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삑. 삑. 삑. 삑.
바이오넷 모니터의 초록색 글자로 표시된 심박과 맥박. 류진은 잠든 류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기 없는 피부에 무표정한 표정.
장장 11시간의 수술 끝에 맞이한 류밍의 모습은 너무 고요했다. 오늘로 몇 번일까, 류진은 수술의 숫자를 세는 것조차 포기해버렸다.
류진에게 류밍이 수술을 받은 횟수는 평범한 숫자가 아니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손발이 차갑게 식을 정도였다.
‘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 걸까.
꼭 고쳐주겠노라고 맹세를 한지 수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류밍의 삶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관짝 같은 기계에 들어가 마나 치료를 받고. 성인에게도 독한 항생제를 매끼 챙겨 먹으며, 친구조차 만나지 못하고 매일 감옥 같은 병실에서 눈을 떠야하는 삶.
[오빠!]
이 지옥 같은 생활 속에서도.
걱정하는 오빠를 위해 괜찮은 척 웃어줄 수 있다니 너무나 대견한 동생. 하지만 류진은 그렇기에 류밍이 자고 있는 동안 병실을 찾았다.
류진은 이 힘겨운 지옥 속에서도 환하게 웃어주는 류밍을 볼 용기가 없었다.
‘……류밍.’
류진은 잠든 류밍을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어색한 표정이었지만 어느 때보다 따뜻함이 묻어나왔다.
‘……그 작은 몸으로도. 너는 나보다 강하구나.’
설령 자신의 목숨을 내주더라도 류진은 류밍을 저 지옥에서 구해주고 싶었다. 1분 1초가 급했다.
괴로워하는 류밍을 떠올릴 때면 무엇을 해도 쫓기는 듯 급박한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발걸음이 멀리서 들려왔다
저벅. 저벅.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당당한 위압감. 검신은 양쪽에 정장을 입은 남자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축하한다. 수술이 꽤 성공적이라고 하더군.”
눈을 가늘게 뜬 검신이 미소를 지었다. 류진은 검신의 아름다운 미소가 뱀이 날름거리는 혓바닥과 겹쳐보였다. 저건 자신의 스승이 진심으로 만족했을 때만 지어보이는 미소였다.
“기쁜 일은 기쁜 일이지. 다만 이 빚은 잊지 말거라. 내가 네 동생의 목숨을 살렸듯이. 너도 내 검술에 극의를 보여주어야 한다.”
검술의 극의는 검신 자신조차 평생 닿지 못할 길. 하지만 그건 자의가 아닌, 탑의 힘으로 변해버린 검신의 몸 때문이었다.
저주인지, 축복인지.
탑이 뿜어낸 미지의 힘으로 검신의 무쇠 같았던 손은 백옥처럼 변해버렸고. 굵고 길었던 다리는 이제 평범한 여성의 것이 되어 버렸다.
검신에게 검술은 인생이었다.
삶의 9할을 바쳐 만들어낸 자신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변해버린 몸으론 아무리 노력해도 검술의 극의에는 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여전히 중국 최강의 헌터였지만 목표를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검신은 류진을 찾았다.
“나는 천하패검의 완성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너도 소중한 것을 지키려면 그만한 각오를 걸어야겠지.”
자신의 마침표를 찍어줄 유일한 편린. 검신은 무슨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류진을 자신의 곁에 묶어두어야 했다.
“……만일의 만약. 나의 기대에 못 미친다면.”
검신은 차갑게 웃을 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류밍은 검신에게 좋은 고삐였다.
‘자신의 일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자존심을 부릴 녀석이…….’
동생인 류밍의 일이라면 금방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스승님.”
마치 늑대와 같은 고고함.
류진의 인사에 검신은 보기 드물게 풋- 하고 웃었다. 검신에게 류진은 그저 이용하기 쉬운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그건 류진도 마찬가지.
검신의 힘과 권력이 필요했기에 머리를 굽혔을 뿐. 둘은 스승과 제자라고 불릴 사이가 아니었다.
검신은 그 모습에 파이프를 입에 물더니 속내와는 다른 하얀 연기를 뿜어냈다.
“후우- 스승이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툭- 검신은 파이프의 끝으로 잠든 류밍을 가리켰다.
“역시 저 아이. ……널 닮았구나.”
그 말을 끝으로 떠나가는 검신.
하지만 그때. 류진에게 정체불명의 메시지가 왔다.
띠링!
[imCheat!: 안녕! :D 반가워~~!]
단 한 번도 본적 없는 닉네임.
류진은 자신의 메시지 주소는 파티원이나 관계자들이 아니면 공개한 적이 없었다.
[imCheat!: 검신이라는 사람. 보기보다 정말 연기를 잘하는데?]
메시지를 본 류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인적은 없었지만 복도의 구석에선 류진을 녹화하고 있는 CCTV가 보였다.
[imCheat!: 그렇게 의심하는 표정 짓지마. 솔직히 악당인 내가 봐도 이건 아닌 거 같아서~ 친히 알려주려는 거야.]
마치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메시지의 내용. 상대방이 카메라를 해킹했다는 류진의 의심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imCheat!: 어차피 이것도 해킹으로 만든 아이디니까. 추적할 생각해도 의미 없는 거 알지?ㅋㅋ]
[imCheat!: 우린! 널 도와주러 온 거야. 검신이 숨겨온 진실을 말해 주려고 말이야. 이용당하기만 하다니 이 불쌍한 녀석. ( •᷄⌓•᷅ ) ]
류진을 바보 취급하는 메시지.
하지만 검신을 욕하고 병원의 카메라를 해킹하는 등 상대의 행동은 비범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단순한 장난으로 취급할 순 없었다.
‘…….’
자신이 이용당했다?
우스운 소리였다.
류진은 필요에 의해 검신의 밑에 있었다. 협회장인 검신은 류밍을 도와줄 힘이 있었으니까.
[imCheat!: 아직도 내 말을 못 믿는 눈치네? 하지만 이걸 듣는다면 생각이 달라질 걸?]
띠링!
류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상대가 보낸 녹음 파일을 켰다.
- 이번 수술은 임시방편에 불과합니다. 역류된 마나가 이미 심장 전체에 부담을 줬기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하지만 류진의 포커페이스는 오래가지 않았다.
-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지금 질문하는 목소리는 너무도 익숙했다. 방금 전에도 자신과 대화를 했던 목소리였다. 그러니 잊을 리가 없었다.
- 길어도 2년입니다.
- 약물을 늘려도 마찬가지인가?
- 이미 한계입니다. 마나를 순환시키면 심장에 부담만 쌓이고. 반대의 경우에는 몸에 부담이 갑니다. 2년 이상을 버티는 건…….
꽈악- 류진이 주먹을 쥐었다.
“……2년?”
자신의 동생에게 남아 있는 수명이 2년이 채 되지 않다니 그건 류진이 아카데미를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류밍은 세상에 없다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류진이라도 이런 이야기에 흔들리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 ……그래? 그럼. 이 사실은 류진에게 알리지 말게.
검신은 이 사실을 함구하려 했지만 결국 류진은 알게 됐다.
그것도 신원조차 불명한 누군가에 의해. 류진은 애써 냉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넌. 누구지?”
어차피 상대는 카메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류진이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자. 곧이어 상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imCheat!: 그게 중요해?]
[imCheat!: 우린 네 동생을 구해줄 수 있어. 그것도 2년 안에.]
[imCheat!: 자기소개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정곡을 찔린 류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잠든 류밍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어두운 밤.
비가 오는 날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흙냄새. 김은아는 몸이 축축히 젖는 건 싫었지만 비오는 날의 청량해지는 기분을 좋아했다.
투둑- 투둑-
졸졸졸-
그 때문일까.
김은아는 잠드는 대신, 텐트를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 녀석. 뭐하고 있으려나.’
겨우 며칠 안 봤을 뿐인데.
김은아는 신유성과 헤어진 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갑자기 드래곤을 잡으러 간다니 처음 들었을 땐 어이가 없었지만.
이제 김은아는 신유성의 행보에 놀라기보단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저 하나 아쉬운 점은 탑을 등반할 때 신유성이 없었다는 것.
같이 괴수를 잡고.
맛있는 걸 먹고.
텐트 안에서 잠들고.
목숨이 걸린 모험이라지만 탑에서 보낸 시간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유성이도 있었으면……. 아마 더 즐거웠겠지.’
이젠 이렇게 신유성을 그리워하는 게 이상하다고 의식하지도 못할 만큼. 김은아는 신유성에 대해 자주 떠올리고 있었다.
어찌 보면 괘씸하기도 했다.
작은 일에도 생각이 많아지는 자신과 달리. 신유성의 머릿속은 온통 무언가로 가득 차 있어 보였다.
배경을 믿고 뭐든지 어중간히 살아온 자신과는 달랐다.
무얼 하든 최선을 다했고, 어떤 순간에는 그게 바보 같았다.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김은아는 신유성이 돌아오기만 하면 잔뜩 괴롭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백화점에 데려가고, 보고 싶었던 영화도 보고. 음식점에도 데려가고.
뭘 하든 신유성은 전부 처음일 테니까. 자신이 가르쳐줘야 했다.
다른 상대라면 귀찮다고 생각했겠지만 신유성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제법 재밌을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지금까지 기숙사에만 살았었겠네.’
주말에는 자신의 저택에 데려가 보는 건 어떨까, 김은아가 간다면 할아버지와 부모님. 오빠는 물론 친척들까지 찾아 올 테니 제법 시끌시끌할 것이다.
잠에 들지 못하고 온통 신유성의 생각만 하던 김은아는 뭔가 이상한 점을 인지했다.
김은아의 계획을 정리하면 하루 종일 신유성과 같이 데이트를 하고. 자신의 집에 데려가서 가족들까지 보게 만드는 것.
‘……근데. 스미레랑도 같이 시간을 보냈고. 파티원이랑 있는 게 이상할 건 없지 않나?’
집에 데려가는 것도 가족들이 신유성이 보고 싶어 하기 때문. 그렇게 생각하니 뜨거워졌던 얼굴이 조금 잠잠해졌다.
‘그렇게 생각하니 당연한 거네? 오빠도 유성이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니까.’
거기다 신유성은 김준혁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 김은아는 금방 합리화를 끝냈다.
“흠냐, 흠냐…….”
그때 들려오는 에이미의 잠꼬대.
그렇다면 왜 신유성이 아닌 다른 동료들은 집에 데려가지 않는 걸까. 김은아는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미레는 데려가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럼 스미레도…….”
김은아가 잠든 스미레를 보며 눈을 맞춘 순간.
와락!
“라플라스 님. 최고에요오…….”
스미레가 잠꼬대를 하며 김은아를 껴안았다.
“흐억!”
숨이 쉬어지지 않는 압박감.
“착해요. 착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스미레의 손길과 포근하고 말캉한 촉감.
‘일단 그건, 다음에 생각할까…….’
기습적으로 닥쳐온 스미레의 엄청난 포용력에 잠을 못 이루던 김은아는 금방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