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보스들에겐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
그 역사가 게이트로 연결된 차원에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과거의 잔재인지 그것도 아니면 전혀 다른 차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인류는 그 역사를 훔쳐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모두 헌터들이 탑에서 얻어낸 정보의 집합체. ‘탑의 기록.’ 덕분이었다.
탑의 기록에 적혀 있는 사도닉스의 정보는 공략법이 아닌, 드래곤의 일생을 담은 하나의 일대기였다.
사아아-
모두의 눈앞에 홀로그램으로 떠오르는 푸른 빛.
[탑의 기록을 읽으시겠습니까?]
[정보 분류 : 보스]
[No5661 : 레드드래곤 사도닉스]
로쟈는 루키라 불리는 학생들을 모아두고도 무감한 얼굴로 말했다.
“대충 멘토들에게 설명은 들었겠지? 영광인 줄 알아. 이렇게 ‘탑의 기록’을 직접 읽는 건 최상위 헌터들에게만 허락되는 일이라고.”
기록을 읽는 법은 간단했다.
홀로그램에 손을 대며 적당한 마나를 부여하는 것. 로쟈는 짧은 설명을 덧 붙였다.
“탑의 기록을 읽을 땐 보스의 사소한 특징도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어라. 사소한 정보가 절호의 찬스가 되는 법이…….”
설명을 하던 로쟈가 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꽂힌 건, 하품을 하고 있는 웨이린. 뒤늦게 로쟈의 시선을 알아챈 웨이린은 움찔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이런 녀석을 다음 세대를 맡길 헌터로 뽑아오다니. 메이린이 불쌍하군.”
로쟈는 그런 웨이린을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리곤 섬뜩할 정도로 크게 눈을 뜬 채 스윽- 학생들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그리곤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로쟈는 웨이린의 어깨를 투욱- 투욱- 토닥였다.
“긴장 좀 해. 이 정도 레이드라면 너희들 중 누가 죽어나가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상대가 7급 헌터라 그런지 웨이린은 처음 받는 하대에도 싫은 티조차 내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카데미와는 다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은 홀로그램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다.
파스슷-!
홀로그램이 손에 닿자 튀기는 푸른색 스파크. 신유성은 천천히 손에 마나를 부여했다.
‘……여기에 마나를.’
사아-!
그리고 마나를 부여하자마자 덮쳐오는 하얀색 빛. 호텔의 풍경은 이미 점멸해 사라지고 세상은 난생 처음 보는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 * *
신유성은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 포켓으로 파티원들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신유성:내가 없는 동안 파티 카드로 탑을 클리어 해줘.]
현재 기록된 탑의 층수는 2.
파티원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목표인 20층까지 어려운 구간이라곤 보스 스테이지로 알려진 10층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흙투성이가 된 김은아와 에이미는 허망한 얼굴로 바위에 앉아 있었다.
“이걸 5층부터… 이 고생을 하네….”
장장 8시간을 숲에서 뛰어다닌 김은아.
“나 진짜 앞발을 탁! 만졌는데. 얘가 갑자기 발을 팟! 하니까 하늘을 날더라니까? 흐잉, 날개도 없는 토끼가 왜 하늘을 날아…….”
다 잡은 은토끼를 코앞에서 놓친 에이미. 곱게 자란 두 소녀가 이런 고생을 하고 있는 건 탑이 준 퀘스트 때문이었다.
[5층 입장 조건: 은토끼와 황금쥐를 포획하시오.]
[은토끼 0/5]
[황금쥐 0/5]
[정보: 은토끼는 낮에 활동합니다.]
[정보: 황금쥐는 밤에 활동합니다.]
김은아와 에이미의 목표는 오직 낮에만 돌아다니는 은색의 토끼. 하지만 은토끼는 겁도 많고. 무엇보다 땅굴을 이용해 신출귀몰한 움직임을 자랑했다.
“포획만 아니었어도…….”
김은아는 은토끼를 1마리도 못 잡았다는 사실이 분해보였다. 사실 은토끼를 잡아낼 기회가 김은아에게 없었던 건 아니었다.
아무리 빨라봤자 결국은 토끼.
김은아의 번개를 피할 순 없었다.
“하긴 ……전기구이로 만든 것만 잡았어도. 2마리는 되니까.”
에이미의 말처럼 김은아는 은토끼를 노릇하게 구워 버렸다. 전기를 은토끼가 기절할 정도로만 방출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5급 헌터가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토끼 따위에게 좌절하다니.
한숨을 쉬는 김은아의 옆에서 에이미는 축 늘어져 있었다.
“은아야. 나 배고파…….”
배를 쥔 채, 풀이 죽은 얼굴의 에이미. 장장 8시간을 굶으며 뛰어 다녔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다.
“나도……. 근데 스미레는 찾아야지. 분명 우리보다 더 고생하고 있을 걸?”
김은아가 남을 걱정을 하다니 이전에는 생각 할 수도 없을 모습.
“맞아. 스미레는 지금 혼자니까. 외롭기도 엄청 외롭겠지. 빨리 우리가 찾아줘야 하는데……. 흐으 메시지만 작동했어도…….”
전파의 방해라도 있는 건지 5층 부터는 포켓의 메시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즉 고립된 스미레를 찾아내기 위해선 섬을 뒤져가며 직접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일단 걷자.”
동 떨어져 있을 스미레를 생각하며 힘을 내는 김은아와 에이미.
트득. 툭. 투두둑-
쏴아아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는 설상가상 폭우까지 쏟아졌고. 김은아와 에이미는 비가 내리는 산길을 말없이 추적추적 걸었다.
비 때문인지 걸을수록 발이 푹푹 빠지는 흙길. 빗물에 젖어 무거워 지는 몸.
“에, 에취! 크흥-”
체온이 떨어진 탓인지 에이미는 기침을 했다.
“파티장님은 크흥! 훌쩍……. 마나 배리어로 우산도 만드시던데. 나도 해볼까.”
에이미가 붉어진 코를 검지로 스윽 닦으며 중얼거리자. 김은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배고파지니까. 괜히 힘 빼지 마. 1분도 유지 못할 걸…….”
그렇게 스미레를 찾아 패잔병들처럼 힘없이 걷고 있을 때, 에이미는 김은아의 옷깃을 잡은 채로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어, 은아야! 저기! 저기! 토끼!”
에이미의 눈썰미는 정확했다.
은토끼는 비가 온 탓에 재빠른 몸놀림으로 땅굴에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은아야! 내가 채찍으로 잡을 게!”
포켓에서 재빨리 무기를 꺼내는 에이미. 하지만 김은아는 다급하게 몸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이미 늦었어!”
땅굴이 코앞인 지금 채찍으로 은토끼를 잡는 건 불가능했다. 이렇게 된 이상 은토끼를 잡을 무기는 오직 전기 뿐.
마침 김은아의 주변은 폭우 때문에 온통 물투성이였다.
은토끼를 감전시키기엔 최적의 상황. 김은아는 물웅덩이를 발로 내리찍으며 소리쳤다.
“번져라!”
첨벙!
지지직-!
스파크와 함께 번쩍이는 김은아의 발. 빗물을 따라 전기가 퍼져 나가자 에이미는 김은아가 쏜 짜릿한 전기의 맛에 몸을 떨었다.
“아댜댜댜-!”
하지만 김은아는 에이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자, 잡았다! 토끼를 잡았다!”
그 자리에서 기절한 은토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이미를 버린 채로 후다닥 은토끼에게 달려가는 김은아.
척!
김은아는 재빨리 기절한 은토끼의 몸에 손을 올렸다.
두근. 두근.
은토끼의 몸에서 느껴지는 살아있는 생물의 박동.
“……살아있다. 토끼까 살아있어!”
8시간 만의 첫 포획에 감격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김은아. 빗물 속에 쓰러진 에이미는 그런 김은아를 보며 중얼거렸다.
“이거 너무한 거 아니니…….”
[은토끼 1/5]
포획한 은토끼가 사라지며 올라가는 카운트.
“에취-! 크흥- 훌쩍…….”
비에 젖은 에이미가 다시 기침을 하자. 김은아는 안쓰러운 얼굴로 손을 뻗었다.
“야, 좀만 힘내봐. 이제 스미레만 찾으면 돼.”
“응……. 맞아. 힘내자. 스미레는 지금도 우릴 찾으며 빗속을 걷고 있을지 몰라……. 아니 확실해!”
다짐을 되새기며 빗물 속에서 비틀비틀 일어나는 에이미.
툭툭.
그때 누군가 김은아의 등을 검지로 건드렸다. 스미레라고 확신했는지 다급하게 뒤를 도는 김은아.
“흐악! 아이 씨! 놀래라!”
철벅!
그러나 뒤에서 튀어나온 기괴한 비얼에 김은아는 주저앉고 말았다.
김은아를 부른 건 다름 아닌 스미레의 해골들.
“이거 스미레가 만든 거잖아!”
드디어 스미레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에 김은아가 기뻐하자. 엉망이 된 에이미도 고개를 끄덕이며 해골을 가리켰다.
“은아야! 저거 자기들 따라 오라는 거 같아!”
해골들은 김은아와 에이미를 어딘가로 인도했다. 어둑해질 정도로 긴 시간을 걸으며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섬의 정중앙.
“다리 아파……. 근데 뭐야 저거?”
“야, 야영지?”
김은아와 에이미의 눈에 대형 텐트와 천막까지 두른 잘 만들어진 야영지가 보였다.
거기다 배고픈 둘에게 풍겨오는 거부 할 수 없는 맛있는 냄새.
“이게 대체 무슨…….”
당황한 김은아가 스윽- 천막을 걷어내자. 안에 있던 스미레는 기쁜 얼굴로 둘을 반겼다.
“은아 씨! 에이미 씨!”
현실의 스미레는 김은아와 에이미가 걱정했던 상상속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따뜻한 텐트 속에서 해골들과 요리를 하는 스미레의 모습은 외로워 보이지도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와…….”
“와…….”
김은아와 에이미가 엉망이 된 모습으로 멍을 때리자. 둘의 모습을 확인한 스미레는 화들짝 놀랐다.
“으, 은아 씨!? 에이미 씨!?”
스미레를 확인한 김은아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우, 우리는 빗속에서…… 개고생하면서 토끼만 잡고 있었는데……. 여긴 뭐야. 천국이야?”
“맞아. 토끼. 무척 빨랐다구…….”
에이미가 풀이 죽은 얼굴로 옆에서 끄덕이자. 스미레는 은토끼를 잡아둔 케이지를 가리켰다.
“아 그건, 걱정 마세요! 두 분 몫인 10마리까지 모두 잡아놨어요!”
정말 스미레의 말처럼 텐트의 구석에는 은토끼 10마리가 잡혀 있는 케이스가 있었다.
“진짜네. 대체 어떻게…….”
“후훗, 내가 힘을 썼지. 우두머리를 매혹했거든.”
아무래도 은토끼를 잡은 건 릴리스의 매혹. 스미레는 얼이 나간 김은아와 에이미에게 국자를 든 채 상냥하게 웃어주었다.
“오늘 메뉴는 카레에요!”
김은아와 에이미의 생각보다 스미레는 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