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메트로 시티 ‘지하수로 공략’
자신이 따두었다고 생각한 계약을 김은아 때문에 놓치게 되자 신강윤은 기분이 몹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김은아라고 했지.’
신강윤은 머리를 식히고 싶었지만 자꾸 김은아의 의기양양한 표정이 떠올라 휴식을 방해했다.
신강윤은 7급 헌터이자 신오가문의 가주. 김은아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어린애였다.
하지만 김은아의 배경인 김석한은 이야기가 달랐다.
신성그룹의 회장인 김석한은 철혈이라 불리는 금왕(金王) 아무리 신강윤이라도 한국 재계의 정점인 김석한에게 밉보여선 좋을 게 없었다.
‘피곤하게 됐군.’
신강윤은 턱을 괸 채 쯧- 하고 혀를 찼다. 무엇보다 신미향이 가주의 자리를 노리는 지금. 계약까지 놓치게 된 건 타이밍이 최악이었다.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정말 위험하겠어.’
모든 일의 시작은 신유성을 버린 이후부터였다.
고아원에 보낸 자신의 아들을 뜬금없이 권왕이 거두어 간 것도.
그런 아들이 최정상의 루키로 성장하고 있는 것도.
신오가문의 후계자에게 밉보이게 된 것도.
지금 신강윤은 그 한 번의 판단으로 신미향에게 좋은 약점을 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최악의 경우에는 명분을 얻은 신미향이 신오가문에 속한 3대 길드 마스터를 설득해 총회를 개최하는 것도 가능했다.
적을 늘리기엔 입지가 너무 불안한 상황. 그러니 지금만큼이라도 신강윤은 신성그룹에게 척을 지는 걸 피해야했다.
‘……그 사이. 신성그룹의 후계자를 꼬드기다니. 재주가 많군.’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신강윤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아니. 처음부터 계획된 복수인가. 분명 이 순간을 위해 김은아를 파티에 넣었겠지.’
아니면 김은아가 자신에게 날을 세울 이유가 없는 일. 신강윤은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도를 숨기면서 파티원을 이용해 칼을 찌르다니 정말 치밀하군……. 역시 내 피를 이었다는 건가.’
신유성을 버린 건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 하지만 잘못은 바로잡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면 상관없겠지…… 하윤이가 손을 써줄 터이니.’
* * *
리벨리온의 아지트.
치트는 넋을 놓고 모니터의 화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기, 우리 내기할래?”
치트와 방에 남아 있는 건, 오직 자신뿐. 유월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치트에게 대답했다.
“내기라니. 무엇을 말이죠?”
“쟤네들. 십년지기 사이라던데 상대에게 배신당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알맹이는…….”
유월은 치트가 귀찮았다.
이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받아주는 클로가 존경스러울 따름. 매사에 진지함이 없는 치트는 자신과 상극이었다.
유월이 싫은 티를 내어도 치트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처음엔 놀랄 거 아냐. 화를 낼 수도 있을 거고. 멍 때릴 수도 있을 거고. 울어 버릴 수도……. 아 그거 좀 괜찮네. 강한 애들이 눈물 흘리는 건…… 역시…….”
“다시 말하지만. 당신의 취향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손톱을 질근 물며 실실 웃는 치트와 이야기를 일축해버리는 유월.
치트는 뾰족한 이를 드러내며 씨익하고 웃더니 여러 개의 모니터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럼 차라리 이런 내기는 어때?”
모니터에 있는 건, 카스텔라나 호텔에서 회의 중인 헌터들의 모습. 치트는 한껏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유월에게 말했다.
“……들킨다. 들키지 않는다?”
내기는 이미 시작된 지 오래였다.
* * *
화분에 핀 아름다운 노란색 꽃.
듬성듬성 나무들이 세워진 공기 좋은 테라스. 신유성과 잇신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한참 야외 테라스를 걸었다.
“……영국전은 잘 봤다. 역시 너희 팀은 강하더군.”
잇신은 말을 뱉고 나자 괜한 민망함이 몰려왔다.
‘어울리지 않는 짓을…….’
하지만 국가대항전에서 벌인 한국과의 결전에서 잇신은 결국 인정 할 수밖에 없었다.
잇신은 자신이 스미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했다. 스미레가 떠난 후 계속 마음 한 편에 남았던 가정이 분노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게 명확해진 지금.
잇신은 조금은 부드러워진 얼굴로 신유성에게 물었다.
“……스미레가 나오지 않았던 건 성자의 구 때문이겠지?”
“응. 성자의 구에 빛은 언데드에게 치명적이니까.”
“역시 넌…… 좋은 파티장이군.”
잇신의 입에는 ‘나와 다르게’라는 말이 나오지 못하고 머물렀다. 힘든 일이 있었던 스미레를 위로 해주지 못한 자신과 신유성은 너무나도 달랐다.
스미레가 말한 것처럼 신유성은 분명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처럼 보였다. 기억을 곱씹을수록 가슴이 아릿한 미묘한 기분.
잇신은 입술을 꾹 물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스, 스미레를…… 잘 부탁한다.”
신유성은 잇신의 부탁에 미소를 지으며 웃어주었다.
“물론이지.”
물론 중급부 시절의 이야기지만 잇신과 스미레는 한 때 파티원이었던 사이. 신유성은 조금이나마 잇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미 신유성은 잇신이 쵸텐에서 보여준 스미레를 향한 분노가 미움 때문은 아닐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건 화를 내는 잇신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표현이 서툴렀을 뿐이겠지.’
거기다 일본 팀은 패자부활전에서 살아 돌아오며 신유성이 계획 중인 동아시아 연합의 귀중한 인재였다.
서로에게 어떤 감정의 앙금도 없는 편이 연합을 맺기에 좋았다.
“잇신. 아까, 나온 이야기지만. 나도 너희 일본 팀에게 부탁하고 싶어.”
“국가대항전의 이야기겠지? 유럽 쪽의 기세가 심상치 않으니까.”
“너흰 어떻게 생각해?”
신유성의 질문에 잇신은 잠깐 포켓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곤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건 세이지와 사쿠라가 있어야 결정 가능한 문제다. ……하지만 나도 말 정도는 전할 수 있겠지. 사쿠라는 그 총잡이와 우호적이기도 하고 말이야.”
어떻게든 파티장인 세이지에게 말을 전하겠다는 이야기. 잇신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건 분명한 호의였다.
“고마워. 연합 이야기는 네가 말을 전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해.”
신유성이 다시 웃어주자. 잇신은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자신과 반대의 성격.
스미레를 행복하게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신유성 같았다.
“……생각해보니 방금 전의 부탁은 주제넘었군. 이제 스미레와 나는 파티원도. 무엇도 아닌데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입가에 맴도는 씁쓸한 맛. 잇신은 한숨을 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도 염치 불구하고 묻지. 신유성. 스미레는…… 잘 지내고 있나?”
이렇게까지 걱정한다는 건 스미레를 아껴주었다는 증거. 신유성은 잇신의 마음이 오히려 고마웠다.
“잘 지내고 있어. 이곳에 오기 전엔 같이 학원도시도 갔었는걸.”
“……주말의 학원도시라. 그렇군.”
누가 봐도 명백한 데이트.
잇신은 얼굴에 드러나는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스미레에게 신유성이 그렇게 신뢰하는 대상이라면 오히려 사귀지 않는 게 이상했다.
“학원도시의 공원은 일본에도 소문이 날 정도니까. 같이 들러보는 것도 좋겠군. ……스미레는 꽃을 좋아하니까.”
잇신은 이름 모를 하얀색 꽃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이었다.
“……그리고 요리를 좋아하는 녀석이니 가끔 같이 식사를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잇신은 고백하기도 전에 차여버린 자신이 신유성에게 훈수를 두는 꼴이 우스웠다.
어쩌면 지금의 말은 자신이 스미레에게 해주고 싶었던 일들 일지도 몰랐다.
“공원은 이미 갔어. 스미레와 같이 저녁 식사도 하고. 아침도…….”
하지만 웃으며 내뱉는 신유성의 말에 잇신은 문득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보기엔 평범한 말이었지만 어딘가 흘려들을 수 없었다.
“……저녁? 아침? 그, 그건 마치 같이 밤을 보내기라도 한 것처럼 들린다만?”
당황한 잇신의 물음에 신유성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맞아.”
신유성의 심플한 두 글자 대답.
잇신은 냉정한 평소와 달리 말까지 더듬었다.
“그, 그게! 무슨! 가, 같은 침대라도 썼단 말이냐?”
그러나 신유성이 스미레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침대에서 잠이든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렇지. 스미레가 같이 있길 원했으니까.”
신유성이 오해를 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자.
“하, 하지만 너흰 아직 학생…….”
주륵-
중얼거리던 잇신은 폭주하는 상상력에 그만 코피를 흘렸다.
저런 순진한 얼굴로 스미레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니. 결국 바보 같은 표정이 된 잇신에게 신유성은 아까처럼 환하게 웃어주었다.