얼굴이 됐다.
“허억, 사, 사도닉스 공략!?”
“그럼 이건 ……공략을 겸비한 본 레이드의 시험?”
웨이린과 잇신이 한마디씩 거들자. 로쟈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델라를 바라봤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역시 아덴 님의 제자인가? 정말 통과할 줄이야. 훌륭해. A급을 못 받은 건 아쉽지만 언령에 대한 정보는 들었을 테니 엄청난 진전이지.”
아델라가 탑의 기록을 통과 했다는 소식에 모두의 시선이 신유성에게 모였다.
“너는 무슨 정보를 들었지?”
로쟈의 질문에 신유성은 담담하게 답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허, 너도? 역시 이번 시험은 어렵지?”
이 기회를 틈타 신유성에게 달라붙는 웨이린. 아델라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물론 드래곤은 공략하기 어려운 보스다. 하지만 아델라는 신유성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신유성의 실패는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로쟈는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지금까지 본적 없는 심각한 얼굴로 신유성에게 물었다.
“……평가 등급은?”
“S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신유성의 평가 등급은 S. 담당자가 도전자에게 가르칠 정보가 없을 때 받는 최고의 등급이었다.
“헉… 실패가 아니라 S!?”
“……S라고?”
“강한 건 알았지만…….”
웨이린과 잇신. 콜트까지 모두 혀를 내두르는 상황. 아델라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뿌듯해졌다.
‘……난 내 라이벌을 믿고 있었어.’
한편 로쟈는 침묵을 지키며 관리자 계정으로 신유성의 세이브 파일을 검색해 보았다.
[No5661 : 레드드래곤 사도닉스]
[담당자: 드래곤 슬레이어 아슬란]
[평가:S]
[후기: 단 1번의 트라이로 드래곤의 처치까지 성공시킨 도전자다. 드래곤이 가진 마나 성질의 이해와 기술의 파괴력부터 타이밍까지 무엇 하나. 가르칠 게 없음으로. 담당자로서 지식의 전수를 포기한다.]
세이브 데이터에 적혀 있는 건 담당자가 직접 신유성을 인정했다는 내용.
적어도 드래곤을 상대함에 있어 신유성의 실력은 6급과 동일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이야기였다.
“하…… 루키는 무슨. 이래서야. 누가 멘티고 누가 멘토인지 알 수가 없겠군.”
아덴의 손녀 아델라.
검신의 후계자 류진.
제2의 마녀 로렐라이.
이번 1학년은 전 세대를 통틀어도 유독 강했다. 하지만 신유성은 그 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역시 다음 세대의 주역도 한국에서 탄생하게 되는 건가.’
좁은 땅.
적은 인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어찌 그렇게 강한 헌터들이 많이 탄생하는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너희도 휴식을 취해야 할 테니. 이만 해산해라. 공략을 위해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도록.”
* * *
[……들킨다. 들키지 않는다?]
치트의 장난스러운 내기.
[들키지 않는 다에 걸겠습니다. 대장은 철두철미하신 분입니다. 당신처럼 기분에 휘둘리지 않죠. 그러니 흔적을 남길 리가 없죠.]
매서운 눈빛으로 일갈한 유월은 그 말을 끝으로 아지트를 걸어 나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치트는 자신과 어울리기 힘든 사람이다.
태생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하지만 치트는 리벨리온의 대장 3017. 통칭 네임리스의 무한한 신뢰를 받으며 또 큰일을 맡게 됐다.
‘……대장께선 대체 무슨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건지.’
리벨리온에 류진을 섭외하려 하다니. 그는 무려 검신의 제자였다.
잘못되어 수가 틀린다면 오히려 리벨리온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뭐 그분의 큰 뜻을. ……내 그릇으로 이해할 리가 없지.’
하지만 3017의 판단이라면 전적으로 신뢰하는 유월. 치트를 대하는 것과는 상반된 반응이었다.
* * *
드드드드드드!!
동굴 안에서 들려오는 웅장한 소리는 마치 전장에서나 들을 법한 수천 마리의 말발굽 소리 같았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주인공의 정체는 군마(軍馬)가 아니라 소라게
그것도 3미터는 될 법한 거대한 소라게들이 떼거리로 몰려왔다.
“이것만 끝내면! 9층까지 정복이드아아-! 집에 갈 쑤 있드아아!! 모두 소리 질러어어-!”
선봉에 나선 에이미가 거대한 이쑤시개를 들고 용기 있게 소리치자. 30마리의 해골은 턱으로 따다다닥- 소리를 내며 따라서 호응했다.
“아자자!”
어설프게 뒤늦은 파이팅을 외치는 스미레.
“쟨 어떻게 저리 팔팔하냐? 난 씻지도 못하고 침대도 없어서 죽겠는데….”
고된 탑 공략에 지쳐버렸는지 피곤한 얼굴의 김은아.
[3층 입장 조건: 플레톤 소라게 군집 처리]
[현재 남은 소라게 297마리]
선봉의 에이미는 손바닥으로 입을 두드려 인디언처럼 아르르르- 소리를 내어 시선을 집중시켰다.
“다 주겨! 한 마리도 남김없이! 팍팍~ 찌르란 말이야!”
오늘의 에이미는 뭔가 달랐다. 텐션이 높은 건 두 말할 필요가 없고. 과할 정도로 퍼포먼스를 펼치는데다 전투력이 평소와는 차원이 달랐다.
파악!
순식간에 눈앞의 소라게를 거대한 이쑤시개로 찌르고. 뒤를 돌아 이쑤시개를 던지더니 2마리를 처치하는 에이미.
싹둑!
소라게가 머리를 향해 집게발을 휘둘렀지만 팟- 하고 자세를 숙이더니 에이미는 맨손으로 소라게의 껍질을 후려쳤다.
퍼엉!
마치 폭죽처럼 터져버리는 소라게의 껍질. 에이미의 활약은 믿기가 힘들었다.
“세계가, 시청자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아-! 다 쥬겨어-!”
양 주먹을 불끈 쥐며 크앙! 하고 바바리안처럼 포효하는 에이미.
오늘처럼 에이미가 대활약을 펼치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ON AIR]
[방송제목: (생방)거대 소라게 300마리 VS 에이미와 2인의 부하들!]
[부제: 한다면 하는 초미녀 방송인 에이미. 9층 깰 때까지 방송종료는 없다!]
[현재 시청자: 62,044명]
9층은 탑 중에선 드물게도 방송의 송출이 자유로운 층이었다. 덕분에 지금 에이미의 전투는 6만명 가까운 시청자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게 무슨 차이인지 의아하겠지만 에이미의 특성은 효과가 남달랐다.
[변신(특성) - 일정시간동안 신체의 능력치를 올립니다. 변신 중에는 수호의 마음이 항시 적용됩니다.]
[수호의 마음(스킬) - 지켜야 할 대상이 많을수록 변신의 효과가 강해집니다.]
지켜야 할 대상.
좀 더 포괄적으로 말하면 에이미에게 호감을 가지거나, 응원을 해주고, 지켜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강해지는 효과의 특성. 즉 방송이 켜진 에이미는 최고의 컨디션이었다.
“으캬캬! 이제 몇 마리야? 100마리도 안 남았네?”
스으윽- 손등으로 얼굴에 묻은 땀을 닦으면서 캬캬캬- 하고 웃는 에이미.
“얼씨구.”
김은아는 모처럼 전투에 심취한 에이미를 바라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주 신났네.”
“은아 씨! 조심하세요 앞에!”
스미레의 다급한 외침에 김은아는 피식- 하고 웃더니 번쩍이는 전기만을 잔상으로 남긴 채 사라졌다.
“알고있거든.”
콰앙!
그리곤 뒤에서 나타나 김은아가 주먹을 내지르자. 소라게는 전기에 당해 몸이 마비되어 버렸다.
두두두두두!
“모두 조금만 더 힘내주세요!”
거기다 스미레의 언데드 군세까지 밀어 닥치자. 흉포한 소라게들도 숫자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10분.
30분.
그리고 1시간.
[남은 소라게 297마리]
[플레톤 소라게 군집 처리 완료!]
에이미. 김은아. 스미레.
3인방은 동굴에 널린 소라게들의 잔해 위에서 서로를 바라봤다.
그리곤 약속이라도 한 듯 짝! 하고 하이파이브를 치며 함께 소리쳤다.
“이겼다아아-!”
“드디어 돌아간다!”
“저희가 이겼어요오!”
드디어 만끽하는 공략의 기쁨.
3인방은 드디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과 신유성의 부탁을 성공시켰다는 생각에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3인방의 앞에 공개되는 10층의 공략 내용.
[10층은 파티 퀘스트가 존재하는 층입니다.]
[퀘스트 이름: 동심의 세계! 토이 왕국을 지켜라!]
[최소 참여 인원 6명]
[페널티: 도전자의 나이가 전부 10년 어려집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홀로그램을 모두 읽은 김은아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